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실의 연속성을 영원히 기억하도록 하는 상징 코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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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실의 연속성을 영원히 기억하도록 하는 상징 코드
  • 이현건 기자
  • 승인 2022.06.28 0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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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장과 왕릉: 조선 국왕의 사후 상징과 만나다 | 장경희 지음 | 현암사 | 384쪽

 

조선 시대 국왕과 왕실 문화를 상징성의 측면에서 탐색해온 왕실문화총서(전 4권)를 완결 짓는 이 책은 조선 시대의 국장 절차와 왕릉 조성 과정에서 보이는 국왕의 사후 상징성에 대해 심도 깊게 탐구한 책이다.

국왕의 사후에 육신을 어떻게 다루는가 하는 문제는 유교 윤리의 실천과 종법 사회의 건설, 왕권의 유지와 영속성의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그러하기에 국장의 절차와 왕릉 조성의 각 단계에는 국왕의 권위를 세우는 상징적 의미가 담겨 있었다. 산처럼 크고 높은 왕릉의 규모는 백성이나 신하의 무덤과 차별화되었고, 국장이나 왕릉 조성 과정에서 쓰이는 여러 물품이나 조형물은 죽은 국왕이 살아 있을 때와 다름없이 국왕으로서의 권위와 위엄을 유지하게 만드는 시각적인 장치로 그 시대의 문화 역량이 응집되어 있었다.

이 책에서는 조선 왕실에서 국왕의 사후 그 육신을 어떻게 다루어 국장을 치르고 왕릉을 조성했는지를 세세하게 재현하듯 보여주면서 거기에 쓰인 물품이나 조형물 등의 시각적 요소가 드러내는 의미를 분석하고 그 과정에서 내내 지키고자 했던 핵심적인 가치는 무엇이었는지를 탐구한다.

조선 시대 국왕의 상장례(喪葬禮)는 유교적 예법에 대한 고증을 거쳐 조선 초기에 정리되었다. 국장 절차와 왕릉에 대한 조성 과정 등은 국가 전례서를 범본으로 삼아 조선 시대 내내 대체로 비슷한 경향을 보인다.

이 책에서는 국장과 왕릉에서의 의례 절차에서 국왕의 몸, 사후 육신에 주목한다. 곧 국왕의 죽음에 걸맞은 흉례 절차에 따라 소용되는 각종 물품들의 종별과 세부 요소 및 그것들이 갖는 의미와 상징성을 밝힌다. 조선 왕실의 흉례와 관련된 기물을 살펴보면 조선 시대 내내 시대적 변화의 진폭이 크지 않아 대단히 보수적이고 전형적인 것을 알 수 있다. 국장과 왕릉 관련 기물의 형식이나 조형이 거의 변화를 보이지 않는 것이야말로 왕실의 연속성을 영원히 기억토록 하는 상징 코드가 작동한 것이다.

 

국왕의 사후에는 예서에 정해진 대로 국왕의 시신을 닦거나 감싸거나 입히거나 담거나 덮거나 장식하였는데, 이러한 물품들은 눈에 보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시각적 대상물이어서, 국가는 그 수준을 일정하게 유지하고 통제함으로써 국왕의 권위와 왕실의 위엄을 시각화하려 했다. 재료의 품질이나 상태를 일정하게 유지하기 위해 최고 품질의 천이나 실, 나무나 못, 칠이나 안료 등까지 규정대로 확인하고 기록하였다. 이러한 재료가 준비되고 도구나 시설이 마련되면 그것을 능숙한 솜씨로 구현할 수 있는 장인이나 화가가 규정된 크기나 형태 및 문양으로 기물을 제작했다.

왕이 승하한 후 3일부터 5일까지 이뤄지는 염습(殮襲) 과정은 시신의 몸을 감싸는 습(襲), 소렴(小斂), 대렴(大斂)의 세 단계로 이뤄진다. 이 염습 절차는 이승에서 분리된 시신이 저승에서 새로운 출발을 하도록 해주는 것을 의미한다. 대렴이 끝나고 승하한 왕의 육신(체백)을 왕릉으로 옮기기까지 5개월간 왕의 관(재궁)을 모시는 곳은, 사대부가에서 ‘빈청’이나 ‘빈소’라고 부르는 것과 차별하여 빈전(殯殿)이라 불렀다. 빈전은 왕이 생전에 거처하던 궁궐 내 편전에 설치했다. 입관하기 전에 국왕의 시신이 부패하지 않도록 재궁에 얼음을 채우기도 했으며, 재궁에는 이틀에 한 번씩 30회, 두 달간 옻칠을 했다. 옻칠을 하면 방충·방부·방습에 탁월해 국왕의 시신은 훼손되지 않고 온전하게 보존될 수 있었다. 재궁을 칠하는 자리는 후대 왕이 동참하여 왕위 계승의 정통성을 확인받는 자리이기도 했다.

궁궐에 머물던 국왕의 체백을 왕릉이 있는 산으로 모시는 것을 인산(因山)이라 부른다. 이때 국왕은 비록 시신이지만 백성들에게 마지막으로 인사를 고하고 먼 길을 떠나게 된다. 국왕의 몸을 실은 가마는 수백 명이 4교대로 메고 그 길을 가야 했다. 그리고 죽은 국왕이지만 그를 한 치의 오차 없이 제대로 호위하기 위해 누가 어디에 어떻게 무엇을 가지고 왜 서 있는지를 미리 그림(발인반차도)으로 확인했다.

풍수에 따라 명당이 정해지면 국왕이 영원히 누울 현궁(玄宮), 즉 지하 궁전을 마련했다. 이승에서 국왕이 누렸던 것과 마찬가지로 죽은 뒤 저승에서도 국왕으로서 권위와 품위를 지킬 수 있도록 지하 궁전을 꾸민다는 관념이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그래서 그곳에 국왕이 평소 읽었던 서책과 더불어 사후 세계에서도 여전히 국왕으로서 제향을 받을 수 있도록 제기를 들여놓았고, 음악을 향유하도록 악기를 만들고 국왕의 권위를 지킬 무기를 만들어 함께 두었다. 이것들은 크기가 작은 명기(明器)로 만들었지만, 이렇게 갖춰놓음으로써 지하 궁전에서 국왕이 국왕으로서의 권위를 영원히 누릴 수 있다고 여겼다.

이 밖에도 장명등을 만들어 구천을 떠돌던 국왕의 혼령이 왕릉에 있는 자신의 체백을 찾아올 때 길을 잃지 않도록 소상 때까지 불을 밝혔고, 이렇게 찾아온 국왕의 영혼이 쉬고 뛰어놀 수 있도록 혼유석(魂遊石)을 배치했다. 또한 멀리서도 지하 궁전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해 석망주(石望柱)를 좌우에 세웠다. 국왕의 혼령과 체백이 머무는 곳에 국왕을 모시는 신하가 없을 수 없다. 왕이 살아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죽어서도 신하들의 호위를 받도록 문무석인(文武石人)을 배치하였다. 또한 석양(石羊)·석호(石虎) 등 석수(石獸)가 왕릉을 둘러싸게 했다. 이러한 여러 물품이나 조형물은 죽은 국왕이 살아생전의 국왕과 다름없이 국왕으로서의 권위와 위엄을 유지하게 만드는 시각적인 장치의 완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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