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 강진 필랑·필애 자매의 동반자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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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 강진 필랑·필애 자매의 동반자살
  • 심재우 한국학중앙연구원·조선시대사
  • 승인 2024.03.16 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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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재우 교수의 〈법률과 사건으로 보는 조선시대〉

 

계모와 전처 소생 자녀와의 갈등이 낳은 비극

다산 정약용이 강진 유배 중에 수많은 저술을 남긴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 중에는 과거에 여러 군현에서 있었던 인명사건 옥안(獄案)을 살펴보고 사건의 진실을 새롭게 조명하는 글도 있었다. 『흠흠신서』에 수록된 전라도 강진현에서 일어난 자매의 동반자살 사건이 그중 하나이다.

사건은 1768년(영조 44) 3월에 일어났다. 고을에 사는 백문일이란 자가 재혼을 하여 나여인을 후처로 들여서 살고 있었다. 그러던 중 하루는 백문일의 전처 소생 여섯 자녀 중 백필랑, 백필애 두 자매가 연못에 투신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감행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둘은 광주리를 들고 물가에 약초를 캐러 나갔다가 치마끈을 서로 묶어 물에 몸을 던진 것으로 알려졌다.

『흠흠신서』에 실린 필랑, 필애 옥사. 좌측면에 보이는 ‘강진현 백씨 집안 여자 필랑·필애 복검장의 제사(擬康津縣白家女子必嫏必愛覆檢狀題詞)’ 부분에 나온다. 장서각 소장

인명은 소중한 법. 하나도 아닌 자매 둘이 한꺼번에 연못에 투신하여 생을 마감한 이 사건은 고을을 큰 충격에 빠뜨렸다. 뒤늦게 물에서 건진 자매의 시신을 검시하고 관련자의 공초를 받는 등 사건 조사는 강진 수령과 인근 고을 수령이 맡았다. 이들은 두 자매가 계모 나여인과의 불화 때문에 극단적 선택을 한 것으로 결론을 냈다. 관리들은 이구동성으로 두 자매를 구박해서 죽게 만든 나여인이 합당한 처벌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결국 나여인은 관리들의 합동 신문이 진행된 읍내 객사 근처 청조루(聽潮樓) 건물 앞에서 굵고 세모난 형장인 삼릉장(三稜杖)에 맞아 죽었다. 조정에 보고하여 최종 판결을 구하는 대신에 관찰사의 지시로 수령들이 매서운 매질로 그녀를 처단한 것이다.

전처 소생 자매를 핍박하여 자살을 유도한 악독한 계모가 매를 맞아 죽자 구경꾼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어 모두 통쾌하다고 하였다. 사건은 이렇게 마무리되었다. 

1872년 전라도 강진현의 읍성 일대. 중간에 객사가 보이나, 나여인을 신문했던 건물 청조루는 표시되어 있지 않다. 규장각 소장

계모의 억울한 죽음이 밝혀지다

그런데 사건의 진실은 한참 뒤에야 재조명된다. 순조대 강진에 내려온 다산 정약용은 해당 옥안을 검토한 후 계모는 특별한 잘못이 없었고, 오히려 자매가 독살스러웠다고 보았다. 필랑, 필애 두 자매가 자식으로서 모진 행위를 함으로써 계모가 큰 허물도 없이 자매를 핍박해 죽였다는 죄명을 받았다는 이야기이다. 그렇다면 당시 계모는 억울하게 매를 맞아 죽은 셈이다. 

다산이 이렇게 본 근거는, 자매가 극단적 선택을 할 수밖에 없게 나여인이 자매를 괴롭힌 증거를 옥안 어디에서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대신 두 자매를 죽게 만든 원인은 계모 나여인의 구박이 아니라 오히려 자매의 모진 성격과 두 오라비의 부추김 탓이었다. 전처 자식으로서의 피해의식, 마음으로 계모를 신뢰하지 않는 속에서 사소한 일에도 계모를 원망하는 것이 지나치면서 세월이 갈수록 한스런 마음이 맺혀 못에 몸을 던지는 변고로써 계모에 대한 사무친 원한을 드러내 보였다는 것이다. 

장화홍련전. 전처 소생 자녀 장화·홍련 자매와 계모 허씨 사이에서 벌어지는 갈등을 그린 고전소설. 장화와 홍련이 둘 다 죽는다는 설정이 본 강진에서의 실제 사건과 유사하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다산이 계모가 억울하게 죽었다고 단정하는 데는 나여인의 친정 동네 사람 조동혁이란 자가 방문하여 다산과 나눈 진술도 중요한 근거가 되었다. 그에 따르면 나여인은 솜 값 80전을 둘러싸고 자매와 사소한 다툼이 있긴 하지만, 성품이 본래 양순했고 자매를 실제 구박한 사실도 없었다. 더욱이 백가 자녀들은 성품이 음험하고 모두 시기심이 많았는데, 죽은 백필랑과 백필애가 더욱 심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여인의 죽음을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안타까워한다고 말했다.

한편 사건 이후 필랑, 필애의 오라비 백득손의 행적도 예사롭지 않았다. 조동혁과 같은 동네에 사는 김안택이 몇 년 전에 동냥을 하는 초라한 행색의 백득손을 본 적이 있는데, 그도 필랑, 필애 투신 직후 계모가 억울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사실대로 말하여 그녀를 적극 구명하지 못했다는 말을 했다는 것이다. 

이상의 사실을 종합하면 나여인이 자매를 구박하여 죽게 했다는 죄를 억울하게 뒤집어썼다고 본 다산의 진단이 정확했음을 알 수 있다. 


나여인 재판의 문제점

돌이켜보면 나여인 재판은 몇 가지 아쉬움을 노출시켰다. 그중 하나는 조사를 맡은 수령, 사건을 지휘한 관찰사 모두 재혼가족에 대한 선입견, 혹은 편견에 입각해 뚜렷한 증거도 없이 계모를 두 자녀 자살의 원인제공자로 단정한 사실이다. 관리들은 오랫동안 사회문화적으로 배여있는 부정적인 계모 이미지에 경도되어 너무 쉽게 나여인을 자매의 자살을 유도한 죄인으로 만들었다. 

김윤보의 그림 ‘피점난장타살(被苫亂杖打殺)’. 원래 규정상 살옥(殺獄) 신문 때에는 신장이라는 매로 종아리를 30대까지 때릴 수 있었으나, 관행상 이 그림처럼 중죄인을 거적에 덮어씌우고 매서운 형장으로 난장을 가하여 때려죽이기도 했다. 나여인 또한 이런 방식으로 장살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형정도첩> 수록.

다음으로 죄인을 조사·신문 중에 매질하여 죽이는 당대의 재판 관행도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전에도 살펴본 것처럼 이러한 방식의 처형은 조선뿐 아니라 중국 청나라에서도 종종 행해지던 관례였다. 예컨대 청나라에서는 사형에 해당하는 중죄인 사건은 고을에서 재판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증인들까지 성(省)으로 보내어 긴 시간 재판을 해야 했기 때문에 많은 백성들이 고통을 겪게 된다. 그래서 죄상이 명백한 경우에는 고을에서 중간에 사형을 집행하는 것이 묵인되었다. 이는 조선왕조에서도 마찬가지여서 재판의 단축을 위해 관찰사의 지시로 고을 수령이 죄인을 장살(杖殺)시키는 편법이 종종 동원되었다. 이 사건에서는 이와 같은 즉결 처단의 관행이 나여인을 신속하게 죽음으로 내몰았다고 볼 수 있다. 예나 지금이나 억울한 사람이 없는 공정한 판결은 결코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닌 것 같다.

 

심재우 한국학중앙연구원·조선시대사

서울대학교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조선시대사 연구로 석사, 박사학위를 받았다.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를 거쳐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인문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조선시대 법률문화와 사회문화사에 관심을 갖고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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