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는 공포와 혐오를 넘어설 수 있는가? - 정치 공동체와 시민다움의 집단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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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는 공포와 혐오를 넘어설 수 있는가? - 정치 공동체와 시민다움의 집단지성
  • 한상원 충북대·철학
  • 승인 2022.12.11 1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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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공포는 예속을 낳는 정념이다. 스피노자는 『신학정치론』에서 “미신을 낳고, 보존하고 키우는 것은 다름 아닌 공포”라고 말한다. 공포는 사유의 공간을 추방하며, 개인들 사이의 적대를 고조시켜 공동체적 연합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계몽의 변증법』에서 “반유대주의는 허위적 투사에서 비롯한다”고 주장한다. 공포에 사로잡힌 주체는 분노를 타자에게 투사함으로써 그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친다. 그 과정에서 ‘적’으로 설정되어 분노의 분출 대상이 되는 개인이나 집단이 나타난다. 마사 누스바움이 분석하듯, 공포의 정념은 타자의 이질성이 주는 불안을 견딜 수 없는 것으로 만든다. 이 때문에 일상이 된 공포는 혐오 역시 우리의 일상으로 만들었다.

글로벌 팬데믹 시대를 겪으며 등장한 ‘코로나 인종주의(Corona racism)’는 자신의 두려움을 잠재우기 위해 타자의 다름을 제거대상으로 설정하는 사고와 행동방식을 보여주었다. 2021년 3월 16일 벌어진 미국 애틀랜타 총격사건은 그 사례들 중 하나다. 주로 아시아계 여성들이 근무하는 스파 시설들에서 벌어진 총기난사로 사망한 8명 중 6명이 아시아계(4명은 한국계, 2명은 중국계) 여성들이었다. 이듬해인 2022년 1월에는 중국계 여성 미셸 고가 뉴욕 타임스퀘어역의 선로로 떠밀려 목숨을 잃었으며, 2월에는 한국계 여성 크리스티나 유나 리가 자신의 집까지 쫓아온 남성에게 흉기로 살해되었다. 10대들 사이에 ‘아시아인 뺨 때리기 챌린지’(Slap an Asian Challenge)가 유행했다는 보도가 나왔으며, 미국 연방수사국 FBI은 2019년부터 2020년 사이 아시아인 대상 증오범죄가 77% 증가했다고 밝혔다. 

한국 사회 역시 혐오의 동학에서 결코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혐오는 ‘외부’에 대한 두려움 속에 확산되기도 한다. 2018년 제주도에 입국한 예멘 난민들을 향해 표출된, 조작된 가짜뉴스를 타고 전파된 인종차별 혐오 정서는 2021년에는 대구에서 이슬람 사원 건립에 반대하는 주민들의 집단행동으로, 2022년에는 아프가니스탄 특별기여자 자녀들의 초등학교 입학에 반대하는 주민 시위로 이어졌다. 혐오는 ‘내부’를 향하기도 한다. 사람들은 사회적 약자에게 혐오정서를 표출하면서도 양심의 가책을 완화해주기 위한 기발한 논리를 발전시켰다. 그것은 약자에게 주어지는 보상을 ‘특권’이자 ‘혜택’으로 여기고, 이를 ‘역차별’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젠더 평등은 남성에 대한 역차별이고, 대중교통을 이용하게 해달라고 시위를 벌이는 장애인들은 역차별당하는 일반 시민들을 볼모로 잡는다. 이렇듯 논리적 뒷받침까지 갖춘 체계화된 형태의 공격적 혐오정서의 연장선에서 국가대표 운동선수는 숏컷 헤어스타일을 빌미로 ‘페미논란’에 휘말려야 했으며, 조선족 중국인들은 무분별하게 건강보험 재정을 받아가는 사람들이라고 공격을 받았다. 

이런 현상들은 우리 시대의 사회적 위기와 무관하지 않다. 가뜩이나 부재한 사회안전망의 무력화와 정글 같은 무한경쟁 논리에 따른 일상적 불안정 속에서 사람들은 언제든 ‘패배자’, ‘낙오자’가 될 수 있다는 ‘집단적 불안장애’에 시달리고 있다. 신자유주의 시대의 철저하게 원자화되고 고립된 상태 속에서 개인은 홀로 자신의 고통과 슬픔을 감당해야 한다. 그러다보니 타자의 고통은 연대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이것은 한나 아렌트가 말한 ‘자기중심적 슬픔’의 전형이다. 아렌트는 그러한 고독한 개인의 단절감이 결국 전체주의적 지배가 번성하기 위한 조건이 된다고 지적한다. 고립된 개인들로 이뤄진 사회에서 부재한 공동체를 대체하기 위한 ‘집단적 정념’의 등장은 필연적이다. 특정 집단에게 표출되는 집단적 혐오와 분노의 범람 속에서, 내가 느끼는 공포와 불안의 ‘원인’을 ‘인식’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을 모색하기 위한 성찰은 요원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우리가 민주주의를 정치적 공동체의 관점에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와 같이 주체의 역량을 수동적인 것으로 머물게 하는 집단정념의 상태를 벗어나기 위한 고민들이 필요하다. 

이는 민주주의가 ‘시민다움(civility)’의 조건을 요청한다는 사실을 뜻한다. 혹은 20세기 말 극단적 폭력의 사례들을 경험한 뒤 발리바르가 말하듯 ‘시민다움을 정치에 기입하기’가 오늘날 정치의 핵심 과제임을 뜻한다. 필자는 집단적 정념을 극복하기 위한 시민적 집단지성의 출현이 시민다움의 출발점을 이룬다고 말하고 싶다. 여기서 시민적 집단지성이란 정서를 억누르는 합리성이라는 이분법적 의미에서의 지성이 아니며, 절차적 합의를 통해 공동선이 달성될 수 있다는 절차적 형식주의를 함축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강조되어야 할 것은, 시민들이 사회가 처한 여러 위기들 속에서 이를 해결해나가는 논의 과정에 ‘참여’함으로써 자신이 정치적 공동체의 일원임을 확인하는 소속감과 연대감을 경험하는 과정이다. 그러한 연대감은 증오와 원한 감정의 적대가 아니라 구조적 변화를 위한 적대, 공동체의 해체가 아니라 새로운 해방을 위한 적대가 출현할 수 있는 조건이기도 하다. 

오늘날 팬데믹, 전쟁, 기후위기, 경제위기 등 자연적, 사회적, 역사적 파국의 한복판에서 공포와 혐오의 힘을 극복할 수 있는 연대성과 공동체적 감각의 출현을 요청하는 것은 메시아적 관점이라고 비판받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최근 갑작스레 생을 달리한 고 노옥희 울산교육감이 아프가니스탄 아이들의 손을 잡고 등교에 참여할 때 보여주었듯이, 꾸준한 실천이 만들어내는 파장이 사회를 바꿀 수 있다는 기대를 포기하지 말자. 그런 의미에서 고인의 명복을 빈다.


한상원 충북대·철학

비판이론과 현대 사회정치철학을 연구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민주주의, 세계시민주의, 포퓰리즘, 시민권, 반지성주의 등을 화두로 여러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앙겔루스 노부스의 시선: 아우구스티누스 맑스 벤야민』을 집필했으며, 『현대 정치철학의 네 가지 흐름』, 『비판적 사고: 어떻게 다르게 생각할 것인가』, 『근대 사회정치철학의 테제들』, 『모빌리티 존재에서 가치로』, 『아도르노와의 만남』, 『왜 지금 다시 마르크스인가』, 『팬데믹 이후의 시민권을 상상하다』 등을 공저했다. 충북대학교 철학과에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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