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끝이 있고도 없는 이야기
상태바
시, 끝이 있고도 없는 이야기
  • 문선영 서평위원/동아대·국문학
  • 승인 2024.02.04 22:3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문학 에세이]

 

    1.

   참 좋아, 첫눈에 반해 고백할 수도 있지만, 오래오래 시간을 묵혀 고백할 수도 있다. 루이즈 글릭(Louise Elisabeth Glück)의 작품들에게는 흥미롭게도 이 두 가지 고백이 다 가능하다. 첫눈에 반했다가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고백의 소리가 깊어지는. 고백의 빛깔이 시간이 흐를수록 다채롭게 채색되면서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없을 만큼 아득해지는.
   “꾸밈없는 아름다움으로 개인의 존재를 보편화하는 분명한 시적 목소리를 낸 작가”라는 찬사 아래 2020년에 노벨문학상을 받아 그 작품들이 궁금했는데, 2023년 말 즈음해서 그녀의 시집 13권이 모두 번역되었다. 노벨문학상 이후 쓴 첫 시집도 번역이 되어 얼마나 반가웠던지. 수상 이후 첫 시집이 그녀의 마지막 시집이 되어 슬프고 안타까웠지만, 그래서 더욱 귀하게, 상기된 마음으로 13권을 죄다 받아든 후 한 편씩 한 편씩, 그리 스며들어갔다. 그리고 지금도 조금씩, 한없이, 스며들고 있는 중이다.


    2.

   사후 두어 달 남짓 지나 받아든 그녀의 전집. 시집들이 완역되기 직전에 세상을 떠난 탓일까. 무엇보다 시간에 대한 섬세하고도 묵직한 그녀의 시선이 예사롭지 않다. 작품 곳곳에 포진된 불수의적(不隨意的)인 기억들. 시간의 틀과 결을 아우르면서 삶 전체를 통째로 끌고 오는 작품들. 일몰부터 일출까지 또는 일출부터 일몰까지, 하루의 무게를 삶 전체의 무게로 전이시키는 시간에 대한 겸허한 통찰력들.


하루 종일 그는 사촌의 방앗간에서 일한다,
밤에 집에 오면, 늘 하나 있는 이 창문에 앉아,
그는 하루 중 단 한 번, 황혼을 본다.
이런 시간, 이렇게 앉아 꿈꾸는 시간이 더 많아져야 해.
그의 사촌이 말했듯이:
살다 보면 ― 살다 보면 점점 덜 앉아 있게 된다.

창문에는, 세상이 아니라 세상을 재현하는
네모난 풍경이 있다 계절이 오고 또 가고,
한 계절을 하루에 몇 시간만 볼 수 있다.
초록 사물들 다음엔 금빛 사물들, 그리고 순백이 뒤따른다 ―
추상에서 강렬한 기쁨이 온다,
식탁 위에 놓인 무화과처럼.

   - 「황혼」 부분

사진 출처 = American Academy of Achievement (https://achievement.org/achiever/louise-gluck/)<br>
         사진 출처 = American Academy of Achievement (https://achievement.org/achiever/louise-gluck/)

   개인적으로 해거름녘을 너무 사랑한다. 해가 넘어가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온몸으로 “자기 길을 태우며” 가는 “해”(「목가」)가 저무는 시간, 그 절절함이 지극해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해지는 모습을 보고 싶을 때마다 의자만 옮기면 되는, 어린왕자가 살고 있는 소행성 B612에 가보는 것이 버킷리스트 가운데 하나다. 물론 따로 마련한, 실현 불가능한 버킷리스트를 적는 목록에 적어 둔 것이기는 하지만.
   이미, 읽어 봤지? 위 인용한 시 「황혼」을 추천할 때마다 내가 꺼내는 말이다. ‘이미’라는 부사를 굳이 앞세우는 까닭은 이 시를 읽어 보았더라도 한 번 더, 또 한 번 더 보았으면 하는 마음에서이다. 읽지 않았으면 되도록 한 번 보았으면 하는 마음도 함께. 「황혼」, 루이즈 글릭의 작품 가운데 제일 먼저 접한 시. 그저, 읽는 내내, 겨울잠을 자고 싶은데 그럴 수 없는 마음을 위로하는 듯한 안도감을 느껴, 거듭거듭, 읽게 되는 작품. 시적 자아가 내가 되어, 또는 내가 시적 자아가 되어 해질 무렵 “창문에 앉아” “이렇게 앉아 꿈꾸는 시간”을 누리는. “세상이 아니라 세상을 재현하는/ 네모난 풍경”에 젖어드는. 그리하여 마침내 “식탁 위에 놓인 무화과처럼” “추상에서 강렬한 기쁨이” 오는 소리를 듣는. 그것은 어쩌면 “불멸의 무화과”(「저녁 기도」)라서 가능한. 
   우주적인 시간의 흐름으로 보면 황혼은 일몰의 결과물이다. 이때 황혼의 연장선상에 놓인 일몰이 루이즈 글릭의 삶을 통하면서 새로운 가치로 재창조되고 있어 눈길이 간다. 일몰이라는 단어가 지닌 소멸의 의미를 넘어 제각기 지니고 있는 존재의 의미들을 재확인하는.
   “해가 지는 것과 동시에,/ 농장 일꾼이 낙엽을 태우고 있”는 풍경. “불길이 치솟자, 농장 일꾼은 사라지고;/ 길에서, 그는 보이지 않는” 풍경. “해에 비하면, 여기 모든 불들은/ 빨리 죽”고 “잎이 다 타 버리면 불도 끝”인 풍경. “그러면 농장 일꾼이 다시 나타나, 재를 긁어모”(「일몰」)으는 풍경. 여기서 시인은 ‘비아 네거티브’ 개념을 오버랩 시킨다. 프레질(fragile)과 안티프레질(antifragile) 사이의 역학관계에 주목하면 타들어가는 시간은 재를 남기지 않는다는(이는 아래 「박쥐」에서 연계되어 시화된다). “하지만 그 죽음은 실제”이고, “마치 해가 자기 할 일을 다 한 것처럼,/ 들판을 자라게 하고, 그리고는/ 대지를 태우는 영감을 준 것처럼.” 그래서 시인은 “이제 해가 져도 된다”(「일몰」)고 말할 수 있는 것이리라. 아주 담담하게, 또는 흔쾌히. 

   일몰 후 밤으로 빚어진 풍광은 소멸이나 부재를 넘어서는 의미들로 가득해서 오히려 눈부시다.

 

   시각에는 두 종류가 있다:/ 사물을 보는 것, 이건 광학 과학에/ 속한다, 그리고/ 사물 너머를 보는 것, 이건/ 박탈에서 비롯된다. 어둠을 조롱하고, 모르는/ 세계는 거부하는 사람; 어둠이/ 장애물들로 가득하지만, 신호가 거의 없고/ 시야가 좁을 때도 강렬한 인식을/ 밤은 우리들 안에/ 네 생각보다 더 집중된 사고를 키워 냈다, 근본적일지라도./ 인간은 자아, 눈에 갇힌 인간,/ 보이지 않는 길 하나, 눈 너머에 있다,/ 비아 네거티브라고/ 철학자들이 부르는 것; 빛을 위한 장소를 만들려고/ 신비주의자들은 눈을 감는다 ― 그가 추구하는/ 그런 빛은 사물들에 의존하는 생명체들을/ 파멸시킨다,

   - 「박쥐」 

 

   “사물 너머를 보는 것,/ 이건 박탈에서 비롯된다.” 하여 “어둠을 조롱하고, 모르는/ 세계는 거부하는 사람”에게 경고한다. “어둠이/ 장애물들로 가득하지만, 신호가 거의 없고/ 시야가 좁을 때도 강렬한 인식을” 준다는 것을. 그리하여 “밤은 우리들 안에” 우리의 “생각보다/ 더 집중된 사고를 키워” 낸다는 사실을. 앞선 인용시에서 예견한 ‘비아 네거티브’가 「박쥐」에서 구현되는 순간이다. 시력이 지극히 좋지 않아 야행성으로 밤에 오히려 자유로이 날아다니는, 시력보다는 오히려 청력으로 자유로이 날아다니는 박쥐의 존재론적 가치는 그녀가 비아 네거티브 맥락에서 놓치지 않는 엄중한 가치 가운데 하나.
   그러므로 시인에게 밤은 역설적으로 환한 의미망들을 가득 품는 시간이 된다. “우선 일렁이는 나뭇잎 그림자로, 그러고는/ 달, 그다음엔 별들, 그러다 달도 없애고, 별도 없애고.// 페르세포네가 천천히 익숙해지게 해야지./ 결국엔,” “밤이 편안하단 걸 알게 될 거야.” “이렇게 차츰차츰 밤을 소개해야지,” 생각하는 하데스의 출현도 무겁지 않다(「헌신의 신화」). 이렇게 보면 시인에게 “밤은 열린 책이다”(「폭풍이 오기 전에」), 단절되고 차단된 밤이 아닌.
   하여 “열린 책”으로서 “밤”에 “달이 떠오르면 들판은 빛이” 날 것이다. “눈이 내”리기라도 하면 “생명의 가식도 끝이” 날 것이다. “지구는 거울과 같”아서 “평온은 평온을 만나고, 무심은 무심을 만”(「수확」)날 것이다. 그러면, 마침내, “낮의 밝음이/ 밤의 밝음이 되”는.  

 

   낮의 밝음이/ 밤의 밝음이 되고; 불은 거울이 된다.// …… // 들판 위로,/ 마을 집들 지붕들 위로,/ 모든 생명을 가능케 했던 광채가/ 차가운 별들이 된다./ 가만히 누워서 바라보라:/ 별들은 아무것도 주지 않고 아무것도 묻지 않네.// 대지의/ 쓰라린 치욕, 차가움과 황폐함 속에서// 내 친구 달이 떠오르고:/ 달은 오늘밤 아름다워, 그런데 언제 아름답지 않은 적이 있던가?

   - 「시월」

 

   “모든 생명을 가능케 했던 광채가/ 차가운 별들이” 되는 이치. 이는 “그림자는 밤이 다가오고 있다는 뜻”, “낮이 다시는 오지 않을 거란 뜻이 아”(「비아 델레 옴브레」)님을 숙지한 덕분에 얻게 되는 이치. “Via Delle Ombre”, 그늘을 넘어서. 이는 앞선 인용시 「박쥐」에서 예감한 “보이지 않는 길 하나, 눈 너머에 있”는 사실과도 상통한다. 이는 어쩌면 “당신의 길어진 부재 안에서” “땅을 사용하는 걸 허락”(「저녁 기도」)한 데 드리는 ‘저녁 기도’의 마음자리처럼 관용과 포용, 환대와 공존의 의미망 덕분. 
   그리하여 어두운 밤은 어두운 밤에서 그치지 않고 해를 끌어당겼던 마음을 도로 내어 해를 밀어 올리는 것은 아닐까, 일몰 이후 일출이 도래하는, 또는 도래해야 하는 것처럼. 시인은 “어둠 속을 지나서 간다, 어둠이” 시인에게 “자연스러운 것처럼”, “마치” 시인이 “이미 어둠의 한 요소인 것처럼.” 그리하여 마침내 “고요하고 평온하게, 날이 밝아”(「시골 생활」)오는 것처럼.

 

   달콤한 냄새 나는 허브가 가득하다,/ 이슬에 반짝이는 작은 식물들 ―// 그곳에 올라가 새벽을 기다리는 건 큰 행사였다,/ 해가 바위 뒤에서 미끄러져 나올 때, 해가 보는 것을 보면서,/ 네가 볼 수 없는 것은, 상상을 했다;// 네 눈은 가능한 한 멀리, 강까지 가곤 했다, 일테면,/그리고 나머지는 네 마음이 해낼 거였다―// 하루를 놓치면, 항상 다음 날이 있었고,/ 일 년을 놓쳐도, 괜찮았다,/ 언덕은 아무 데도 가지 않았고,/ 백리향과 로즈마리는 계속 돌아왔고,/ 해는 계속 뜨고, 덤불은 계속 열매를 맺었다―// 가로등이 꺼져 있다; 여기는 새벽이다./ 가로등이 켜져 있다; 그건 황혼이다./ 어느 쪽이든, 아무도 위를 안 본다. 모두 앞으로 나간다,/ 과거의 냄새가 사방에 가득하고,/ 옷에 스치는 타임과 로즈마리 향,/ 너무 많은 환상의 내음―// 나는 돌아갔지만 머무르지 않았다./ 내가 아끼던 이들은 다 사라졌다./ 일부는 죽었고, 일부는 존재하지 않는 곳으로 사라졌다,/ 우리가 언덕 꼭대기에서 보았기에 우리가 꿈꿨던 사람들―/ 들판이 여전히 빛나고 있는지 봐야 했다,/ 태양은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똑같은 거짓말을 하고/ 어떤 장소에 대해 네가 알아야 할 것은 거기 사람이 사는가 하는 것뿐./ 사람이 살고 있다면, 모든 것을 알 수 있다.

   - 「일출」 부분

 

   “사람들 사이로, 언덕들과 하늘이 모든 공간을 차지했다./ 남은 게 뭐든, 한동안은 우리 것이었다./ 하지만 조만간 언덕들이 그걸 다시 가져가서 동물들에게 줄 것이다./ 그리고 달이 바다를 그곳으로 보낼 것이다/ 우리가 한때 살던 곳은 산기슭 시냇물이나 강이 될 것이다,/ 반사되는 찬사를 하늘에 지불하면서―”(「일출」). 연민과 공감을 넘어 환대와 공존의 세계관이 구현되는 순간이다. 그 순간을 ‘일출’ 장면으로 시인은 꼽는 것이다. 하여, “여름에는 파랗”고 “눈이 내리면 하얗다.”라는 자명하고도 명쾌한 사실이 더없이 눈부시다.
   그래서 “바람이 있다면, 나무 한 그루도 충분하다 ― 과수원 전체는 필요 없다”(「비아 델레 옴브레」)는 시인의 목소리가 진솔하기 그지없이 들린다. 하여, 일출 이후 “우리는 햇볕 아래 서 있고 햇볕은 우리를 치유”해줄 것을 믿는 것이다. “해는 서둘러 사라지지 않”을 것이고, “움직임 없이 우리 위에 머물러 있”(「따뜻한 날」)을 것을 믿는 것이다. 

   시간에 대한 섬세하고도 묵직하게 다가오는, 예사롭지 않은 그녀의 시선 넘어, 하나 더. ‘끝’에 대한 시인의 깊이 있는 시적 시선에 다시 한 번 더 눈길을 준다. “인간은 한계상황에 처한 존재이다.”라는 실존주의적 정의를 토대로, 그러나 그 정의를 넘어서 포용하려는 마음자리. 수확이 끝난 눈 내리는 들판마저 소멸로 보지 않고 생명 가득한 온상으로 마주하는 시선(“살아 있는 것은, 땅 밑에서 산다.”, 「수확」). “되돌아가는 것은 고통스럽지 않다;”(「지렁이」)고 말하는 진중한 목소리. “완벽한 끝은 없는 것만 같아./ 사실, 무한한 끝들이 있지./ 아니면 일단 누군가 시작하면,/ 다만 끝이 있을 뿐”(「신실하고 고결한 밤」)이라고 말하는 투영한 목소리. “각각의 고별을 통해 우리에게 열려 있는/ 그 광대한 영토를 넌지시 말”(「모험」)하는 그윽하고도 흔쾌한 목소리. 이러한 ‘끝’에 대한 시적 시선은 앞서 제시한 일몰에서 일출까지의 과정들을 순환론적으로 인식하게 한 원동력에 다름 아닌.

   속단할 수는 없지만 그녀에게 시는 삶이라는 “고통의/ 형식”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 그래서 그녀는 기꺼이 “삶 속으로 들어”(「시」)간 것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 그 속에서 그녀는 시간이 지닌 의미를 체화한 것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 이때 자신의 삶이든 타인의 삶이든 그 구분은 의미 없어 보인다는 생각. 
  쉼표와 마침표, 쌍점과 쌍반점들을 두드러지게 부려 써서, 자연스레 소리 내어 읽게 만드는 작품들. 소리 내어 읽어서 오히려 루이즈 글릭의 품속으로 한없이 걸어가게 되는 작품들. 


    3.

   “다른 이들이 예술에서 발견했던 것을,” “자연에서 찾”은 시인. “다른 이들이 인간의/ 사랑에서 찾았던 것을” “자연에서 찾”은 시인. 자신이 “새였을 때” 자신이 “사람이 될 거라 믿”은 시인. 자신이 “사람이었을 때” 자신이 “새가 너무너무 되고 싶었”던 시인. “사람마다 자기 희망을 다른 장소에 저장하는 법”(「시골 생활」)을 너무나 잘 알고 있던 시인. “질료를 증오하고 형상을 사랑할 수는 없다.”는 표어를 거울 위에 붙여 둔 시인(「오래된 파편」). “사랑을 되돌려 주는 것만/ 사랑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 아니란 것을”(아침 기도」) 섬세하게 헤아린 시인. “인간의 본성은 원래 하나였고 우리는 하나의 전체였다. 그리고 전체를 향한 욕망과 추구를 사랑이라 한다.”라고 말한 플라톤의 말을 『아라라트 산』 맨 앞에 두고 되뇌던 시인. 
   이 모든 모습들을 끌어안는다. 그리고 오래오래 시간을 묵혀 만나다 또 불현듯, 사랑을 고백하게 되는 그 순간들을 고대하면서 오늘도 나는 조금씩, 한없이, 그녀의 작품 속으로 스며들고 있는 중이다. 그녀가 들려주는 끝이 있고도 없는 이야기, 그 속으로.

 

문선영 서평위원/동아대·국문학

동아대학교 기초교양대학 교수. 시인·문학비평가. 부산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국문학(현대시)을 전공하였다. 1990년 『문학예술』 제1회 신인상 시 부문 당선, 1991년 『심상』에 평론으로 등단했다. 지은 책으로는 『익숙한 소리』(시집), 『현대시와 문화의식』, 『한국전쟁과 시』 등이 있으며, 그 외 공저로 『한국 현대시와 패러디』, 『한국 서술시의 시학』, 『한국 현대문학의 성과 매춘』, 『몸의 역사와 문학』이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