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김 시대에 있었던 ‘라떼는 말이야’ 한토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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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김 시대에 있었던 ‘라떼는 말이야’ 한토막
  • 이기홍 논설위원/강원대·사회학
  • 승인 2020.02.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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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직설]

어느 교수가 3김 중 한 분의 막사에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었다 (물론, 열심히 드나든다고 소문난 교수는 한둘이 아니었다). 심지어 ‘귀하는 눈도장을 충분히 찍었으니, 인제 그만 오셔도 괜찮다’는 치하까지 들었다는 풍문도 있었다. 그 교수는 마침내 비례대표 국회의원이 되었다. 주변의 공식적인 반응은 ‘학문적으로 큰 업적을 내실 수 있는 분인데, 안타깝다’였다. 비공식적인 반응은 구태여 밝힐 필요가 없겠다. 국회의원이 할 수 있는 일이 그다지 많지 않은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인재’를 발탁하면서 평판도 탐문하지 않느냐는 뒷담화는 사족이다.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정당들이 앞다투어 ‘인재’를 영입하고 있다. 하지만 놀랍지도 않게, 그 인재들 속에 대학교수는 들어있지 않다. 더 이상 교수는 ‘인재’가 아니고 대학은 인재의 저수지가 아니라는 사실을 이제는 정당들도 알아차린 모양이다.

인재 영입이라는 깜짝 쇼가 그럭저럭 흥행하는 것은, 적어도 어느 정도는 사회가 중시하는 가치를 상징하는 인물을 정치 영역에 끌어들여서 정치가 기득권 세력에 독점되어 있지 않으며 사사로운 이익 추구를 넘어 공공의 가치 실현에 기여한다는 인상을 주고 그것으로 작으나마 감동을 일으키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거기까지이다. 영입된 인재들이 정치판을 정화하지는 못하더라도 혼탁함의 정도를 희석하기라도 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것이 없다).

그리고 저간에 교수들이 그럭저럭 인재로 징발될 수 있었던 것은, 기득권의 이익에 복무하지 않고 공공가치 구현에 나름대로 공헌한, 그래서 ‘지성’이라고 부를 수 있는 교수들이 대학에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정치권은 그런 ‘지성들’이 아니라 구미에 맞는 교수들을 징발하지만, 그것조차도 그런 ‘지성들’이 대학의 권위를 보위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지만 신자유주의 정부가 경쟁력과 효율성이라는 허울로 대학에도 시장 원리와 기업경영 기법 (구미 대학들에 ‘신공공관리’라는 이름으로 유입된 제도들을, 늘 그렇듯이 천박하게 모방한 것이다. 과문한 탓이겠지만 교수 전체를 평가해서 한 줄로 세우는 대학이 ‘선진국!’에 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 하기야 50만 명의 고등학교 3학년 학생을 시험점수에 따라 한 줄로 세우는 제도가 바람직하다고 우기는 사람들도 있다)을 강제한 이후, 대학은 더 이상 ‘지성’이 살아남을 수 없는 곳이 되었다.

정부가 재정지원이라는 돈과 갖가지 평가의 권력을 매개로 교수들의 활동은 물론 상상력까지도 이른바 ‘학진 체제’의 지배에 복속시키고, 그것에 편승해 대학 총장들도 교수들에 대한 관료제적 관리와 통제를 강화하면서 교수들은 ‘성과 물신주의자’가 되었다. 양의 변화가 질의 변화로 전화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그들도 모르지 않았지만, 가시적 성과를 요구하는 권력의 압박 앞에서 그들은 성과를 투명하고 엄밀하게, 그리고 무엇보다도 비교 가능하게 보여주는 ‘숫자’의 마력을 숭배하게 되었다. ‘지성’의 폐기라는 도덕적 열패감이 없지 않았으나 곧 익숙해졌다. 이기심을 자극하는 장치들에 호응해서 욕심의 추구를 습관으로 체화한 것이다. 돈이 되는 연구, 결국 돈이 요구하는 연구만이 살아남았다.

물론 숫자의 마력에 도취한 정도에서는 정부와 총장들이 훨씬 윗길이다. 학문 분과마다 고유한 특성을 가진 교수들의 노동과 그 성과를 숫자로 번역하여 규격화하고 표준화하여 등급 매기는 장치는 분산적이고 자율적인 교수들을 ‘계산 중심’이 관리하고 통치하는 데 더 없이 효과적이었다. 이런 관리와 통치가 대학의 자유를 파괴하고 학문의 다양성과 창의성을 말살한다는 사실은 그들의 관심사가 아니다. 시작은 조심스럽고 은밀했지만 거리낌 없고 거대하게 확산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공공의 가치나 사회적 기여를 추구하는 인재를 찾기에는 대학은 너무 기업화되어 있고 교수는 너무 사사화(私事化)되어 있다. 더 절망적인 것은, 그 어떤 변화도 기대할 수 없을 만큼 대학과 교수가 지배체제에 예속되고 기득권의 이익에 복무한다는 사실이다.

라떼는 말이야, ‘조국의 미래를 보려면 대학을 보라’고 노래한 시인이 있기도 했다.


이기홍 논설위원/강원대·사회학

강원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로 교수회장을 맡고 있으며, 한국사회학회 편집위원장을 역임했다. 주 연구 주제는 사회과학철학, 사회과학방법론, 그리고 사회이론이다. 저서로 『사회과학의 철학적 기초: 비판적 실재론의 접근』, 역서로 『맑스의 방법론』, 『경제, 시민사회 그리고 국가』,『과학으로서의 사회이론』, 『새로운 사회과학철학』, 『지구환경과 사회이론』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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