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탁에 홀린 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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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탁에 홀린 자들
  • 조현설 서울대·구비문학
  • 승인 2024.02.25 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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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테제_ 『신탁 콤플렉스: 신화와 전설로 읽는 한국 사회의 불안과 점복 문화』 (조현설 지음, 이학사, 208쪽, 2024.01)

 

우리가 모두 아는 심청 이야기가 있다. 본래 판소리와 소설, 또는 설화로 전승되다가 근대소설과 드라마와 영화로, 근래에는 창극과 뮤지컬, 웹툰으로 장르를 바꿔가면서 반복적으로 재현되는 이야기다. 눈먼 아버지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딸의 이야기, 전 세계 어디에나 있을 법한 이야기다.

그런데 우리가 모르거나 놓치고 있는 대목이 있다. ‘심청이 인당수에 몸을 던지지 않고 공양미 삼백 석을 구할 방도는 없었는가’라는 물음이 그것이다. 이런 물음이 반복적으로 제기되었기 때문에 판소리는 현장의 목소리를 반영하여 장승상 부인을 추가한다. 부유한 승상의 부인이 수양딸을 조건으로 삼백 석을 주겠다고 제안한다. 가난한 심청의 처지로 보면 목숨도 살리고 공양미도 얻는 일거양득의 방안이다. 그러나 심청은 이 제안을 거절한다.

거절한 이유는 무엇인가? 약속을 어기면 못난 사람이다, 쌀 삼백 석을 돌려주면 뱃사람들이 낭패를 볼 것이라는 등의 이유를 든다. 그러나 심청의 마음속에 고여 있던 진짜 이유는 부모를 위해 공을 빌면서 명분 없는 남의 재물을 바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장승상 부인의 삼백 석을 거절한 진짜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왜 심청의 마음에 ‘명분 없는 재물’이 걸렸을까? 신에게 제물을 바칠 때 제일 중요한 것은 ‘정성’이다. 제물의 양보다 진심이 끽긴하다. 그래서 구렁에 빠져 허우적대던 심봉사를 살려 준 화주승이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우리 절 부처님은 영험이 많으셔서 빌어서 아니 되는 일이 없고 구하면 응답을 주시니 공양미 삼백 석을 부처님께 올리고 지성으로 불공을 드리면 반드시 눈을 떠서 성한 사람이 되어 천지 만물을 보오리다. (완판본 『심청전』)

권선책을 들고 다니며 공양미 모으는 것이 직무인 화주승의 입에서 나올 만한 말이다. 화주승은 ‘지성으로 불공을 드리면 눈을 뜨리라’고 말한다. 지성이 조건이고 개안이 결과다. 공양미를 바쳐도 정성이 부족하면 눈을 못 뜰 수 있다. 이 인과율에는 중요한 비밀이 숨어 있다. 개안을 하고 못 하고는 부처님의 문제가 아니다. 지극정성을 바쳐야 하는 인간의 문제다. 개안에 실패하는 것은 시주를 바치는 자의 정성이 부족해서니까!

화주승의 말을 들은 심봉사는 눈을 뜨고 싶어 덜컥 약속을 해놓고는 좌불안석의 상태에 빠진다. 왜냐하면 화주승의 말에 홀려 부처님과 약조했기 때문이다. 약조를 못 지켜 부처님을 속이게 된다면 ‘개안은 고사하고 끝이 좋지 않으리라’며 두려워한다. 심봉사의 불안은 곧 딸에게 전이된다. 그래서 심청은 명분 없는 재물을 거절하고, 약속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제물과 교환한다. 심청은 지극정성을 바쳐 신과의 약속을 지키려고 인당수로 나아간다.

‘지성으로 불공을 드리면 눈을 뜨리라’는 화주승의 전언은 승려를 매개한 부처님의 말이다. 이 말을 모든 종교에 통용되는 용어로 일반화하면 ‘신탁(oracle)’이다. 심봉사가 이 신탁을 듣지 않았다면, 들었어도 한 귀로 흘려 버렸더라면, 그것도 아니라면 공양미를 마련할 도리가 없다고 체념했더라면 신탁은 힘을 발휘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심봉사는 화주승이 전달한 신탁에 고개를 돌린다. 신탁에 홀려 신과 맹약을 해버린다. 심봉사는 맹안의 불안에서 벗어나기 위해 신탁을 받아들였는데 그러자 신탁이 새로운 불안을 야기한다. 그리고 이 불안은 심청의 공명까지 불러일으킨다.

신탁에 홀려 이행 불가능한 약조를 하고, 마침내 약조를 지키려고 딸까지 판 심봉사의 심리상태를 뭐라고 부를 수 있을까? 번제단에 이삭을 바치려고 칼을 드는 아브라함, 신과의 맹서를 지키려고 자살폭탄을 터트리는 이슬람 전사들의 마음은 이와 다를까? 신흥 종교의 신탁에 빠져 부모를 저버리고 가출하는 젊은이들, 무당의 신탁에 사로잡혀 가산을 탕진하는 늙은이들은 다를까? 풍수가의 신탁에 홀려 집을 옮기고 묘를 파헤치는 정치업자들은 다른가? 불안에서 촉발하여 신탁에 대한 집착으로 이행하는 심리, 이야기 속의 그와 같은 캐릭터를 설명하기 위해 나는 ‘신탁 콤플렉스’라는 개념을 만들었다.

 

조선 광해군 때 성지(性智, ?~1623)라는 승려가 있었다. 전설의 주인공이기도 한 성지 도사는 풍수로 이름을 얻었는데 광해군의 눈에 들어 한양으로 올라와 전횡을 일삼다가, 마침내 인조반정 때 복주를 당한 중이다. 『광해군일기』는 성지에 대해 이렇게 썼다.

성지는 미친 중으로, 스스로 지리(地理)에 대한 방서(方書)를 잘 이해한다고 하였다. 글을 읽을 줄 몰라서 언문으로 풍수에 대해 논하였는데, 예전 방술 대로 하지 않아 괴이하고 어긋나서 가소로웠다. 그는 ‘인왕산은 돌산으로 몹시 기이하게 솟아 있으며, 또 인왕(仁王)이란 두 글자가 바로 길(吉)한 참언(讖言)이다. 그러므로 만약 왕자(王者)가 그곳에 살 경우 국가의 운수를 늘릴 수 있고 태평시대를 이룰 수 있다.’고 떠들어 댔다. 또 ‘국초(國初)에 사직단의 터를 이곳에 잡은 것은 당시의 술사(術士)가 반드시 소견이 있어서였다. 그러니 사직단을 다른 곳으로 옮기고서 그 터에다 궁궐 자리를 잡아야 한다. 임금이 편안하게 지내면 사직 역시 견고한 것이니, 마땅히 옮겨야지 무슨 의심을 둘 것이 있겠는가.’라고 하였으므로 듣는 자들이 크게 놀랐다. 마침내 사단(社壇)의 담장 바깥에다 궁궐터를 정하였다. 

광해군은 어려서 생모를 잃고 부왕 선조의 냉대 속에서 성장한 인물이다. 적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세자 책봉 과정에서 갖은 시비에 시달렸다. 임란 이후 천신만고 끝에 왕위에 올라 당쟁을 수습하고 국방과 외교에 힘을 기울였으나 방계 승통에 대한 견제로 인해 열등감과 불안감에 부대꼈다.

불안은 신탁을 부른다. 광해군은 궁궐을 옮겨야 한다는 성지 도사의 말에 홀린다. 광해군을 등에 업은 성지는 궁을 새로 짓는다고 영조도감(營造都監)을 설치하여 민가를 헐었다. 조선 팔도에서 재목을 징발하고, 승군(僧軍)을 노역에 동원하여 한양에는 중들이 가득했다고 한다. 성지 도사는 궁궐을 지은 공으로 첨지중추부사라는 벼슬을 얻었고, 궁궐 옆에 제 집도 지었는데 성지한테 줄을 대려는 승려들이 몰려들어 집이 마치 절과 같았다는 풍문도 전해진다.

권력자가 불안에 시달리면 신탁 중개자가 꼬이게 마련이다. 광해군은 평생 출생의 불안감을 벗으려고 애썼으나 성지와 같은 신탁 중개자를 곁에 둠으로써 신탁 콤플렉스에 빠져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궁을 새로 지어야 태평 세상이 열릴 것이라는 신탁에 홀려 일을 벌였으나 오히려 그 때문에 폐위되는 운명을 맞았다. 제 운명도 모르고 신탁을 남발하다가 목이 잘린 성지도 마찬가지다. 구전되는 전설에서는 성지 도사가 어려서 여우한테 홀려 여우구슬을 삼켰다고 이야기한다. 광해군은 여우의 신탁에 홀려 망한 인물이다.

광해군만 그랬을까? 그리스신화의 오이디푸스와 그의 부친 라이오스 왕도 신탁에 홀려 비극에 이른 인물들이다. 테바이의 왕 라이오스는 왕위계승자가 없어 불안했다. 그래서 찾은 곳이 올림포스의 델포이 신전이다. 신전의 무녀는 ‘아들을 낳으면 아비를 죽이고 어미와 동침하리라’는 유명한 신탁을 내려준다. 라이오스는 신탁이 두려워 이오카스테와의 동침을 피하다가 아들을 낳자마자 죽이라고 명한다. 라이오스는 델포이의 신탁에 홀려 신탁으로부터 도망쳤기 때문에 신탁대로 아들한테 살해당한다.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한 오이디푸스 신화에 프로이트는 자신의 무의식 연구를 투사한다. 오이디푸스 신화 속에서 부친에 대한 적대감과 모친에 대한 성적 애착이라는 복합적 심리를 읽어낸 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개념을 부여했다. 그러나 장 피에르 베르낭이 지적했듯이 오이디푸스에게는 그런 콤플렉스가 없었다. 프로이트 평전을 쓴 미셸 옹프레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모든 사람에게 일반화하기 어려운 현상이며 프로이트의 유아적 소원이었을 뿐이었다고 혹평했다. 그래서 나는 오이디푸스뿐만 아니라 라이오스도 빠져 있었던 것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아니라 신탁 콤플렉스라고 보았다. 왕위 계승과 가문의 내력에 대한 불안감이 부자를 신탁에 집착하게 했고, 신탁은 부자의 불안을 강화했다. 그래서 신탁에 매달리게 되었고, 신탁을 피하려다가 신탁을 현실화한 비극의 주인공이 되고 만 것이다.

화주승의 신탁에 사로잡힌 심봉사, 성지 도사의 말에 현혹된 광해군, 델포이 무녀의 신탁에 고착되었던 라이오스와 오이디푸스는 우리의 일상과 문학 작품 안에 재현된 현실 어디에서 있을 법한 인물들이다. 이런 캐릭터를 이해하고 해석하려고 나는 굳이 신탁 콤플렉스라는 개념을 발명했다.

그런데 책을 쓰는 동안 나는 한국 문화와 문학 텍스트 안에는 신탁 콤플렉스로의 이행에 맞서는 문화소와 이를 구현한 캐릭터들이 적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예컨대 아버지에게 맞서다가 쫓겨난 딸이 오히려 아버지를 구원하고 신이 되었다는 신화는 신탁 안에 반(反)신탁을 형상화하는 수법을 구사함으로써 신탁이 콤플렉스에 빠지는 경로를 절단한다. 제주도 신화 <삼공본풀이>의 가믄장아기가 그런 인물이다. 또는 신점(神占)을 하나의 놀이로 만들어 즐김으로써 신탁의 절대화가 야기하는 신탁 콤플렉스로부터 탈주케 하는 방식도 있다. 꼬댁각시놀이나 막둥이말놀이가 그런 사례들이다. 언필칭 점술공화국으로 불리는 한국 사회에서 우리들 대부분이 신탁 콤플렉스에 빠지지 않고 잘 살아가는 힘은 이런 반신탁 문화에서 나오는 것이다.

지난 세기, 과타리와 들뢰즈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전제하고 오이디푸스화를 넘어서려는 안티오이디푸스의 힘에 주목한 바 있다. 그러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픽션이라면 안티오이디푸스 콤플렉스도 개념적 허구일 수 있다. 오히려 주목해야 할 것은 신탁 콤플렉스와 반/탈신탁 콤플렉스가 아닐까? 유일신에 기초한 서구 정신사에서는 신탁이 콤플렉스로 작동하는 데 대한 이해는 있었어도 신탁을 콤플렉스로 규정하는 개념화는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책에는 쓰지 않은 문장이다. 향후 이런 문제에 대해 심도 있는 논의가 이어지기를 기대한다.

 

조현설 서울대·구비문학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동아시아 지역의 구비문학을 주로 비교 연구하고 있다. 근래에는 제주도 무속신화 연구에 집중하고 있으며 동방문학비교연구회 회장, 한국구비문학회 회장, 한국고전문학회 회장, 민족문학사연구소 공동대표를 역임했다. 쓴 책으로는 『동아시아 건국신화의 역사와 논리』, 『문신의 역사』, 『우리 신화의 수수께끼』, 『마고할미 신화연구』, 『고전 속에 누가 숨었는고 하니』, 『신화의 언어』 등이 있다. 『동명왕편』을 역해했고, 『일본 단일민족신화의 기원』을 번역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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