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져 버린 나의 ‘음악’을 찾아서 “그래서 오늘도 ‘즐거운 비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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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져 버린 나의 ‘음악’을 찾아서 “그래서 오늘도 ‘즐거운 비극’이다.”
  • 허현숙 충남대·철학
  • 승인 2024.02.10 1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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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아르투어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 1788년 2월 22일 ~ 1860년 9월 21일)와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년 10월 15일 ~ 1900년 8월 25일)

지난해 첫 작품 『니체의 즐거운 비극』을 쓰고, 한동안 글을 쓸 수가 없었다. 원고의뢰를 받았을 때 지금이 동굴 밖으로 나올 수 있는 기회라 여겨 흔쾌히 수락했다. 그러나 문제는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철학이 말하는 나와 너 그리고 우리, 소통과 불통, 불행과 행복, 삶과 죽음과 같은 일상적 주제들을 떠올리다 문득 아름다운 민주주의가 사라져 버린 현실을 보게 되었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그저 공허한 논리들로 넘쳐나는 글뭉치들로 감당할 수 없는 불안과 혼란에 빠져버렸다. 니체의 즐거운 비극은 여전히 머리로만 아는 지식이고, 뜨거운 가슴과 몸의 소리를 온전히 말할 수 있는 나의 즐거운 비극은 어디에도 없었다. 너무 오랫동안 나의 감정과 생각에 솔직하지 못하고 니체 뒤에 숨어 지냈나 보다.

니체에게 즐거운 비극은 잦은 편두통으로 사흘 밤낮으로 시달리고, 온갖 병고로 인한 괴로움으로 힘겨웠던 시기에 찾아왔다. 니체는 1868년 6월 라이프치히 대학 근처 어느 허름한 서점에서 쇼펜하우어의 저서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Die Welt als Wille und Vorstellung)』(1819)를 만났다. 그 무렵 그는 그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못한 채 외로이 방황하고 있었다. 니체에게 쇼펜하우어의 철학은 고통으로 가득 찬 현실을 마주하게 해주었다. 니체는 그때의 감동을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어느 날 나는 늙은 론씨의 고서점에서 이 책을 발견했고, 낯선 책이라 생각하며 무심코 책장을 넘겨보았다. 그런데 어떤 악마가 내 귀에다 대고 ‘이 책을 사서 돌아가라’고 속삭이는 것 같았다. [……] 모든 구절이 체념과 부정과 절망을 외치고 있었으며, 그것은 나에게 세계와 인생과 나 자신의 기분을 무서울 정도로 엄청나게 비춰주는 하나의 거울이었다. 여기서 모든 이해관계에서 벗어나 바라보는 태양과 같은 예술의 눈이 나를 바라보았다. 여기서 나는 질병과 쾌유, 추방과 피난처, 지옥과 천국을 보았다. 자기인식, 정말이지 자신을 하나하나 곱씹어보고 싶은 욕구가 강렬하게 엄습해왔다.” (이보 프란첼, 『니체』, 40~42쪽 )

 

니체는 쇼펜하우어와의 극적인 만남을 계기로 자신의 삶에 솔직한 철학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어떻게 사람은 본래의 자기 자신이 되는가?’라는 그의 철학적인 물음은 언제나 ‘나(Ich)’였다. 그러나 본래의 나 자신을 발견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니체는 “감히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할 만한 무거운 짐을 벗어내라. 반복되는 지루한 일상의 삶, 그 삶을 불평하지 말고 견디며 극복해 나갈 수 있도록 몸으로 예술을 하라”라고 말한다. 이렇듯 본래의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은 인간 자신의 본연의 창조성을 회복하기 위한 자기 인식이며, 자기극복이라 할 수 있다.

니체는 ‘본래의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해 가장 먼저 삶을 외면하는 기존의 가치와 규범들을 과감히 벗어 던진다. 이것이 니체가 예고한 전통적 형이상학과 기독교적 가치들의 몰락이며, 인간의 모든 실천적 행위(종교, 철학, 정치, 경제, 교육, 예술 등)들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이었다. 니체는 자신이 사는 시대를 극복하고, 그 시대를 넘어서고자 하였다. 

니체는 먼저 이 시대에 사라져 버린 ‘음악’을 되찾고자 『비극의 탄생』(1876)에서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 두 요소의 변증법적 투쟁과 조화를 통한 그리스적 명랑성(Heiterkeit)을 회복한다. 니체는 ‘그리스적 명랑함’과 더불어 『우상의 황혼』(1888)에서 '우상의 진단'이 정신적인 상처의 치료법임을 명시한다. 그리고 ‘모든 가치의 전도’라는 니체의 철학적 과제를 실현시킨다. 그리고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1883-5)는 삶의 지혜를 전달하는 바로 디오니소스적 음악이다. 여기에는 ‘신의 죽음’, ‘위버멘쉬’ 그리고 ‘영원회귀’ 등의 주요 개념들이 자신을 향상시키고 보다 풍요로운 삶을 살기 위한 삶의 기술들로 선보인다.

내게도 이러한 니체의 속삭임이 들려온다. 이제껏 하찮게 느껴졌던 경험들이 때로는 아픔이었고, 절망 가운데 희망이, 그리고 기쁨으로 새롭게 다가왔다. 인식된 두려움들은 모두 나를 비춰주는 하나의 거울이었다. 오늘 이렇게 나 자신을 하나하나 곱씹어보고 싶은 용기가 생겼다. “어느 누구도 내게 삶의 강을 건너게 해줄 다리를 세워주지 않는다. 오로지 나 혼자만이 그럴 수 있다.” 이제는 그저 앞뒤 재지 않고 무조건 나 자신의 이야기를 쏟아내려 한다. 그것은 니체를 위한 노래가 아니라 나를 위한 노래이며 춤이다. 그래서 오늘도 ‘즐거운 비극’이다.

 

허현숙 충남대·철학

충남대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치고 있다. 중앙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했으며, 충남대학교 철학과에서 『니체 비극적 사유의 음악적 기원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20년~2022년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이 주관하는 도서관 지혜학교에서 ‘니체(Nietzsche)에게 배우는 디오니소스적 지혜’라는 주제로 신중년을 위한 인문학 강좌를 진행하고 있다. 주요 논문으로 「프레게에 있어 수의 존재론적 의미」, 「기악음악으로부터 디오니소스적 음악 고찰」, 「실러의 『메시나의 신부』에 나타난 디오니소스적 예술원리」, 「아울로스 음악을 통한 니체의 디오니소스적 파괴미학」, 「니체와 괴테의 새로운 인간상 연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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