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뱅베니스트를 사랑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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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뱅베니스트를 사랑하는 이유
  • 서종석 한국외대·불어불문학
  • 승인 2024.01.21 1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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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에게 듣는다_ 『에밀 뱅베니스트』 (서종석 지음, 컴북스캠퍼스, 128쪽, 2023.12)

 

에밀 뱅베니스트라는 사람

‘나는 왜 뱅베니스트를 사랑하는가.’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가 1974년 에밀 뱅베니스트(Émile Benveniste)의 『일반 언어학의 여러 문제(Problèmes de linguistique générale)』 2권이 출간됐을 때 기고한 서평 형식의 헌사 제목이다. 1966년 이 책의 1권이 나왔을 때도 비슷한 헌사로 뱅베니스트를 향한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뱅베니스트를 읽는 일은 늘 새롭고 흥미로운 일이다. 그의 방대한 언어 지식과 지적 영역을 마주하면 매번 놀라움이 동반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뱅베니스트라는 언어학자를 처음 접하는 곳은 의외로 언어학 밖이다. 예를 들어 조르조 아감벤(Giorgio Agamben)의 독자들은 곳곳에서 호모 사케르(Homo Sacer) 개념을 전개하기 위해 아감벤이 소환해야 했던 뱅베니스트를 만나게 된다. 

아감벤은 『몸의 사용(The Use of Bodies)』에서 뱅베니스트를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 미셸 푸코(Michel Foucault)와 함께 현대 사상의 아포리아에 대한 대안을 모색하는 “비직업적 철학자”(p.113)로 꼽는다. 그러나 아감벤 이전에 롤랑 바르트, 폴 리쾨르(Paul Ricœur), 줄리아 크리스테바(Julia Kristeva),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 등등 많은 학자들이 뱅베니스트를 즐겨 읽었다. 자크 데리다가 환대(hospitalité)의 개념을 주조할 수 있었던 학문적 토대에는 뱅베니스트의 『인도유럽사회의 제도⦁문화 어휘연구 1: 경제, 친조 사회 (Le Vocabulaire des institutions indo-européennes. Économie, parenté, société I: Economie, parenté, société)』(1969)가 있다. 이는 언어학이라는 제한된 학문 영역을 벗어나 인문학자로서도 학문적 존재감을 보여준 뱅베니스트의 일면이다.

개별 언어에 대한 뱅베니스트의 연구 역량은 우리의 상상을 넘어선다. 뱅베니스트는 소쉬르와 마찬가지로 인도 유럽어 재구성 작업에서 출발했다. 뱅베니스트는 이란어족에 능통했고, 비교문법, 역사언어학의 관점에서 대부분의 인도유럽어족 언어들을 다루었으며, 인간 언어의 보편성을 연구하기 위해 아메리카 원주민 언어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또한 고대 언어와 현대 언어를 아우르며 인간 언어의 본질에 대한 성찰에 힘쓰면서 궁극적으로 일반 언어학을 지향했다. 일부 학자들은 뱅베니스트의 뛰어난 언어 지식의 원천을 그가 태어난 다국어 환경의 유대인 가정에서 찾곤 한다. 그런데 뱅베니스트는 자신에 대해 거의 얘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출생지와 출생일 외에 그의 사적인 삶은 거의 알려진 바 없다. 

뱅베니스트는 ‘에즈라(Ezra)’라는 이름으로 1902년 시리아 알레포(Alep)에서 태어나, 1913년 프랑스로 이주해 1924년 프랑스 귀화 시민이 되는데, 이때 ‘에밀’이라는 이름을 선택한다. “삶이 소설이었던 언어학자.” 뱅베니스트의 유고집 『마지막 강의: 콜레주드프랑스 1968∼1969(Dernières leçons. Collège de France (1968∼1969))』의 출판 소식을 알리는 2012년 4월 20일 자 ≪르몽드≫ 특집 기사의 제목이다. 유대인으로 격동과 비운의 2차 세계대전 시기를 보내야 했던 뱅베니스트는 온갖 고초를 겪으며 목숨을 부지했다. 그의 형은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에서 살해당했다. 전쟁의 와중에 오랜 기간 축적해온 그의 많은 연구 자료가 사라졌고, 그의 연구도 공백으로 남게 된다.

그는 젊은 시절 혁명적이고 전위적인 사상가들과 교류를 하며, 사회 개혁과 반전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이로 인해 군 입대 후 투옥되기도 했다. 장 클로드 밀네르(Jean-Claude Milner))에 따르면 뱅베니스트의 정치적 성향은 프리드리히 헤겔(Friedrich Hegel), 카를 마르크스(Karl Marx), 혹은 콜레주 드프랑스 동료였던 알렉상드르 코제브(Alexandre Kojève) 같은 사상가들과 관련이 있으며 다양한 형태로 많은 논문에 반영되었다. 

뱅베니스트는 생전 방대한 연구와 저작 활동으로 저서 18권, 논문 291편, 그리고 서평 약 300편을 남겼다. 그러나 뱅베니스트는 자신의 언어학을 정리한 이론서를 남기지 않았다. 우리가 가장 많이 접하는 『일반 언어학의 여러 문제』 1권과 2권은 그의 논문들 중 일정한 편집 방향에 따라 선정된 일종의 모음집이다. 『일반 언어학의 여러 문제』 1권은 1966년 미셸 푸코(Michel Foucault)의 『말과 사물』(Les Mots et les choses)과 함께 서점에 나왔는데, 언어학 서적으로는 드물게 한 시즌에 4만 부가 팔리며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이는 뱅베니스트라는 존재를 언어학계와 일반 대중에게 알린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뱅베니스트는 이 책이 출판된 시점이 그의 연구자로서의 삶이 거의 끝나갈 무렵이었다는 것을 몰랐다. 1956년 이미 심장마비로 건강이 약해진 그는 1969년 뇌졸중으로 쓰러졌고, 1976년 사망할 때까지 강의와 연구를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그는 평생 독신으로 살다 언어학자로 세상을 떠났다.


뱅베니스트의 언어학: ‘언어 속의 인간’

뱅베니스트 언어학은 종종 ‘발화행위 이론’ 등 몇몇 연구 영역으로 좁혀 규정되기도 하는데, 이는 그의 언어학적 관심사를 축소하고 왜곡하는 일이다. 뱅베니스트는 인간의 언어가 작용하는 다양한 영역에 대해 언어학적인 읽기와 이해를 시도한 인물이다. 고대와 현대의 다양한 개별언어 연구로 이루어진 그의 모든 연구 대상들, 즉 시간, 담론, 사회, 문화, 제도, 시학 등을 하나로 엮는 것은 ‘언어 속 인간’이라는 모습이다. 뱅베니스트는 언어를 통해, 언어 속에서 인간을 살펴보고, 인간이 만든 제도와 사회, 그리고 문화를 기호적으로 읽어내려고 했다. 이는 개별언어에 대한 그의 통시적 연구뿐만 아니라 공시적 연구 모두에서 드러난다.

뱅베니스트에게 인간과 언어는 서로 분리할 수 없는 관계이다. “인간은 한번은 언어 없이, 한 번은 언어와 함께, 이렇게 두 번 창조된 것이 아니다”(Problèmes de linguistique générale I: 259). 우리가 세상에서 만나는 인간은 ‘말하는 인간’, 다른 사람에게 ‘말하는 인간’이며 언어는 바로 인간의 정의 자체를 알려준다는 것이다. 뱅베니스트에게 언어는 ‘의사소통의 도구’가 아니다. 언어는 인간의 본성에 속하는 것이지 인간이 만든 ‘도구’가 아니다. 인간 언어의 속성은 무엇보다 ‘의미하는 것’이다. 인간은 언어를 통해 의미하는 유기체로 거듭나고, 매번 말할 때마다 자신이 만든 담론의 기원이자 주인이 된다.

이러한 인간학적 관점으로 그의 언어학은 인문과학 전반에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사실 『일반 언어학의 여러 문제』 1권과 2권에 실린 논문들 중 상당수는 인류학, 사회학, 심리학, 철학, 정신분석학 등 언어학의 인접학문 학술지나 발표 논문집에 수록된 것이어서, 당시 구조주의 언어학자들의 학술활동과는 근본적인 차이를 보인다. 따라서 뱅베니스트 언어학을 논할 때 가장 논쟁이 되는 지점은 그의 학문적 정체성에 대한 물음이다. 뱅베니스트는 구조주의자인가? 이에 대한 답은 학자에 따라 근본적으로 갈린다. 뱅베니스트를 구조주의자로 보아야 한다면, 그것은 무엇보다 그가 구조주의의 흐름 속에서 파리고등연구원(École Pratique des Hautes Études)을 통해 페르디낭 드 소쉬르(Ferdinand de Saussure)에서 앙투안 메이예(Antoine Meillet )로 이어지는 파리학파를 계승했다는 사실, 그리고 그의 언어학에는 소쉬르 언어학의 흔적이 깊게 남아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를 단순히 구조주의자로 볼 수 없는 이유 또한 그의 언어 이론에서 찾을 수 있다. 뱅베니스트 언어학은 끊임없이 소쉬르적 구조주의와 대립하면서 인식론적 전복을 꾀하고 그 헤게모니의 붕괴를 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뱅베니스트는 구조 속에 갇힌 억압된 주체의 기호적 권리를 회복시킨다. 뱅베니스트 언어학의 특징 중 하나는 ‘주체성(subjectivité)’에 대한 성찰이다. 구조주의에서 등한시되던 주체 문제가 주목받은 배경에는 무엇보다 소위 ‘68혁명’이라 불리는, 기존의 가치와 질서에 저항하던 사회적 변혁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구조주의의 닫힌 기호의 세계에서 주체성은 지시작용(référence)과 역사(histoire)의 문제와 함께 구조주의에서 늘 소외되었던 영역이었다. 주체의 문제는 철학에서 왔지만, 뱅베니스트의 주체 개념은 순수하게 언어적이다. ‘구조’ 속에서 억압받던 주체, 즉 ‘말하는 주체’는 뱅베니스트 언어학과 함께 부상한다. 뱅베니스트는 주체의 개념에 진정으로 언어학적 지위를 부여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나’는 ‘나’라고 말하는 자다(Est « ego » qui dit « ego »)”(Problèmes de linguistique générale I: 260. 강조는 원저자). 이 자기 지시적 정의는 뱅베니스트 주체성 이론의 본질이다. ‘나’는 ‘나’가 포함된 현 담론 사례를 발화하는 사람이다. ‘나’는 명사 기호처럼 대상으로 정의될 수 없고 오직 ‘담론 행위’로만 규정될 수 있다. 인간은 언어 속에서 그리고 언어에 의해서 주체로 구성된다.

그런데 말하는 주체는 담론의 세계에서 홀로 정의되는 존재가 아니다. 뱅베니스트에게 말하는 인간은 ‘다른 인간에게’ 말하는 인간이다. 따라서 ‘나’의 주체성은 ‘나’와 ‘너’ 사이 담론의 산물이다. 상호 주체성(intersubjectivité)이 주체성을 결정한다는 의미다. 이렇게 주체성의 언어적 기반이 발견되는 곳은 ‘나’와 ‘너’를 통합하고 상호 관계로 정의하는 변증법적 현실 속이다. 그리고 일인칭 ‘너’와 이인칭 ‘나’의 담론 밖에 존재하는 삼인칭 ‘그(녀)’ 혹은 ‘그것’은 ‘부재한 자’로서 상호 주체성의 토대 역할을 수행하며, 담론의 모습을 완성한다. 뱅베니스트와 더불어 더 이상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가 아니라, ‘나는 (지금), (여기서), 말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가 된다.


뱅베니스트의 귀환

뱅베니스트는 적어도 언어학의 관점에서 20세기 후반과 21세기 초반을 학문적으로 이어주는 중심 고리이다. 그런데 장자크 토마(Jean-Jacques Thomas)같은 뱅베니스트 연구자들에 따르면, 뱅베니스트는 특히 앵글로색슨 학계에서 소쉬르의 단순한 계승자로 간주되며 오랜 기간 동안 제대로 된 평가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래서 1970년대 초 포스트구조주의의 핵심 개념을 정교화하고 거기에 지대한 자양분을 제공한 탁월한 공헌도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크리스테바, 토도로프, 데리다, 푸코, 라캉 등 다양한 분야의 사상가들이 이른바 미국의 해체주의 운동(그리고 일정 부분 포스트모더니즘 운동까지)의 유럽적 기반으로 간주되지만, 이들의 연구가 뱅베니스트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은 앵글로색슨 학계에서는 일반적으로 무시되거나 간과된다. 최근 뱅베니스트의 수많은 미공개 문서가 발굴되면서 뱅베니스트를 중심으로 한 언어학 발전사를 이해하고 그의 언어 이론을 새롭게 조망하는 일이 가능할 것으로 기대된다. 이렌 페놀리오(Irène Fenoglio)가 “뱅베니스트의 귀환”이라고 표현한 이유이기도 하다. 

뱅베니스트에게 인간은 언어 속에서, 언어에 의해 세계로 진입하고 그 세계에 머무르는 존재다. 그러나 언어적 주체의 문제는 챗GPT 등 초거대 언어 모델 인공지능의 등장과 포스트휴먼 개념이 논의되고 있는 현재 새로운 성찰의 대상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뱅베니스트가 언어적 주체 개념을 주창하던 시대에는 상상도 못한 모습으로 인간의 세계는 변화하고 있다. 이 변화 속에서 ‘말하는 인간’과 ‘말하는 기계’ 사이의 대화는 점점 더 익숙해져 가고 있으며, 우리는 새로운 언어적 주체의 출현을 목도한다. 인공지능과 공존하는 포스트휴먼 시대, 인간뿐 아니라 ‘언어’를 사용하는 ‘말하는 주체’의 복수성과 이들에 대한 개방성은 인간 화자에게 선택의 여지없이 주어진 성찰의 대상이다. 뱅베니스트의 언어적 주체에 대한 논의가 다시금 소환되고 우리에게 새로운 논의와 전망이 필요한 시기이다.

 

서종석 한국외대·불어불문학

한국외국어대학교 세미오시스연구센터 교수로 언어연구소 소장과 세미오시스연구센터 센터장을 겸하고 있다. 한국외대 불어과와 대학원 불어불문과를 졸업하고 파리4대학에서 인지언어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십여 년 전부터 한국연구재단 인문한국(HK) 사업에 참여해 언어학과 더불어 기호학, 문화학 등으로 연구 영역을 확장해 저술 활동을 하고 있다. 저서로는 ≪소셜 미디어 속의 기호적 실천과 담론≫(공저), ≪이미지, 문자, 해석≫(공저), ≪내러티브와 자아≫(공저), ≪세미오시스의 매체성과 물질성≫(공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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