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의 관점에서 재조명하는 비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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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의 관점에서 재조명하는 비극
  • 이명아 기자
  • 승인 2024.01.20 1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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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이디푸스, 장애인 되다: 장애학자가 들려주는 그리스 비극 이야기 | 박정수 지음 | 그린비 | 272쪽

 

이 책은 비극이라는 단어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 그리스 비극을 ‘장판’(장애운동판) 특유의 전복적이고 유쾌한 시선으로 살핀다. 많은 사람에게 ‘그리스 로마 신화’로 널리 알려진 그리스 비극이 주로 인간의 이야기인 데다 그 내용이 정치적이고 급진적이라는 사실은 비교적 덜 알려져 있다.

저자는 노들장애학궁리소와 노들장애인야학에서 〈장판에서 비극 읽기〉라는 수업을 진행하며 장애인 당사자와 함께 비극 속 장애 이야기들을 읽었다. 그들은 ‘막장 드라마’ 뺨칠 정도로 기구한 비극 속에서, 인물들이 ‘운명애’(amor fati)를 통해 삶의 방향을 스스로 결정하는 것을 발견해 냈다.

비극적인 운명이 주어질지라도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삶은 달라진다. 마침내 장판에서 그리스 비극을 읽는다는 것은 장애인이 자신의 삶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함께 살아가는지 탐구하고, 그에 따른 삶의 태도를 성찰하는 진지하고도 즐거운 작업이 된다.

이 책은 비극에 담긴 ‘운명애’의 순간을 발견한다는 점에서 ‘비극’의 의미를 재구축한다. 슬픈 운명을 받아들이고 자기 삶을 주도하는 운명애의 저항성에 집중하는 것이다. 장애의 관점에서 그리스 비극을 다시 읽는다는 것은, 이처럼 우리가 지금까지 읽어 내지 못했던 정치적이고 급진적인 면모를 발견한다는 의미이다.

올림포스 신 중 가장 소수자와 밀접한 신을 하나 꼽는다면, 단연 디오니소스다. 디오니소스 제전을 묘사한 유물에서는 유독 발기한 곱추나 난쟁이 형상이 많이 등장한다. 이에서 알 수 있듯 그를 따르는 신도 중에는 여성과 장애인이 많았다고 전해진다. 그는 왜 소외된 자들의 신이 되었을까?

디오니소스(Dionysos)의 이름은 ‘두 번(dio) 태어난 자(nysos)’라는 뜻. 인간인 어머니의 몸에서 한 번, 신인 아버지의 몸에서 또 한 번 태어난 그는 신성을 가졌지만 신은 아니었고, 남성이지만 “여자 같은” 모습으로 곧잘 그려졌다. 올림포스에서 유일하게 장애를 가진 신 헤파이스토스를 설득하여 황금 의자에 결박된 헤라 여신을 풀어준 공로로 신이 되기 전까지는 ‘신도 인간도 아닌’ 존재, 즉 체제 바깥에 있는 존재였다.

이런 특성은 억압당하던 소수자들을 포도주와 축제로 위로하고, 강력한 에콜로지 공동체를 이루는 원천이 되었다. 디오니소스 신도들은 ‘마이나데스’라고 불렸는데, 이들은 “여성, 트랜스젠더, 장애인, 노인, 이방인, 부랑인, 노예 등 그리스 사회에서 차별과 모욕 속에 고통받는 소수자”였으며 가부장 체제에 저항하는 이들이었다.

소포클레스의 비극 「안티고네」는 가부장제를 대표하는 인물인 크레온과 대치하는 여인 안티고네를 그린다. 안테고네는 자신의 오라비 매장이 테베의 왕 크레온의 포고령보다 위에 있는 ‘신의 명령’에 따른 것이라고 주장한다. 안티고네의 모습이 “공론장에서 법과 정의의 원칙을 논하는 ‘시민’의 모습”, 즉 가부장제 속의 남성 모습을 띠자, 크레온은 그에 분노하여 안티고네를 동굴에 가둔다.

이 일을 겪으며 안티고네는 “나는 서로 미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랑하기 위해서 태어났”다고 말한다. 그가 보여 준 “같은 어머니의 자궁에서 태어난 혈족에 대한 사랑”은 모계적이고 에콜로지적인 ‘마이나데스’의 사랑이었다. 이처럼 사회 제도로부터 배제되는 소외와 탄압의 경험을 공유한 소수자들은 이 원초적이고 보편적인 ‘사랑’ 안에 연대하였으며, 가부장 제도에 적극적으로 저항했다.

그리스 비극은 자극적이고 통속적인 이야기로 가득하지만, 유흥만을 위한 수단은 아니었다. 아테네 시민에게 비극 공연 관람은 “민회에 참여해서 국정을 토론하고 합의하는 일”의 연장선이었다. 소포클레스의 비극 「필록테테스」에 등장하는 네오프톨레모스는 만성질환 때문에 버림받은 필록테테스를 구할지 고민하다가 관객들에게 묻는다. “어떡할까, 여러분들?” 이처럼 그리스 비극 속에는 정치적 합의가 필요한 문제들이 녹아 있었고, 관람객을 비극 속으로 끌어들임으로써 비극 밖 현실을 보게 하는 장치였다.

이 책 역시 그런 공론장의 역할을 이어 간다. 장애인권운동가들의 현실과 그리스 비극 속 인물들의 서사시를 비교하며 현실의 장애인 문제를 책 속으로 끌어 온다. 프로메테우스가 모든 것을 내다보면서도 자신의 고통을 받아들이고 제우스가 내린 벌을 받는 이야기, 그리고 노들야학의 전 교장 박경석이 장애인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권리의 주체로 나서게 된 이야기를 병치하는 식으로.

소포클레스가 네오프톨레모스의 입을 통해 던진 질문 “어떡할까, 여러분들?”은 당시 전쟁에 참전했던 병사들의 고통과 국가의 이익 사이에서 아테네 시민들은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에 대한 질문이다. 다수의 이익을 위해 소수는 희생해야 하는가? 장애 있는 몸은 그저 버려져야 하는가? 이 질문은 지금, 우리에게도 꼭 필요한 물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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