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를 찾습니다 … 좋은 학술지를 위한 제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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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를 찾습니다 … 좋은 학술지를 위한 제언
  • 윤 비 성균관대학교·정치사상
  • 승인 2021.06.06 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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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쿠스]

한국의 학술연구 지형에서 학술지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차지한다. ‘얼마나 유명한 학술지에 글을 실었는가’가 임용 및 승진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크다. 단행본 저술을 평가에 크게 반영하지 않는 분위기가 여기에 한몫한다. 학술지에 글을 실으면 금전으로 보상을 하는 대학도 많다. 학술지에 글을 실을 때마다 인센티브를 지급하는 프로젝트들도 적지 않(았)다. 이런저런 이유로 많은 연구자들이 학술지에 글을 싣기 위해 땀을 쏟게 된다. 

경쟁이 치열해질수록 공정성과 합리성이 가장 중요한 관심사가 된다. 누구의 글이 실리고 누구의 글은 탈락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데 글의 수준 외에 다른 고려가 개입하는 것을 배제하는 것이 핵심적인 문제가 된다. 적어도 형식만 본다면 한국의 인문사회 분야 학술지 대부분이 채택하고 있는 심사제도는 부당한 개입을 차단할 수 있는 완벽한 체계에 가깝다. 모든 심사자는 심사평 이외에 ‘게재 가’, ‘게재 불가’, ‘수정 후 게재’, ‘수정 후 재심’ (학술지에 따라서는 이외에 다른 옵션이 더 있을지도 모르겠다) 중 하나를 선택하여 편집자에게 통보하게 되어있다. 대부분의 학술지의 편집 규정에는 이들 네 가지 결정의 조합에 따라 편집자가 내릴 결정이 표로 깔끔히 정리되어 공개된다. 모두 ‘게재 가’의 평가를 받았다면 당연히 게재되는 것이고, 모두 ‘게재 불가’의 결정을 내렸다면 당연히 기회는 없을 것이다. 학술지마다 차이가 있다면 아마 그 중간의 경우들일 텐데, 예를 들어 어떤 학술지에서는 두 개의 ‘게재 가’와 한 개의 ‘게재 불가’는 ‘게재 가’에 해당되지만 어떤 학술지는 같은 경우를 ‘수정 후 게재’나 ‘수정 후 재심’으로 분류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차이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한 학술지에서 같은 조합은 같은 결과를 낳는다. 

이런 학술지의 심사과정은 공장의 자동화 공정을 떠올리게 한다. 요즘은 JAMS를 사용하기 때문에 자동화에 더 가까워졌다. 모든 것이 정해진 순서도에 따라 자동적으로 진행된다. 

여기서 우리는 편집자의 자리가 사실상 사라져가고 있음을 보게 된다. 편집자가 개입할 여지는 최초 심사자를 선정할 때를 제외하면 전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머지는 굳이 연구자가 아니라도 숫자만 셀 수 있다면 무난하게 해치울 수 있는 일들이다. 심사가 늦어질 때 보내는 독촉 메일조차 이름만 바꿔 넣으면 되도록 양식과 문구가 준비되어 있다. 앞으로는 최초 심사자를 선정하는 일조차 빅데이터와 AI에 넘겨주게 될 것으로 보인다. 

편집자의 소멸은 과연 환영할 일일까? 모든 결정을 다수결의 원칙에 전적으로 맡기는 이런 학술의 '민주주의'는 과연 최대한의 공정과 합리성을 보장해 줄까? 민주주의 정치제도를 연구하다 보면 반드시 부딪히는 문제는 익명성을 전제로 이루어지는 투표에서 다수가 고른 것이 반드시 가장 좋은 결정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최근 여러 나라에서 투표와 선거를 통해 포퓰리즘이 득세하면서 그 점이 더 분명해졌다. 학술논문의 경우 민주주의의 불완전성이 더 두드러진다. 정치에서 선거는 아주 큰 수의 사람들이 참여하기 때문에 한두 사람의 악의나 일탈이 큰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인문사회과학 분야 학술논문의 경우 심사자의 수는 가장 많아도 다섯을 넘지 못한다. 논문을 게재하기도 하고 심사자로 활동하기도 하면서 느끼는 것이지만 현재의 평가제도는 심사자의 '악의'와 '전횡'에 매우 취약하다. 블라인드 리뷰라고 하지만 적지 않은 경우 심사자는 참고문헌을 살펴보거나 웹에서 간단한 서치를 하는 것으로도 누가 쓴 논문인지 짐작할 수 있다. 일단 연구자의 수가 그렇게 많지 않은 데다 많은 글들이 제출 전에 이런저런 기회로 한두 번 발표된 것이기 때문이다. 심사자가 편파적인 심사를 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어떤 심사자들은 자신의 견해와 다른 주장을 평가하는 데 매우 인색하다. 또 어떤 심사자들은 제대로 원고를 검토하지 않고 불성실하게 리뷰를 작성한다. 그러나 현재의 심사제도는 이러한 심사자의 이런 '횡포'를 전혀 통제할 수 없다. 어마어마한 부정의를 감당해야 하는 부담과 그에 따르는 스트레스는 피심사자의 몫이다. 지금보다 편집자에게 더 많은 권한이 부여된다면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지는 못하더라도 상황이 나아질 수 있지 않을까? 편집자가 불성실한 리뷰는 기각하거나 재작성을 요구하고 다수의 의견이라도 문제가 있다고 판단된다면 수정하거나 추가 리뷰를 맡기는 것만으로도 심사자의 편협함이 설칠 여지는 훨씬 줄어들 것이다. 사실 이것은 새로운 아이디어가 아니라 실제 해외의 유서 깊은 혹은 평판 높은 학술지들이 오래전부터 해오고 있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 대해 그런 '막강한' 권한을 갖게 된 편집자의 악의와 전횡은 어떻게 통제할 것인가는 의문이 제기될 것이다. 다소 나이브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필자는 편집자의 악의와 전횡을 통제하는 것이 생각보다는 어렵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편집자가 누군지는 공개된다. 편집자가 내리는 결정을 바라보는 눈들은 여럿이다. 중요한 결정은 편집인 단독이 아니라 편집위원회의 집단결정에 맡길 수도 있다. 사실 필자로서는 편집자들 스스로가 이러한 권한 확대를 환영할지가 더 큰 의문이다. 더 많은 권한은 더 많은 책임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골치 아픈 법적 시비에 휘말릴 가능성도 있다. 굳이 편집자라는 골치 아픈 자리를 맡아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할 필요가 있을까? 뾰족한 답은 없다. 해외의 사례나 국내의 사례들을 면밀히 들여다보고 비교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하다. 제기될 어려움 때문에 현재의 문제점을 그대로 용인할 수는 없다. 무엇인가 지금부터 구상해보아야 한다.  
 
사실 어떠한 심사도 완벽하지는 않다. 필자가 단장으로 재직하고 있는 한국연구재단에서도 심사를 조금이라도 더 공정하고 더 만족스럽도록 만들기 위해 많은 직원들이 애를 쓰고 있다. 그러나 부족함도 불만도 미안함도 크게 줄어들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해결책일 수는 없다. 그런 생각에서 짧은 생각이나마 적어보았다.   


윤 비 성균관대학교·정치사상/한국연구재단 인문사회연구본부 사회과학단장

서울대학교 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독일 훔볼트대학교에서 13세기로부터 마키아벨리에 이르는 정치사상의 변동에 대한 연구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도상학과 문학을 포괄하는 정치사상연구에 관심이 있다. 현재 성균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한국연구재단 인문사회연구본부 사회과학단장을 맡고 있다. 최근 독일 뵐라우(Böhlau) 출판사에서 저서 ‘Wege zu Machiavelli: Die Rückkehr des Politischen im Spätmittelalter(마키아벨리로 향하는 길: 중세 후기 정치성 개념의 재귀)’를 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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