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의 거친 생각과 언론의 불안한 눈빛, 그걸 지켜보는 지식인이 빚어낸 호들갑 사회의 자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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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의 거친 생각과 언론의 불안한 눈빛, 그걸 지켜보는 지식인이 빚어낸 호들갑 사회의 자화상
  • 임운택 편집기획위원/계명대·사회학
  • 승인 2021.07.15 0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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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운택 칼럼]

1990년 현존 사회주의가 붕괴한 후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자유민주주의의 승리와 함께 인류 역사의 근본적 모순이 사라졌다며 ‘역사의 종말’을 선언한 바 있다. 후쿠야마는 사회주의의 소멸 이후 자본주의를 인류 발전의 유일한 미래로 보았지만, 냉전 시대에 가려졌던 자본주의의 진짜 얼굴은 정작 신자유주의의 이데올로기 속에서 마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체제경쟁이 격심하였던 냉전시대에 복지국가와 산업사회의 조합은 역사학자 홉스봄의 표현대로 일시적이나마 자본주의가 인간적인 얼굴을 지니게 하였다면, 냉전의 종식과 함께 단일화된 세계에서 신자유주의는 자본주의에 내재한 다양한 얼굴을 드러내 보였다. 흥미로운 점은 이 시기 전후로 자본주의의 발전 양상뿐만 아니라 사회에 대한 정의도 다각적으로 정의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흔하게 사용해서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회’라는 개념을 잠시 되돌아보자.

아도르노를 위시한 소위 ‘비판이론가들’은 부르주아 시민이 주인이 된 시대의 진정한 철학적 개념으로 ‘사회’를 사회과학의 중심에 놓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이들은 사회가 더 많은 자유와 개인화에 대한 약속이 내재하는 생산과 사회화의 변증법적 관계를 표현한다고 보았으며, 동시에 문화산업적으로 창조된 망상의 기제가 사람들로 하여금 이미 존재하는 것을 긍정하게 한다고 통렬하게 비판하였다. 이들에게 사회란 사람들 간의 구체적인 사회관계의 네트워크, 즉 자발적이든 비자발적이든 이들에 의해 만들어진 사회정치적 현실을 의미한다. 칼 포퍼는 1961년 독일 사회학대회에서 자신의 ‘열린사회’ 개념을 앞세워 비판이론가들의 사회개념을 논박하였다. 자기충족적이고 심지어 명칭과는 달리 폐쇄적인 논리마저 담고 있지만, 전체주의와 사회주의로 대변되는 ‘열린사회의 적’에 대한 공세는 다른 사회의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이후 자본주의 사회의 얼굴은 이데올로기적 차원에서 ‘다원주의 사회’, 자본축적 메커니즘의 변화로 인한 ‘정보사회’, ‘소비사회’ 등으로 묘사되었다. 

신자유주의를 태동시킨 자본주의의 관리위기, 즉 경제·노동·생태위기가 심화되고, 사회불평등이 확산되면서 ‘근대에 대한 성찰’은 사회에 대한 다양한 진단의 가능성을 열어놓았다. 울리히 백의 ‘위험사회’ 개념은 대표적인 하이픈(hyphen) 사회( -사회) 네이밍의 시발점이 되었다. 국내에서 위험사회는 환경위기와 재난발생 시 주로 소환되고 있지만, 이 책은 “산업사회의 근대와 함께 다른 근대성으로”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기본적으로 울리히 백은 근대와 성찰적 근대, 혹은 (산업)노동사회의 위기, 개인화의 심화와 사회연대의 단절에 더 많은 분석적 초점을 기울이고 있으며, 이와 유사한 현상은 이후 다양한 사회과학자들에 의해 분석되고, 각자의 강조점에 따라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는 또 다른 하이픈 사회로 명명되었다. ‘규율사회’(Foucault), ‘체험사회’(Schulze), ‘시민사회’(Barber), ‘세계사회’(Buzan), ‘미디어사회’(Postman), ‘정보사회’(Lash), ‘엔터테인먼트 사회’(Sayre & King), ‘후기 세속사회’(Habermas) 등 다 셀 수 없을 만큼 다양하게 사회에 대한 정의가 내려졌는데, 기본적으로 사회에 대한 이러한 정의는 새로운 근대로의 전환과정에서 능력주의를 앞세워 성과사회를 인정하는 위험 감수자들에 의한 노동사회의 급진적 단절에 대한 성찰을 반영하고 있다. 요즘 한국에서 유행하는 공정과 성과주의 담론은 이미 이 시기에 사회과학 연구의 주요 분석대상이었다. 과도하게 남발된 하이픈 사회에 대한 호칭은 시간이 흘러가면서 과로사회, 피로사회 등으로 사회의 특정 현상만 강조하거나 ‘흥미 사회’(fun society), ‘패스트푸드 사회’ 등 언론에 의한 다분히 장난스러운 정의가 이어짐에 따라 최근에는 이러한 개념의 효용성에 대해 의문이 제기되었고, 하이픈 사회에 대한 네이밍화도 이전보다 다소 잠잠해지고 있다.

다소 장황하게 사회에 대한 정의를 설명한 이유는 청년문제를 중심으로 확산되는 최근의 공정담론과 능력주의에 정치와 언론의 과도한 단순화와 이슈화, 지식인들의 장단이 도를 넘고 있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했듯 능력주의와 공정에 관한 관심은 이미 1980년대 후반부터 학술적으로 제기된 문제이고, 그러한 논의는 정치와 정책에 다양하게 반영된 바 있다. 시끌벅적했던 ‘제3의 길’ 논쟁에서도 그 논의는 빠지지 않았으며,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과 처방에서도 이 문제가 존재하지 않았던 적은 없었다. 만약 이문제가 진정 새롭게 느껴지는 연구자가 있다면 대단히 심각한 직무유기를 한 셈이다. 문제가 있다면 우리 사회의 지식인이 신자유주의에 대한 대안을 제대로 마련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최근 청년 문제에서 확장된 공정담론, 능력주의 논쟁은 마치 백지 상태(tabla rasa)에서 새롭게 제기된 의제처럼 다루어지고 있어 당혹스럽기까지 하다. 표 계산을 생각하는 정치권의 거친 생각과 상업화할 수 있는 의제화에 민감한 언론의 불안한 눈빛, 마치 그걸 새로운 현상처럼 지켜보는 일부 지식인의 우스꽝스러운 조합이 만들어낸 호들갑이라고 하면 지나친 표현일까? 

직접적으로는 전직 법무부 장관을 둘러싼 소동(이 또한 사회적 해결이 아닌 사법적 판단의 문제로 넘겨졌다!)에서 촉발되었지만 이후 정치권과 언론이 제기하는 청년의제와 공정담론은 어느 유행가 가사처럼 ‘싸구려 커피를 마시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청년담론은 무조건적으로 소모되지만, 아무도 결과를 생산해낼 수 없는 무한 질문만 해대고 있기 때문이다. 잊을 만하면 공표되는 언론사의 각종 청년 관련 설문조사도 쓴웃음을 자아내기는 마찬가지다. 우리 사회에서 청년은 연령도 고무줄이려니와(34세가 청년이라는 미성숙 사회의 웃픈 현실!) 장소, 공간, 계급, 젠더, 인종, 학력에 이르기까지 나이를 제외하면 공통점을 찾기가 더 어려운 집단을 놓고 ‘장님 코끼리 만지기’식 해법을 찾고 있다. 물론 청년의 사회적 범주가 우리 사회만 유별난 것은 아니다. 그래서 사회학자 부르디외는 “청년은 단지 단어에 불과하다”(La jeunesse n’est qu’un mot)고 하였고, 문화사회학자 스튜어트 홀과 그의 동료들은 “청년은 상상하기 어려운 개념이다. 사회학적 범주로서 청년은 경험적으로 의미가 없다”고까지 주장하였다. 

사실 21세기에 청년을 정치적 의제로 소환한 최초의 집단은 신자유주의자들이다. 2007/8년 세계경제 위기 이후 불안해진 경제상황과 신자유주의에 대한 도전, 특히 ‘아랍의 봄’과 ‘월가 점령’ 시위를 거치면서 ‘세계은행’이나 ‘세계경제포럼’, UN 산하의 각종 국제기구에서는 갑자기 각종 국제회의에 청년들을 소환해내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주요 국가에서 젊은 층의 의원과 각료들이 배출되기도 하였다. 당시에도 대학입시와 취업전쟁에 모든 것을 건 한국 사회에서 이제야 공정담론으로 포장된 청년문제에 관심을 가지는 건 일종의 이력현상인가?

청년문제의 해법이 일반 노동시장에서 해결되어야 하는 것과 내용적으로 대략 동일하다면(비정규직의 정규직화든, 동일노동-동일임금이든, 고용과 소득에 관련된 모든 의제) 청년이라는 특수한 사회적 범주화는 불필요하며, 심지어 이는 사회적 이슈의 과잉 정치화이다. 청년이 아닌 사람들은 당최 공정담론에 관심 없다는 전제가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세대 간 갈등의 문제는 다른 나라에도 있고, 그것을 해결하는 것이 정치이자 정책이지 한국만 유별할 이유가 없다. ‘청년비서관’이 누가 되어서 문제가 아니라 청년비서관이란 직책은 도대체 어떤 청년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존재한다는 말인가? ‘대통령직속 청년위원회’는 무슨 해괴한 위원회인가? 이런 직책과 위원회가 있다고 청년들이 카타르시스를 느낄 리가 만무하다. 물론 선출과 동시에 대변인의 토론 배틀을 주도한 젊은 야당 대표도 안습이긴 마찬가지이다. 생물학적 연령의 경쟁력을 말싸움 정도로 이해하는 수준이니 말이다. 청년-공정담론의 이러한 유행에도 불구하고 언론에서 전달되는 청년의 목소리는 얼마나 청년 일반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있는가? 산재 사고로 비명에 횡사하는 청년들의 목소리는 참사가 난 후에야 겨우 들을 수 있으며, 한때 우리나라 노동운동의 산실 역할을 했던 기능학교 청년들의 목소리는 애당초 이러한 담론의 지형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그런데도 일부 연구자들은 청년의 자산 불평등 문제를 해결하자고 한다. 부동산과 부족한 자산이 진정 청년 분노의 원인인가? 고용과 소득에 대한 사회의 불안한 전망이 아니고? 뉴욕과 웨스트엔드의 청년은 셰어하우스에 쪽잠을 자면서 미래의 꿈을 꾸지만, 청년주택에 살아도 꿈을 꾸는 법을 잊고 사는 청년들이 더 문제가 아닐까? 부동산 소유의 과도한 집중을 문제 삼지 않고, 소유를 보편화하겠다는 건 전형적인 중산층의 내로남불 정책이 아닌가? 

정치와 언론이 사회문제를 편리한 대로 쟁점화하는 걸 막을 도리는 없다. 그렇다고 지식인들이 이 판에 숟가락을 얻는 건 꼴불견이다. 국회에 가서 눈물을 흘려서 국회의원들에게 감동을 주고, 언론과 방송에서 세상 청년 고민을 다 하든 그건 자유지만, 감성팔이 정치행위와 연구는 다른 것이다. 신자유주의가 촛불시위 한방으로 훅 가지 않듯, 청년문제에 대한 공감 쇼가 청년문제를 해결해주지 않는다. 

공정과 능력주의의 문제는 신자유주의의 탄생과 함께 오래전에 우리 안으로 다가왔는데 왜들 호들갑인가? 정말이지 ‘호들갑 사회’의 전형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문제를 풀려면 감성팔이와 여론조사 평론 대신 이 문제를 풀 정책을 연구하면 되는 일이다. 

내친김에 한 마디 더! 4차 산업혁명으로 일자리가 소멸한다고 주장을 하는 분들이 있다. 아니 어쩌면 노동 전문가가 아니라도 많은 사람이 딱 그 정도의 상식을 공유하고 있다. AI와 자동화 기계가 일자리를 잡아먹는다는 것이다. 물론 앞으로 그럴 가능성과 개연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나 지금은 결코 아니다. 우리 사회뿐만 아니라 전 세계 일자리 소멸의 대부분은 신자유주의적 노동 유연화에서 비롯된 것이다. 4차 산업혁명과 일자리 소멸의 연관성은 그러한 점에서 ‘청년을 위한 좋은 일자리’ 창출을 포기하는 일종의 알리바이를 제공하는 셈이다. 그래서 선무당이 사람을 잡는다는 말이 틀리지 않는다. 어느 영화 속 대화로 끝내고자 한다. 청년문제로 “마이 묵었다 아이가... 고마해라~”


임운택 편집기획위원/계명대·사회학

독일 마부르크 대학교 사회학 박사. 현재 계명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로 비판사회학회에서 발간하는 <경제와 사회> 편집위원장, 한국이론사회학회 부회장, 경제인문사회연구회 기획평가위원을 맡고 있다. 주 연구 분야는 정치경제학, 노사관계, 정치사회학, 현대 사회이론이다. 주요 저서로 <전환시대의 논리: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이중위기>, <경제의 디지털화와 노동의 미래>, 공저로 <현대사회와 베버 패러다임>, <문화, 환경, 탈물질주의 사회정책>, <청년실업과 노동시장, 그리고 국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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