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유행세’의 역사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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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유행세’의 역사 교육
  • 이규원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인문의학교실·인문의학
  • 승인 2022.05.22 2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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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끝없는 터널 같았던 코로나19 시국도 이제 막바지 분위기다. 방역 완화 조치로 ‘일상’으로 돌아가려는 움직임이 빨라지며 거리가 인파로 붐비고 대학 강의와 학술대회도 속속 대면으로 전환되고 있다. 오랜만에 마스크 벗고 봄바람 맞으니 감회가 새롭지만, 마냥 해방감을 만끽할 수도 없다. 치명적인 변이 바이러스나 대유행의 파고가 당장 내일 들이닥칠지도 모를 일이다.

왕관 모양 미립자에 전 세계가 놀아나는 지금과 달리, 인류의 (근거 없는) 자신감이 하늘을 찌르던 시절이 있었다. 항생제와 DDT의 사용이 본격화된 1940년대부터 감염병 정복에 대한 낙관론이 확산하여 1960년대에는 감염병의 ‘박멸’이 심심찮게 전망되었고, 실제로 1970년대 말에는 수천 년 이상 인류를 괴롭혀온 두창(천연두)이 근절되며 장밋빛 미래가 펼쳐질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러한 환상이 깨어지는 데는 몇 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에볼라바이러스병과 후천성면역결핍증(AIDS)을 비롯한 신종 감염병이 잇따라 창궐하여 보건상의 위기가 초래된 것이다. 1979년 제32차 세계보건총회에서 “2000년까지 모두에게 건강을” 보장하겠다고 선언한 세계보건기구(WHO)는 1997년에 다시 ‘감염병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21세기에 들어서도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SARS), 2009년 신종 인플루엔자, 중동호흡기증후군(MERS),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코로나19) 등 새로운 감염병이 3∼7년 간격으로 출현하여 우리를 위협하고 있다.

앞으로는 어떨까? 최근 Nature에 발표된 한 연구에 따르면, 지구 온난화가 최소한으로 억제된 시나리오(RCP 2.6)에서조차 2070년까지 바이러스의 새로운 종간 전파가 포유류 사이에서 4천 회 이상 이루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작금의 코로나19는 그 한 사례에 불과하며, 이미 지구는 ‘인류세’와 더불어 ‘범유행세’(팬데믹세, Pandemicene)에 진입했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암울하지만 엄연한 현실이다. 당장 전 지구적인 질병 감시와 공중 보건 체계를 강화하는 것이 시급하다.

그런데 이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역사 교육이다. 신종 감염병이 유입되면 병원체의 정체를 밝히고 백신과 치료제를 개발하기까지 상당한 시일이 소요된다. 그때까지, 아니 그 이후에도 방역 대책은 사회·문화적 성격이 짙으며 과거의 사례를 참조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우리는 체감하고 있다. 시민 사회의 합의와 협조가 방역의 성패를 좌우하는 이상, 감염병의 역사를 제대로 파악하고 다음 팬데믹에 대처하는 것은 ‘역사의 교훈’이라는 클리셰를 넘어 생존의 조건이 된다. 전후 세계를 풍미했던 교만한 인식도 역사의 망각에서 기인하는 바가 컸다.

일본에서는 올해 4월부터 ‘역사종합’이라는 고등학교 필수 이수 과목이 신설되었다. 근현대사를 중심으로 세계사와 일본사를 종합적으로 다루는 것이 특징인데, 일본 정부의 퇴행적 역사수정주의가 충실히 반영되어 물의를 빚고 있기도 하다. 물론 이는 백번 비난받아 마땅하지만, 고등학생에게 글로벌화의 맥락에서 감염병의 역사를 가르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2016년 일본학술회의는 “감염병의 확산과 해상·항공 교통”을 본 교과 주제 학습의 한 예로 권고한 바 있고, 문부과학성 학습지도요령에도 감염병 관련 자료의 활용이 명시화되어 있다.

무엇보다 눈여겨볼 만한 점은 ‘역사종합’의 발족에 발맞춰 기민하게 이루어진 일본 학계, 교육계, 출판계의 협력이다. 대표적으로, 의학사 연구자와 고등학교 교사가 교육 자료 개발을 위한 워크숍을 결성하여 보조 교재 『고교에서 배우는 감염병의 역사』와 여러 수업용 프린트를 작성 및 공개했다. 단순히 지식을 주입하는 것이 아니라 근세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자료와 상황을 지역사와 세계사의 균형 잡힌 관점에서 해석하고 사고하도록 구성되어 있어 일선에서의 활용이 기대된다.

한편 일본의 서점가에서는 ‘역사종합’을 매개로 역사학 연구와 역사 교육의 연계와 심화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고등학생의 눈높이에서 감염병의 역사를 파악하고 현재와 미래에 대한 문제의식을 함양하는 참고서뿐만 아니라, 세계사의 서술과 실천이라는 역사학의 문제를 심도 있게 고찰하는 교양서까지 속속 간행되며 ‘역사종합’의 향유 대상이 시민 전체로 확대된 것이다.

우리의 상황은 어떠한가? 감염병의 역사에 관한 체계화된 고교 커리큘럼은커녕 대학 강의조차 찾아보기 힘들고 관련 학회도 진지한 논의 없이 무관심으로 일관하고 있다. ‘코로나 특수’로 역사 소비가 늘었을 뿐, 그마저도 신규 확진자의 감소와 더불어 시들해지는 형편이다. 방역의 정치화에 매몰된 채 시대의 요청에 아랑곳하지 않는 사회가 과연 ‘범유행세’를 무사히 헤쳐 나갈 수 있을지 생각해볼 문제다.


이규원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인문의학교실·인문의학

한국과학기술원(KAIST) 생명과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대학원 의학과에서 인문의학 전공으로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인문의학교실 객원조교수로 의학사와 질병사를 연구하고 가르치고 있다. 주요 논문으로 「1907년 한국의 콜레라 유행과 식민지 방역 체계의 형성」, 주요 저서로 『포스트 코로나 대한민국』(공저), 주요 역서로 『세계사를 바꾼 전염병 13가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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