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 속에서 다져진 프랑스 낭만주의, 그 자유주의적 열망과 좌절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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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 속에서 다져진 프랑스 낭만주의, 그 자유주의적 열망과 좌절의 역사
  • 김도훈 이화여대·불문학
  • 승인 2022.11.27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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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말하다_ 『프랑스 낭만주의와 세기병』 (김도훈 지음, 이화여자대학교출판문화원, 392쪽, 2022.10)

 

이 책의 내용은 프랑스 낭만주의의 고고학에 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켜켜이 쌓인 프랑스 문학사의 지층 속에서 낭만주의의 유물을 발굴하고자 했고, 유물을 통하여 그 시대의 표상과 그 시대를 살던 사람들의 심상에 대한 복원도를 그리고자 했기 때문이다. 

낭만주의는 범유럽적 현상이었지만 이 책에서는 프랑스의 역사 속에서 프랑스 낭만주의의 특수성을 포착하고자 한다. 프랑스 낭만주의의 특수성은 역사 자체로부터 오는 것이라기보다는 역사에 대한 프랑스 낭만주의자들의 자유주의적 대응 방식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내면세계를 탐구한다고 알려진 프랑스 낭만주의의 글쓰기가 사회와 유리된 개인의 내면으로 함몰되는 퇴행적 행위가 아니라 개인과 사회와의 관계를 정립하는 능동적인 행위라고 할 수 있는 것도 바로 자유주의 정신이 프랑스 낭만주의의 지배적 이념으로 자리 잡게 되었기 때문이다. 

근대 사회의 일원이 된 개인들은 사회와 새로운 계약을 맺게 되었다. 낭만주의 개인의 자아는 근대 사회와의 관계를 정립하기 위해 자신과 사회의 표상을 새롭게 만들어야 했다. 프랑스 낭만주의 작가들도 정치가들과 마찬가지로 현실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현실의 표상을 새로이 구성하려 했기에 이들에게 있어서 미학적 영역과 정치적 영역이 구별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였다. 고전주의 미학에 대한 반발로 새로운 미학적 카테고리를 만드는데 진력했다고 하면서 프랑스 낭만주의를 단지 미학적인 차원에서만 협소하게 규정한 클리셰로부터 벗어나 프랑스 낭만주의를 폭넓게 조망하기 위해서는 이들의 정치 이념을 지탱하는 자유주의와의 관계에서 낭만주의를 새롭게 규정해야 한다.

개인이 사회관계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자유주의는 경제적 자유주의와 정치적 자유주의로 구별된다. 국가의 개입으로부터 시장 법칙의 자유를 지키려는 경제적 자유주의와 마찬가지로 정치적 자유주의도 국가로부터 개인의 자유를 지키려고 한다. 이런 까닭에 자유주의적 낭만주의 작가들은 개인의 자아를 익명적 존재로 만들어 사회의 한 부속품으로 환원시키려는 주류 사회의 시도에 격렬하게 저항하였다. 하지만 그들의 정치적 자유주의는 실패하였다. 반면에 부르주아 계급의 경제적 자유주의만이 승승장구하게 된 것이 그들이 당면한 불편한 현실이었다. 그 결과로 그들은 깊은 외상을 입었고, 이 상처를 통해 ‘세기병世紀病’에 감염되었다. 

 

지금으로부터 200여 년 전 유럽의 중심부인 프랑스에 대유행한 세기병이란 전염병의 원인은 바이러스나 세균이 아니라 세기병이란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세기 그 자체였다. 프랑스 문학사에서 말하는 세기병이란, 규범에 대한 사회적 준거 체계가 사라진 아노미 현상으로 인해 19세기 전반기 프랑스 낭만주의 세대가 겪었던 정체성 혼란 증상에서 기인한 몸과 마음 그리고 영혼의 병이다. 프랑스 대혁명에 뒤이은 왕정 폐지와 공화정 수립 그리고 공포정치, 나폴레옹의 제정과 왕정복고 그리고 나폴레옹의 100일 천하, 다시 왕정복고와 7월 혁명에 이은 7월 왕정, 또다시 1848년 혁명으로 수립된 제2 공화국과 나폴레옹 3세의 쿠데타에 뒤이은 제2 제정에 이르기까지, 프랑스 대혁명 이래 19세기 프랑스의 사회적 격변은 세기병을 일으킨 아노미 현상을 충분히 설명할 수 있는 역사적 배경이 된다. 

세기병의 전형적인 증상은 이유 없는 무기력과 권태, 염세적 태도와 환멸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프랑스 문학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멜랑콜리, 우울, ‘스플린spleen’과 같은 말이 이 병의 증상을 묘사하는 다른 말이다. 사실 이러한 증상은 오늘날 우울증이나 화병이란 진단명으로 일반화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병에 세기병이란 거창한 이름을 붙이면서 프랑스 낭만주의자들은, 어떻게 보면, 개인의 질병을 시대 상황 탓으로 돌리는 책임 전가를 한 것이 아닌가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런데 사람이 병에 걸리면 병에 걸린 자신의 상황을 파악하고, 바뀐 현실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기 위해서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로 조직할 수 있는 서사가 필요하다. 우리는 이것을 질병 서사라고 부르고자 한다. 이러한 서사 유형은 질병과 함께 사는 새로운 현실을 명확하게 인식하게 하는 한편 새로운 환경에서 변화를 겪는 자아를 탐구하고, 더 나아가서 새로운 자아를 형성하도록 한다. 

프랑스 낭만주의 작가들은 자신의 질병을 세기병이라 명명하면서 질병 서사에 매진하였다. 세기병이란 병명이 시사하듯이 이 병은 세기가 원인이 되어 발병한 것이니만큼 질병 서사가 밝히는 질병의 경험은 더 이상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인 문제가 된다. 프랑스 낭만주의 작가가 질병의 경험을 이야기하며 소통하고자 하는 행위는 세기병의 사회적 성격을 인지한 결과이다. 19세기에 들어와 자신들의 병적 상태를 세기병이라고 명명한 프랑스 낭만주의자들은 세기병의 압박하에서 ‘자아의 글쓰기écriture de moi’를 한 것이다. 세기병은 자아가 세상과 건강한 관계를 맺지 못하게 한다. 그런데 프랑스 낭만주의 작가는 자아의 글쓰기를 통하여 세상을 객체로 구축함과 동시에 자아를 주체로 구축하며, 이 과정에서 지시대상인 세상과 어떤 관계를 맺을지를 정한다. 그래서 프랑스 낭만주의 작가들의 질병 서사는 외부 관찰자의 입장에서 꼼꼼히 세기병 증상을 기록한 임상기록이기도 하지만, 환자가 자신의 질병을 분석하고 치유하고자 하는 투병기이기도 하다.

 

Discours sur lorigine et_les fondements de linégalité parmi les hommes(1755년 출간되어 낭만주의의 기폭제가 된 루소의 『인간 불평등 기원론』의 표제)<br>
Discours sur lorigine et_les fondements de linégalité parmi les hommes(1755년 출간되어 낭만주의의 기폭제가 된 루소의 『인간 불평등 기원론』의 표제)

프랑스 낭만주의 작가들은 이상과 현실의 괴리 속에서 고통을 겪는 자아의 고뇌를 글로 피력하였다. 이들이 글쓰기를 통해 추구했던 것은, 한편으로는 이 혼란한 현실을 파악하고 이 현실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을 알기 위한 것이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들이 세기병으로 인해 겪고 있는 고통을 독자들과 소통하기 위한 것이었다. 프랑스 낭만주의 작가들은 글쓰기를 통하여 자신과 동시대인이 겪는 세기병을 진단하고, 이를 치유하기 위해 서사를 만들어나갔다. 세기병에 걸린 프랑스 낭만주의 작가의 자아가 현실과의 대면에서 뒤로 물러나 내면으로 침잠하는 자폐증 증상을 보인다는 편향된 시각에서 탈피하여, 이 책에서는 낭만주의 작가의 대안적 담론 생산 능력을 여러 층위에서 확인해 보고자 한다.

그래서 가장 먼저 제기해야 하는 문제는 우리가 낭만주의의 특성이라고 하는 이성에 대한 감성의 우위, 막연한 불안감, ‘지금·여기’가 아닌 다른 것을 갈망하는 마음 등이 왜 특정 시점에 발생하였느냐 하는 점이다. 이 책은 프랑스 낭만주의가 어떻게 18세기 중반 유럽의 사회적 토양에서 싹을 틔웠는지 살펴보는 것을 출발점으로 삼는다. 그다음에는 이렇게 탄생한 낭만주주의의 배아가 19세기 프랑스의 역사 속에서 증식·분화되는 과정을 탐구할 것이며, 이렇게 함으로써 프랑스 낭만주의를 하나의 유기체로 보고, 그 발생·성장·진화 그리고 소멸 단계를 역사적 맥락 속에서 추적하고자 한다. 

이 책의 목적은 미학적인 접근만으로는 프랑스 낭만주의 문학 연구에 한계가 있음을 인식하여, 역사적 맥락 속에서 프랑스 낭만주의를 재해석하고, 프랑스의 역사, 즉 프랑스 낭만주의자들이 경험한 세기로부터 프랑스 낭만주의의 변별적 자질을 찾아내고자 하는 데 있다. 미학적인 관점에서 프랑스 낭만주의는 1820년대부터 1850년대에 이르기까지 고전주의 미학을 거부하는 일군의 프랑스 작가들이 새로운 미학적 범주를 생산한 예술 활동을 지탱하는 사상이라고 규정되곤 한다. 그런데 우리는 프랑스 낭만주의를 18세기 중반부터 19세기 전반기에 이르는 유럽 사회의 ‘세계관Weltanschauung’의 변혁과 밀접하게 관련지어 규정하고자 한다. 낭만주의 미학을 지탱하는 감성 중심의 새로운 세계관이 계몽주의를 지탱하던 이성 중심의 세계관과 충돌했는데, 프랑스 낭만주의에 대한 연구가 역사적인 접근을 요하는 지점이 바로 이곳이다. 우리는 유럽 근대 사회의 역사적 맥락 속에서 낭만주의의 특성을 이야기함과 동시에 프랑스 낭만주의 변별적 자질인 세기병을 집중적으로 조명함으로써, 유럽 낭만주의의 보편성과 함께 프랑스 낭만주의의 특수성을 대별해 보고자 한다.

흔히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들 한다. 문학사에도 마찬가지 논리가 적용될 수 있음을 프랑스 문학사가 보여준다. 고전주의와 사실주의가 프랑스 문학사의 주류로 자처하는 가운데 프랑스 낭만주의는 주변화의 길을 걸어야 했다. 이 책은 이러한 경향에 반하여 쓰였다. 하고많은 프랑스 낭만주의와 세기병에 관한 글 가운데 이런 책도 한 권 정도는 있어야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 잡는데 미약하나마 일조하리라 생각한다.


김도훈 이화여대·불문학

서울대학교 불어불문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프랑스 파리3대학교에서 프랑스 낭만주의 작가 알프레드 뮈세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이화여자대학교 불어불문학과와 미디어예술인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 『퀘벡 영화의 클리셰』, 『디지털 시대의 인문학: 무엇을 할 것인가』(공저) 등이 있고, 역서로 『세기아의 고백』, 『시나리오』, 『몰리에르 희곡선』(공역)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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