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武王의 비는 善花公主? 그러면 사탁(沙乇)왕후는 누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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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武王의 비는 善花公主? 그러면 사탁(沙乇)왕후는 누구일까?
  • 연호탁 가톨릭관동대·영어학
  • 승인 2020.01.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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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호탁의 ‘말로 푸는 역사 기행’ (4)_ 백제 武王의 비는 善花公主일까? ①
 

▲ 익산 미륵사지 석탑 금제 사리 봉안기. 가로 15.5㎝, 세로 10.5㎝ 크기의 금판(金板)을 음각(陰刻)하고 주칠(朱漆)로 글자를 썼다. 사진출처: https://www.yna.co.kr/view/AKR20090119065100005
▲ 익산 미륵사지 석탑 금제 사리 봉안기. 가로 15.5㎝, 세로 10.5㎝ 크기의 금판(金板)을 음각(陰刻)하고 주칠(朱漆)로 글자를 썼다. 사진출처: https://www.yna.co.kr/view/AKR20090119065100005

칭기즈칸(Genghis Khan, 1162~1227)은 자신의 부인 중 하나였던 이바카 베키를 충성스러운 우루구트 씨족장 주르체데이의 공적을 치하해 상으로 내린다. 그녀는 케레이트 부족의 자카 감부(옹칸의 아우)의 큰딸이었다. 兒名이 테무진인 칭기즈칸은 본래 토그룰(옹 칸)의 딸이나 손녀 중 하나와 자신의 맏아들 주치를 혼인시키자고 제안했다가 거절당한다. 카한이 되기 전 보르지긴 가의 테무진을 경계했던 토그룰은 후일 나이만족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형과는 달리 테무진을 지지했던 토그룰의 아우 자카 감부는 딸 둘을 테무진에게, 또 한 명의 딸은 주치에게 준다. 테무진은 큰딸 이바카를 취하고 이바카의 여동생 소르칵타니 베키(1190~1252)는 테무진의 넷째 아들 톨루이의 아내가 된다. 그리고 둘 사이에 낳은 아들 뭉케, 훌레구, 아릭 부케, 쿠빌라이 네 명 모두가 제국의 유산을 물려받는다. 이런 단순한 듯 혼란스러운 혼인 풍속도의 백미는 아마도 부하 장수에게 아내를 선뜻 선물하는 유목사회 리더의 신속하고도 통 큰 결단일 것이다. 칭기즈칸의 해명은 이렇다.

너를 성품이 나쁘고
자태가 초라하다고도 안 했다.
내 가슴에, 다리에 들어왔던
반열에 들어앉은 너를
주르체데이에게 내리는 것은
살육전의 날 방패가 된,
적으로부터 차폐물이 되어 준,
흩어진 나라를 합치게 한,
조각난 나라를 통일케 한
그의 공적을 생각하기 때문에 너를 주는 것이다
.
(
유원수 역주, 『몽골비사』, 206쪽)

그리고 다시 칭기즈칸은 아내였던 이바카에게 말한다.

네 아버지 자카 감부가 네게 200명의 지참 노비와 집사장 아식 테무르, 집사장 알칙을 준 바 있다. 이제 네가 우루구트 백성들에게 갈 때 네가 가져온 지참 노비에서 집사장 아식 테무르와 100명을 두고 가라.

그리고 그들을 칭기즈칸이 가졌다.

참 치사하기 이를 데 없다. 마음에 들지 않는 부인을 다른 남자에게 떠넘기면서, 미워서도 못나서도 아니라는 누가 봐도 속이 뻔히 보이는 변명도 모자라, 딸려왔던 노비들 절반은 두고 가라니... ‘바다’라는 뜻의 칭호 ‘칭기즈’(Genghis; Chinggis)와 함께 칸으로 추대된 세계 제국 지도자의 언행이라고는 믿기지 않는다. 참고로 이븐 바투타는 자신의 여행기에서 칭기즈를 팅기즈(Tingiz)로 기술했다.

▲ 팍스 몽골리카의 시대를 연 영웅 칭기즈칸(Genghis Khan, 1162~1227)
▲ 팍스 몽골리카의 시대를 연 영웅 칭기즈칸(Genghis Khan, 1162~1227)

아내가 하나였다면 남에게 선물로 주었을 리 없다. 여럿 중에 제일 마음에 안 드는 아내를 핑계김에 주었을 것이다. 필요하면 언제든, 얼마든지 새로운 여자를 들일 수도 있으니 성가신 여자를 그렇게 버렸기 십상이다. 

이바카 베키는 케레이트 집단의 공주였다. 그녀와 여동생의 이름 뒤에 붙은 베키(Beki 또는 Begi)라는 경칭어(honorific)는 ‘고귀한’, ‘영광스러운’ 정도의 의미를 지니는 말로 귀족의 부인이나 여식의 이름에 붙이는 칭호다. 칭호나 신분과는 별도로 유목사회에서 남자들 간의 충성이나 우정이 아무리 소중한 덕목이라 해도 자신의 아내를 비인간적으로 취급하는 지도자는 “감화력이 하해와 같이 드넓은 위대한 칸(칭기즈칸)”이 될 자격이 없다.

▲ 톨루이와 케레이트 부족 출신의 부인 소르칵타니
▲ 톨루이와 케레이트 부족 출신의 부인 소르칵타니
▲ 칭기즈칸과 아들들
▲ 칭기즈칸과 아들들

이와는 다른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우리 조상 중에도 유목민이 있었다. 이번 글은 우리의 혈통에 흐르는 유목민의 DNA에 대한 것이다. 유목민은 일정한 거처가 있지 않다. 가축과 더불어 水草를 따라 이동생활을 한다.   

인간의 역사를 보는 관점 내지 각도는 다양하다. 전쟁의 관점에서 보면 전쟁사, 사회 경제적 측면에서 보면 사회경제사, 상업 활동 달리 말해 교역의 관점에서 살펴보면 교역사, 또 이런 모든 일들로 인해 야기되는 인간의 이동 혹은 이주에 초점을 맞추면 이주사가 된다. 나는 인간의 이주가 기후변화와 같은 난관에 봉착한 인간의 생존을 위한 부득이한 선택이든, 이방인과의 갈등과 불화로 인한 전쟁의 결과로 파생된 비극적 선택이든, 새로운 것이나 장소를 찾아 떠나는 일이 즐겁고 자발적인 의지의 반영이 아니라는 점에서 단순한 이동이 아닌 유랑이라 생각한다.

어쩐지 고단함이 잔뜩 배어있는 듯한 그러나 또 어쩐지 묘한 매력, 절절한 애수가 가슴 깊이 느껴지는 떠돌이의 삶. 그것을 나는 유랑(流浪)이라 부르고 유랑의 삶을 살 수 밖에 없는 인간의 운명을 슬퍼한다. 십자군 전쟁, 포에니 전쟁, 마라톤 전투, 악티움 해전, 육이오 내전 등 인간이 겪은 온갖 전쟁은 뭉쳐 살던 사람들의 이산을 낳았다.

김부식의 『三國史記』를 보면 백제와 신라는 끝없이 싸웠다. 그런 중에도 남녀 간 사랑의 꽃이 피었다. 일연선사가 지은 『三國遺事』의 <서동요(薯童謠)>가 그런 내용을 담고 있다. 신라 眞平王의 딸 善花公主와 왕이 되기 전 백제 武王 간의 야릇한 애정행각. 그것은 현실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었다. 설마 백제 땅에 아름다운 여인이 없었을까? 얼마나 미모가 빼어나다 소문이 났길래 사모의 마음을 가누지 못하고 적국의 수도에 까지 들어와 아이들에게 마[薯]를 나누어주며 문란한 노래를 가르쳐 부르도록 했을까? 이해하기 힘든 건 정체불명의 마장수에게 반해 “밤마다 몰래 서동의 방을 찾아 간다”는 대목. 이런 불량한 노래가 대궐 안에까지 퍼지자 분노한 왕은 공주를 귀양 보내고, 기다렸다는 듯 서동이 공주와 함께 백제로 돌아가 왕비를 삼는다는 낭만적이나 믿기 어려운 이야기를 나는 고등학교 국어시간에 鄕歌의 하나로 배웠다. 

『三國遺事』에 따르면 百濟 武王의 비는 善花公主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2009년 1월 충남 부여 미륵사지(彌勒寺址) 石塔에서 발견된 《금제사리봉안기(金製舍利奉安記)》의 기사가 우리의 역사적 상식을 혼란에 빠트리고 말았다. 사리봉안기는 백제 무왕 부여장(扶餘璋)의 왕비는 좌평(佐平) 사탁적덕(沙乇積德)의 딸인 사탁(沙乇)왕후이며 그녀가 639년(무왕40년) 미륵사를 창건하도록 했다고 전한다. 이렇게 되면 선화공주를 무왕의 妃로 기록한  『三國遺事』 기사의 진실성 여부가 문제가 된다. 沙乇왕후는 누구일까? 
 

연호탁 가톨릭관동대·영어학

한국외대에서 영어학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명지대에서 중앙아시아사 전공으로 두 번째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가톨릭관동대 관광경영학과 교수로 그동안 『중앙일보』에 ‘차의 고향’, 『동아일보』, 『중앙일보』, 『문화일보』 등에 칼럼 ‘문명의 뒤안, 오지 사람들’, 『교수신문』에 ‘욕망의 음식: 음식문화사’를 연재했다. 저서로는 『문명의 뒤안 오지의 사람들』, 『차의 고향을 찾아서』, 『궁즉통 영어회화』, 『중앙아시아 인문학 기행: 몽골 초원에서 흑해까지』, 『문화를 여행하다: Travel, Culture&People』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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