우주먼지가 번역한 우주 - 칼 세이건의 『콘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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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먼지가 번역한 우주 - 칼 세이건의 『콘택트』
  • 이상원 서평위원/서울대·통번역학
  • 승인 2024.02.25 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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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베르타스]

 

미국의 천문학자로 저서와 방송 등을 통한 과학 대중화에 힘썼던 칼 세이건이 1985년에 출간한 소설이다. 전파망원경으로 외계 생명체가 보내는 신호를 잡으려 하는 천문학 박사 엘리 애로웨이가 직녀성의 신호를 수신하고 신호에 담긴 설계도대로 ‘기계’ 장치를 만들어 외계 존재와 조우한다는 내용이다.

주인공 엘리가 참여하는 외계 지적 생명체 탐사 SETI(Searching for Extra-Terrestrial Intelligence)는 칼 세이건이 1984년부터 주도한 연구이기도 하다. 작가는 15년 정도 연구가 진행된 1999년 말이면 외계의 신호를 수신하는 과학적 성과를 내게 되리라 기대했던 것 같다. 그래서 소설은 1999년의 마지막 날에 지구를 대표하는 과학자 다섯 명이 기계에 탑승해 블랙홀 통로를 거쳐 이동한 끝에 외계 존재와 만나고 돌아오는 모습을 그렸다.

작가 칼 게이건은 60대 초반이던 1996년, 새천년을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SETI 연구에 대한 그의 기대는 애석하게도 지금까지 실현되지 못했다. 그리고 번역가인 나는 새천년이 막 지나간 때 이 책 작업 의뢰를 받았고 2001년에 번역서가 출판되었다. 이후 벌써 20년 넘는 세월이 흘렀다. 대문호의 작품이 아닌 경우 소설은 대개 수명이 짧지만 이 책은 지금까지 읽히고 있다. 이유가 무엇일까? SETI 연구가 별 성과를 내지 못했다는 점도 어쩌면 여기에 기여했을 것이다. 우리에게 외계 생명체는 여전히 미지의 영역이고 그래서 이를 다룬 소설은 계속 흥미진진하니까.

소설이 지닌 그 밖의 여러 매력도 중요한 이유가 될 것 같다. 일단 작가가 보여주는 작품 속 세상은 40여 년이 흐른 지금을 성찰하도록 만드는 데 부족함이 없다. 대부분이 현재 진행형이기 때문이다. 연구비를 둘러싼 경쟁, 세계 열강의 대립(80년대에 미국과 대립각을 세우던 소련은 사라졌지만, 패권의 각축은 여전하지 않은가.), 과학계의 여성 차별, 종교인과 무신론자의 논쟁 등등.

여러 등장인물이 보여주는 다양한 삶의 모습도 인상적이다. 최고의 인공지능 기업을 이끄는 재벌 사업가 헤든은 진시황이 이루지 못한 불멸의 꿈을 우주를 통해 시도한다. 그리하여 홀로 우주선을 타고 떠난다. 실컷 우주 풍경을 감상하다가 냉동되어 언젠가 앞선 지능을 지닌 존재의 손으로 되살아나려는 것이다. 주인공 엘리는 어린 시절에 여읜 아버지를 평생 그리워하며 계부와 원수처럼 지냈다. 하지만 어머니가 세상을 뜬 후 남겨준 편지를 통해 자신이 불륜 관계에서 태어난 딸이었다는 것, 그토록 미워했던 계부가 친부였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는다. 외계 생명체의 존재에 매달리느라 정작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는 생각하지 못했던 셈이다.

『콘택트』 속 외계 생명체는 어떻게 생겼을 것 같은가? 다른 영화나 소설 등에서 접한 여러 형상을 상상하겠지만 이 작품에서는 외계 생명체가 본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엘리를 포함해 기계에 탑승한 다섯 과학자들이 만난 외계 생명체는 각자 마음속에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 누군가, 간절히 만나고 싶은 누군가이다. 인간의 두뇌에 저장된 정보를 다 읽어낸 후 그 누군가의 외형과 음성, 기억 속 장소를 재현하고 대화를 시도하는 것이다. 참으로 기발하다. 그리고 인간보다 훨씬 앞서 나간 존재라면 과연 그렇게 접근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작가와 주인공이 모두 천문학자인 만큼 이 책에는 천문학 개념과 용어가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번역 초년병이었고 웹 검색이 지금보다 퍽 제한적이었던 시절이라 작업하면서 고생을 좀 했다. 그럼에도 이 책 덕분에 나는 우주에 대해 인식할 기회를 얻었다. 어차피 나는 ‘우주먼지’에 불과한 존재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는 일도 그때 시작되었다. 나라는 우주먼지가 느끼는 고통과 기쁨은 밤하늘이 보여주는 광대한 우주에 비하면 얼마나 사소한지 기억하려는 입버릇이다.

 

이상원 서평위원/서울대·통번역학

서울대학교 가정관리학과와 노어노문학과를 졸업하고 한국외국어대학교 통번역대학원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서울대학교 기초교육원 강의교수로, 글쓰기 강좌를 운영하며 저서 『나를 일으키는 글쓰기』, 『번역은 연애와 같아서』, 『서울대 인문학 글쓰기 강의』, 『매우 사적인 글쓰기 수업』, 『엄마와 함께한 세 번의 여행』 등을 출간했으며, 『첫사랑』, 『살아갈 날들을 위한 공부』, 『안톤 체호프 단편선』과 같은 러시아 고전을 비롯하여 『적을 만들지 않는 대화법』, 『홍위병』, 『콘택트』, 『레베카』 등 90여 권의 번역서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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