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테로토피아에서 판옵티콘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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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테로토피아에서 판옵티콘까지
  • 이상길 연세대·미디어문화연구
  • 승인 2024.01.22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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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옮긴이에게 듣는다_ 『권력과 공간』 (미셸 푸코 지음, 이상길 옮김, 문학과지성사, 305쪽, 2023.12)

 

내가 지난해 말 출간한 <권력과 공간>은 푸코의 공간 관련 텍스트 몇 편을 엮어 옮긴 책이다. 이 책을 펴내면서 2014년에 나왔던 <헤테로토피아>도 번역을 손질해 개정판을 함께 출간했다. 사실 <권력과 공간>의 기획은 애초에 <헤테로토피아>에서 비롯한 것이다. 푸코가 본격적이고 체계적인 ‘공간 이론’을 구상하거나 제시했던 저자는 아니지만, 그가 창안한 헤테로토피아 개념은 오랫동안 지리학, 건축학, 도시공학은 물론 문학, 미학, 문화연구, 그리고 예술 창작과 비평에까지 이르는 다양한 영역에서 공간 논의의 핵심어 노릇을 해왔다. 국내에서도 <헤테로토피아>의 번역 이후 예컨대, 현대문학 연구 분야에서 이 개념의 활용이 매우 활발해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푸코의 공간론이라는 차원에서 보자면, 헤테로토피아 못지않게 중요한 또 하나의 축이 바로 판옵티콘이라는 점이다.
† 허예슬, 김병준, 최주찬, 최진석. “푸코의 초상: 한국 현대문학 학술장의 푸코 인용 양상 변화, 2008-2021 KCI 등재 학술지 논문 참고문헌 데이터를 중심으로,” <사회와 이론>, 제46집, 2023, 305-342쪽. 참고로 헤테로토피아와 판옵티콘이 반드시 서로 대립적이거나 배제적인 개념은 아니라는 지적을 덧붙여두자. 이는 ‘바깥의 공간’이자 ‘실재하는 유토피아’로서 헤테로토피아의 정의가 상당히 모호하며 다의적이라는 사실과 관련이 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판옵티콘은 18세기의 공리주의 사상가 제러미 벤담이 고안했던, 빛과 시선을 이용한 전방위 감시방식이자 훈육 장치이다. 푸코는 <감시와 처벌>에서 근대 규율권력의 범례로서 판옵티콘이 지니는 역사적 위상과 의의를 강조함으로써, 이미 오래전부터 벤담 이상으로 판옵티콘과 결부되어 거론되는 사상가로 자리 잡았다. 판옵티콘은 푸코의 유명한 ‘권력-지식’론이 무엇보다 공간적 준거점을 지닌다는 사실을 강력히 환기한다. 즉 지식의 형성, 발전, 변화가 모세혈관 같은 권력 관계의 기능작용과 밀접히 연관된 과정이라면, 그러한 기능작용은 그 자체 특정한 방식으로 공간을 조직하고 신체를 배치하는 다양한 기술에 기반을 둔다는 것이다. 권력이 공간을 사방에서 가로지른다면, 공간은 무정형의 권력을 틀 짓고 구조화한다. 이는 권력과 공간이 서로 불가분하게 얽혀있는 양태들이자, 언제나 ‘권력-공간’으로서 존재하는 개념적 샴쌍둥이나 다름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점은 – 어쩌면 ‘권력-지식’ 개념의 그늘에 가려서? - 그 함의가 다소 소홀히 다루어져 온 듯하다. 

이와 같은 문제의식 아래 내가 <권력과 공간>이라는 편역서를 통해 강조하고 싶었던 것은 크게 두 가지였다. 푸코에게 헤테로토피아라는 대안적 공간론이 미완의 상태로 요동치고 있다면, 판옵티콘이 상징하는 ‘권력-공간’론 또한 풍부한 발전 가능성을 품고 잠재해 있다는 것, 그러므로 이 ‘권력-공간’론의 면모가 좀 더 뚜렷해진다면, 헤테로토피아가 그렇듯, ‘지금 여기’에서 다양한 공간의 문제를 분석하고 탐구하는 데 유용한 이론적 자원을 제공할 수 있으리라는 것. 해외에서는 (실상 별로 많지도 않은) 푸코의 공간 관련 텍스트들이 꾸준히 주목받아왔으며, 그에 따라 푸코의 논의에 영감과 영향을 받은 공간 연구들 역시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권력과 공간>의 발간, 그리고 <헤테로토피아>의 재간행을 계기로 국내에서도 비슷한 ‘푸코 효과’가 나타나길 기대하는 마음이다.

 

<권력과 공간>에 실린 푸코의 텍스트는 모두 여덟 편이다. 그것들은 권력과 공간의 복잡한 결합 양상과 관련해 푸코가 이론적 논의의 단초를 제시하거나 경험적 탐구를 시도한 대담, 강연문, 논문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어떤 글들은 복잡한 저작권 관계 등의 이유로 아쉽게도 책에 싣지 못했다). 그런데 이 소품들 하나하나가 그 자체로 반짝이는 사유와 분석의 편린들을 담고 있다고는 해도, 푸코 공간론의 전체적인 윤곽을 파악하는 데는 충분치 않은 것 또한 사실이다. 내가 책 뒷부분에 “‘권력-공간’의 탐색”이라는 제목의 다소 긴 해제를 덧붙인 이유이다. 그 글에서 나는 푸코의 주요 저작과 강의록, 그리고 기타 텍스트들에 나타나는 공간에 대한 통찰, 관점의 진화, 실제 분석의 사례들을 연대기적으로 재구성함으로써, 책에 번역, 수록된 텍스트들을 보완하고 푸코 공간론에 대한 총체적인 이해를 돕고자 했다. 따라서 푸코에게 공간 관련 사유가 어떻게 권력 개념의 정교화와 긴밀히 맞물려 발전하는지 자세히 알고 싶은 독자라면, <권력과 공간>의 옮긴이 해제를 참조하기 바란다. 다만 이 지면에서는 해제에 미처 담지 못했던 논점 서너 가지만을 간단히 짚어두고자 한다. 

우선 푸코의 공간론이 그의 권력론을 좀 더 깊숙이, 혹은 또 다른 각도에서 비추는 비판적 조명등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권력 관계를 유형화하거나 새롭게 개념화하고 그 메커니즘을 구체적으로 포착하기 위해 다양한 공간을 참조하고 소환한다. 그 과정에서 집중적인 연구 대상으로 떠올랐던 감옥과 병원 이외에도, 군대, 학교, 공장, 수도원, 강제수용소, 노동자 주거단지, 도시 정비계획, 감염병 관리체제 등 그가 탐색적으로나마 분석을 시도했거나 관심 있게 언급한 공간의 스펙트럼은 상당히 넓다. 우리는 이러한 현실 공간들에 대한 역사적 이해와 분석이 규율권력, 생명권력, 사목권력, 통치성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권력 개념에 어떤 특징과 장점, 한계를 초래하는지 따져볼 수 있을 것이다. 

한편 푸코의 공간론은 그 자체로 우리 시대, 우리 사회의 공간 문제에 심층적으로 접근하는 통로 구실을 할 수 있다. 사실 사회 공간에서 감시기술의 증대나 ‘전자 판옵티콘’의 발전에 따른 규율권력의 강화를 분석하는 연구들이 나온 지는 이미 오래 되었다. 근래 들어서는 도시의 이동성과 순환의 물질적 인프라를 자유주의 통치성과 연결 짓는 모빌리티 연구들도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이 모든 작업은 푸코식 관점이 여러모로 공간 연구에 얼마나 생산적일 수 있는지 증명한다. 게다가 반드시 학술적인 수준에서가 아니라 해도, 푸코의 텍스트들은 우리가 일상의 풍경 속에 자연스럽게 자리 잡은 여러 공간의 기능과 의미를 부단히 고민하고 성찰하도록 자극한다. 학교, 공장, 군대 같은 전형적인 규율 공간 말고도, 고시원, 요양원, 난민수용소, 계급적 주거단지와 종족화된 거주지역, 나아가 각종 테크놀로지가 구성하는 모빌리티 경관에 이르기까지 그 대상은 무궁무진하다. 우리는 그것을 훈육, 규율, 감시, 배제, 환경, 조절, 생명권력, 통치성 같은 이론적 렌즈를 통해 새로운 비판적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푸코가 다루는 공간이 추상화된 기능적·제도적 단위(예컨대, 감옥, 병원) 차원에 그치지 않는다는 사실 또한 유념할 필요가 있다. 그러한 단위들은 명확한 지역적 배경 안에 위치 지어진다. 그런데 이처럼 지리학적 공간에 주의를 기울일 경우, 우리는 푸코의 연구가 시대적으로 17~19세기에 집중하듯이, 지리적으로는 프랑스와 서유럽에 한정해 이루어졌다는 점을 새삼 깨닫게 된다. 푸코 스스로도 이에 대해 자의식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그가 모든 것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의 철학적 계보학은 일차적으로 ‘서구 근대성’에 대한 비판에 주력한다. 아시아나 아프리카는 물론, 동유럽마저도 그 역사적·공간적 지평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있다. 그렇다 보니 푸코의 논의에는 때로 프랑스-서유럽 이외의 지역에 대한 피상적인 인식과 식민주의적 타자화의 위험성이 따라붙는다. 일본과 이란에 관한 그의 논평들이라든지, <지식의 의지>에 나오는 동양/서양 이분법이 그 대표적인 사례일 것이다. 

이는 우리가 푸코 철학의 개념과 분석 틀을 어느 사회에나 간단히 적용 가능한 보편적 도구인 양 취급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다시 한번 일깨운다. 예를 들어, 담론, 장치, 주체화 등에 비하면 규율권력이나 생명권력은 그 공간적·지리학적 배경의 특수성이 훨씬 두드러지는 개념일 것이다. 그것을 맥락 초월적으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현장의 상이한 구체적 속성들과 대질시키는 과정이 면밀하게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 역사적 경험의 지역적 차이(예컨대, 식민지, 제3세계, 사회주의, 압축근대화)에 대한 진지한 고려를 바탕으로 ‘이론적 연장들’을 선별하고 변용하는 과정이 필수적이라는 말이다. 비서구 지역들을 대상으로 한 다양한 계보학적 작업은 푸코 논의의 ‘서구 중심성’을 반성하게 만들고, 나아가 권력 유형에 따른 푸코식의 연대기적 질서-고전주의 시대에서 근대로 주권권력, 규율권력, 생명권력의 다소 순차적인 발전-를 재검토하도록 이끌 수도 있을 것이다. 

<권력과 공간>, <헤테로토피아>의 출간 한 달쯤 전에 내가 2009년 번역했던 <푸코 그의 사유, 그의 인격>의 개정판 또한 낼 수 있었다. 이 책에서 저자인 폴 벤느는 푸코를 뒤좇아가며, 역사 쓰기가 우리의 현재를 ‘궁극적인 차이’로서 생산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럴 수 있으려면 (시간성을 가시화하며 그것에 언제나 얽혀있는) 공간들을 다르게 보고 새롭게 읽고 두껍게 써나가는 작업이 무엇보다도 선행해야 할 것이다. 내가 이번에 출간(또는 재출간)한 책들이 그러한 탐구의 여정에 오래도록 쓸모있는 동반자 노릇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

 

이상길 연세대·미디어문화연구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대학원 미디어문화연구 전공 교수. 지은 책으로 『아틀라스의 발―포스트식민 상황에서 부르디외 읽기』, 『상징 권력과 문화―부르디외의 이론과 비평』, 『라디오, 연극, 키네마―식민지 지식인 최승일의 삶과 생각』 등이, 옮긴 책으로 『성찰적 사회학으로의 초대』, 『랭스로 되돌아가다』, 『푸코―그의 사유, 그의 인격』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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