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현실의 철학적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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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상현실의 철학적 이해
  • 고현석 기자
  • 승인 2024.01.13 1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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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린연단 〈오늘의 세계〉 제25강_ 김상환 서울대 교수의 「가상현실의 철학적 이해」


네이버문화재단의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열 번째 시리즈 ‘오늘의 세계’ 강연이 매주 토요일 네이버 스퀘어 종로에서 진행되고 있다. 여섯 섹션 총 54강으로 구성된 이번 시리즈는 인류 공동체에서부터 개인의 실존에 이르기까지 지금 여기의 어젠다를 새로운 시선으로 담론의 장을 펼친다. 오늘의 사회와 문화 영역에서 일어나는 변화의 추이를 점검해보는 네 번째 섹션 ‘오늘의 사회와 문화’ 제25강 김상환 교수(서울대 철학과)의 강연을 발췌 소개한다.

정리   고현석 기자
사진·자료제공 = 네이버문화재단


가상현실의 철학적 이해


김상환 교수는 “가상현실이 가상과 실재의 구분을 다시 묻게 만든다면, 이 구분의 문제는 결국 ‘세계란 무엇인가?’라는 상위 문제에 봉사하는 하위 질문에 불과”하며 “가상현실이 던지는 궁극의 문제는 결국 세계의 문제, 세계를 어떻게 재개념화할 것인가의 문제”라고 말한다. 그렇지만 가상현실이 “아직도 진화의 초기 단계이므로 이것이 가져올 최종적인 세계 개념은 다만 예감되고 있을 뿐 여전히 미지의 장막 뒤에 꼬리를 감추고” 있기 때문에 그와 관련하여 “어떤 최종적인 설명을 제시한다기보다” 먼저 “그것을 위한 예비적인 두 가지 과제”를 설정한다. 첫째 “가상현실(virtual reality)과 관련된 개념들”, 즉 “the virtual과 관련된 용어들”과 “가상성과 관련된 용어들”을 돌아보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가상현실에 접근하는 몇 가지 세계 이해 모델을 정리하는 것”으로 그 “역사적 순서에 따르자면 ① 아리스토텔레스, 베르그손, 들뢰즈의 생물학 및 역학 모델, ② 라이프니츠의 논리학 모델, ③ 칸트, 헤겔, 보드리야르의 광학 모델, ④ 하이데거, 사르트르의 실존 모델이 그것”인데 “이 네 가지 모델을 차례로 돌아보면서 가상현실 관련 개념들을 검토하고, 이를 통해 가상현실에 접근할 수 있는 다양한 경로를 발굴”해보고자 한다. 

 

지난해 11월 25일, 김상환 교수가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 오늘의 세계>의 25번째 강연자로 나섰다. 사진제공=네이버문화재단

머리말

철학적 관점에서 보자면 가상현실이 일반화되는 시대는 과거의 세계상이 붕괴하고 새로운 세계상이 태동하는 시대다. 온라인 세계와 오프라인 세계가 뒤얽히는 오늘의 역사적 현실은 거기서 태동하는 새로운 세계 이미지를 철학적으로 해명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가상현실은 아직도 진화의 초기 단계이므로 오늘의 강연은 어떤 최종적인 설명을 제시한다기보다 그것을 위한 예비적인 두 가지 과제를 설정해보았다. 하나는 가상현실(virtual reality)과 관련된 개념들을 돌아보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가상현실에 접근하는 몇 가지 세계 이해 모델을 정리하는 것이다.


1. 생물학적 모델의 세계: 아리스토텔레스의 dynamis/energeia 개념

the virtual은 the possible, the potential 같은 용어와 혼용된다. 세 용어는 모두 아리스토텔레스의 dynamis를 번역한 말이다. 보통 잠재태 혹은 가능태로 번역된다.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서 dynamis는 현실태로 번역되는 energeia 혹은 entelekeia와 짝을 이룬다.

아리스토텔레스는 dynamis와 energeia를 두 가지 문맥에서 사용한다. 하나는 운동(kinesis)을 설명하는 문맥이고, 다른 하나는 실체(ousia)를 설명하는 문맥이다. 운동에는 질적 운동, 양적 운동, 장소 이동, 생성 소멸이 포함된다. 실체란 있음, 존재(‘있다’의 명사형)를 의미한다. dynamis와 energeia는 운동을 설명할 때와 실체를 설명할 때 똑같은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다만 유비적인 의미만을 지닐 뿐이다. 운동의 문맥에서 dynamis는 어떤 능력(힘, 기능)을, energeia는 활동을 의미한다. 그러나 실체의 문맥에서 전자는 잠재태나 가능태를, 후자는 현실태를 의미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실체(ousia)는 형상(eidos)과 질료(hyle)로 구성된다. 형상은 사물의 본질, 형식, 기능에 해당한다. 반면 질료는 재료, 내용에 해당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물의 형상을 energeia로, 질료는 dynamis로 정의한다.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에서는 질료에 대해 형상이 우위에 있다. 형상(본질, 형식, 기능)이 먼저 있어야 하며, 그것에 맞추어 질료가 정해지고 조직된다. 질료는 형상에 의해, 형상을 위해, 형상 내에 존재하는 형상의 질료다. 마찬가지로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에서는 잠재태와 능력에 대해 현실태와 활동이 우위에 있다. 

운동론의 문맥에서든 실체론의 문맥에서든 아리스토텔레스는 잠재력이 왕성하게 살아나는 활동성(energeia)에서 사물의 사물다움, 존재의 존재다움, 생명의 생명다움을 본다. 목적, 원인, 의미, 시간(과거와 미래)을 자기 바깥이 아니라 자기 안에 두는 순수한 활동성이 존재론적 탁월성의 기준이자 모든 의미의 원천이다.

 

2. 논리학적 모델의 세계: 라이프니츠의 the possible/the real 개념

라이프니츠에 따르면 천지 창조 이전에 신의 지성 속에는 무한히 많은 가능 세계(possible worlds)가 있었다. 각각의 가능 세계는 두 가지 요건을 갖추어야 한다. 먼저 가능 세계를 이루는 개별 실체(모나드)는 무수한 내용이나 속성들(지각과 욕구들)을 지니는데, 이 속성들 사이에 모순이 없어야 한다. 다른 한편 가능 세계를 이루는 무수한 실체들이 공가능(compossible)해야 한다. 함께 존립하고 결합 가능해야 한다는 말이다.

신은 자신의 지성 속에 있는 무수한 가능 세계 중 최선의 세계를 선택하여 창조했다. 이때 창조는 논리적으로 가능한 추상적 세계에 실존(existence)을 부여하는 일이다. 이런 선택과 창조는 충족이유율을 따른다. 신의 선택과 창조를 설명하는 충족이유율은 최소의 규칙으로 최대의 공가능성을 유도한다는 데 있다. 되도록 적은 법칙으로 되도록 많은 현상을 창출하는 세계가 최선의 세계다. 이런 최선의 세계가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다. 그렇다면 이 창조된 세계 이외의 세계, 신이 선택하지 않는 나머지 가능 세계들은 어떻게 되는가? 그것들은 여전히 존재한다. 그러나 시간 바깥에서, 오직 신의 영원한 사유 속에서 이른바 ‘표상적 실재성(realitas objective)’만을 지닌 채 존재한다. 

그러나 20세기 초 프랑스 철학자 베르그손은 가능성은 현실성과 분리된 채가 아니라 현실성과 더불어 있고, 그렇게 둘은 함께 있으면서 실재성을 이룬다고 보았다. 즉 가능성과 현실성이 실재성을 이루는 두 측면이라는 것이다. 베르그손 철학에서 실재의 한 부분이라는 것은 시간(지속)의 한 부분이라는 것과 같다. 실재적인 한에서 가능성은 현실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둘은 모두 시간 속에 있으며, 그 자체가 시간의 두 양태다. 과거와 현재, 가능성과 현실성이 서로 하나로 겹쳐지고 일체화된다. 그러므로 가능성과 현실성을 구분하거나 분리해서 생각한다는 것은 무의미하다. 게다가 복수의 가능성, 복수의 가능 세계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더욱 터무니없는 일이다.

이 모든 것을 통합적으로 파악한 철학자가 들뢰즈다. 들뢰즈는 생성을 바라보는 두 가지 관점을 날카롭게 대비시켰다. 라이프니츠가 대변하는 논리학적 관점, 그것은 가능성과 실재성을 양분하는 관점이다. 여기서 생성은 형식적이고 추상적인 가능성이 현실적 내용을 획득하여 실재성을 획득하는 과정, 곧 실재화(realization)가 된다. 이런 실재화에 해당하는 생성은 두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는 그것이 순간적으로, 단번에 일어난다는 것이다. 가능성은 순간적으로 실재성을 띠고 시공간 속에 존재한다. 둘째, 실재화를 통해 시공간 속에 존재하게 된 사물은 그 바깥의 가능 세계에 있던 것과 닮은 꼴을 취한다. 

 

반면 베르그손이 대변하는 질료-역학적 관점, 그것은 가능성과 실재성을 나누지 않는 불이(不二)의 관점이다. 여기서 생성은 실재의 내용적인 가능성이 형식적인 가능성을 잉태하며 자기를 펼쳐가는 현실화(actualization)다. 실재화에서 가능성은 실재성의 바깥에 놓이지만, 현실화에서 가능성은 실재성의 안쪽에 놓인다. 이렇게 실재성 안쪽에 놓인 가능성, 다시 말해서 이미 실재적인 가능성을 들뢰즈는 잠재적(virtual)이라 부른다.

그러므로 생성을 정확히 정식화하자면, 그것은 잠재성의 현실화다. 이런 잠재성의 현실화는 가능성의 실재화에 비하여 두 가지 특징을 띤다. 첫째, 실재화가 단숨에 일어나는 순간적 사건이라면, 현실화는 변이하는 리듬에 따라 진행되는 과정이다. 둘째, 실재화에서는 가능한 것과 실재적인 것이 닮은 꼴을 하고 있다면, 현실화에서 잠재적인 것과 현실적인 것은 닮지 않는 게 정상이다. 현실화는 계속되는 분화 및 변형의 과정이므로 처음에서 멀어질수록 모습이 달라진다.

헤겔 철학에서 현실화는 씨앗이 발달 및 성숙하여 만개(滿開) 상태에 도달하고, 거기서 다시 처음의 씨앗으로 돌아가는 과정과 같다. 그것은 추상적인 것이 구체성을 띠어가는 과정, 무의미한 것이 의미를 획득하는 과정, 오류가 걸러지고 다듬어지는 성숙의 과정이다. 현실화는 마지막에 가서야 완성되고, 그 완성 지점에서 처음에 주어진 가능성이 총체적으로 실현된다. 그러나 들뢰즈 철학에서는 반대다. 3단계 절차를 밟는 들뢰즈의 현실화는 일종의 빈곤화 과정이다. 이는 세 가지 관점에서 그렇다. 첫째, 잠재적인 역량, 특히 강도적인 힘은 완전히 현실화되지 않는다. 단지 일부만 현실화될 뿐이어서 현실적인 세계는 빙산의 일각처럼 거대한 잠재적 세계를 감추고 있다. 둘째, 현실화는 잠재적 역량의 내적 차이가 해소되는 동질화 과정, 활력적인 역동성이 감소하는 정태화 과정, 비유기적인 힘이 조직되는 유기화 과정이다. 셋째, 현실화된 요소들(질과 양, 종과 기관)은 본래의 생명력에 해당하는 잠재력 역량과 분리되어 곧 시들어버리게 된다.

들뢰즈는 헤겔과 마찬가지로 생명을 철학적 사유의 중심에 두었다. 그러나 그들이 생각하는 생명력의 현실화 과정은 완전히 반대로 이해된다. 헤겔은 현실화를 풍부화 과정으로, 그러나 들뢰즈는 빈곤화 과정으로 바라본다. 두 철학자는 생명의 이미지 자체부터 다르게 설정한다. 헤겔이 생명력을 유기적인 조직화 능력으로 파악할 때, 들뢰즈는 비유기적인 역량으로 바라본다. 그리고 유기적 조직화를 본래의 생명력이 소외 및 왜곡되는 과정으로 본다.

 

3. 실존적 모델의 세계: 하이데거의 the possible/the factual 개념

생물학적 모델과 논리학적 모델의 차이는 결국 가능성을 추상적이고 형식적인 가능성으로 설정하느냐 아니면 힘이나 질료와 같은 내용적 가능성으로 설정하느냐 하는 데 달려 있다. 나머지 두 모델, 실존적 모델과 광학적 모델의 차이는 가능성을 시간적 가능성(미래적 가능성)으로 보느냐 아니면 공간적 가능성(가시적 가능성)으로 보느냐 하는 데 달려 있다.

가능성을 시간적 문맥에서 정의하는 시도는 칸트에게서 시작한다. 『순수이성비판』(1781)에서 칸트는 지성의 선험적 범주를 분류하고 설명할 때 모든 범주의 특성을 시간성의 도식에 따라 서술한다. 칸트의 범주표에서 가능성은 —현실성 및 필연성과 더불어— 양상 범주에 속한다. 그렇다면 가능성, 현실성, 필연성은 각각 어떤 시간성의 도식에 의존하는가? 칸트에 따르면 현실성의 도식은 일정한 시간 중의 현존이다. 필연성의 도식은 모든 시간에 있어서 현존한다는 데 있다. 이에 비하여 가능성은 이때든 저때든 “어느 한 시간 중에 규정한다는 뜻”이다. 가능성이란 언제나 임의적으로 설정할 수 있는 이러저러한 순간의 가능성이란 것이다.

칸트에게 가능성은 현실성이나 필연성 못지않게 선천적인 시간 규정(도식) 아래에서만 감성적 직관과 맞물릴 수 있다. 칸트 이후 시간성의 문맥에서 가능성에 접근한 철학자가 하이데거다. 칸트가 가능성을 포함한 선험적 범주 일반을 시간성의 도식에 종속시켰다면, 하이데거는 존재 이해를 시간 이해와 동일화했다. 이 점은 특히 가능성을 시간적인 가능성 혹은 미래적 가능성으로 해석할 때 잘 드러난다. 그러나 하이데거의 가능성은 시간적 가능성이되, 그 시간적 가능성은 다시 실존적 가능성의 한 측면에 불과하다. 실존적 가능성에 여러 가지 얼굴이 있고, 그중 하나가 미래적 가능성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실존적 가능성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현존재(Dasein, ‘세계 내 존재’인 실존적 주체)의 자기 관계, 더 정확히 말해서 현존재의 자기 이해 속에서 발견, 선택, 기투되는 가능성이다.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1927)에서 실존(Existenz)은 현존재가 자기 자신과 관계하는 모습이다. 자기가 누구인지 스스로 알고 이해하는 측면에서 바라본 현존재의 얼굴, 그것이 실존이다. 그런데 하이데거의 실존적 자기 이해에서 중요한 점은 그 자기 이해가 가능성의 수준에서 성립한다는 데 있다. 

현존재가 자기와 관계한다는 것은 어떤 가능성의 관점에서 자기를 발견하거나 상실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가능성의 관점에서 어떤 것과 관계하는 움직임을 하이데거는 이해(Verstehen)라 부른다. 실존적 가능성은 이해의 상관 항이다. 현존재는 이해의 주체로서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주체라기보다 가능적으로 존재하는 주체다. 이해가 가능성과 관계한다면, 그 관계는 기투의 구조 속에 이루어진다. 그리고 기투의 구조 속에 이루어진다는 것은 미래를 중심으로 이루어짐을 말한다. 기투란 미래를 중심으로 가능성에 관계하는 것이고, 그런 미래적 가능성에 대한 기투적 관계가 고유한 의미의 이해다. 

 

현존재의 이해가 항상 가능성의 이해라면, 그 가능성의 이해는 기투적 구조를 지닌다. 그런 기투적 구조 속에서 현존재가 이해하는 가능성은 미래의 도래 가능성이다. 즉 무엇을 이해한다는 것은 무엇을 할 수 있다는 것이고, 무엇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무엇이 될 수 있다는 예감이자 확신이다. 현존재가 실존적 자기 이해에 있어서 어떤 가능성(존재 가능 혹는 가능 존재)으로 존재한다면, 그 가능성은 어떤 실무 능력(할 수 있음)으로서의 가능성이되, 그 가능성은 다시 미래에 대한 비전과 확신을 동반하는 가능성이다.

“현존재는 자기 자신에게 맡겨진 가능 존재이며, 철두철미 피투적 가능성이다. 현존재는 가장 독자적인 가능성을 향한 자유 존재로서의 가능성이다.” 기투는 언제나 상황에 의해 제약된 피투적 기투일 수밖에 없다. 기투적 가능성은 동시에 피투적 가능성이기도 하다. 하이데거는 현존재가 내던져진 상태(피투의 상태)를 현사실성(Faktizität)이라 부른다. 기투는 현사실성의 제약 속에 간파된 가능성을 자유롭게 선택하는 능력이자 그것을 실현할 목적을 설계하는 능력이다. 실존적 자유는 이런 피투적 기투에 뿌리내린다.

그러나 하이데거 철학에서 세계는 도구의 연관 체계 이상의 것이다. 그것은 무엇보다 과거와 미래가 현재 속에서 끝없이 서로를 자극하는 역사적 삶의 공간이다. 이 점에서 세계는 이야기의 공간이라 할 수 있다. 과거의 기억, 미래의 기대가 현재의 기투적 행위를 유발하는 동시에 현재의 기투적 행위를 통해 재조직되는 역사적 삶의 공간, 그것이 현존재의 존재 방식을 구조화하는 세계라면, 그 세계는 이야기를 통해서만 접근하거나 풀어낼 수 있는 세계다.

실존적 기투는 경험적 계획을 정초하고 지도하는 근원적 계획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경험적이든 근원적이든 계획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좁은 의미에서 그것은 미래의 그림을 그린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서 과거, 현재, 미래에 일관성을 부여하고 내일의 방향과 구도를 설정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가능성을 기투한다는 의미이고, 이 점에서 기투는 기도(企圖)와 같다. 미래의 도식을 그리기. 기투는 여기서 시작한다.

그런데 역사적 삶의 도식은 선이나 형태를 가지고 그리는 것도, 색으로 그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그것을 오로지 말로 그릴 수 있고, 그렇게 말로 그려진 삶이 바로 이야기다. 매킨타이어에 따르면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 “나는 어떤 이야기들의 일부분인가?”라는 물음에 답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이런 두 물음의 관계가 경험적 계획과 기투(실존적 계획)의 관계에 그대로 대응한다고 볼 수 있다. 목적을 설계하고 실현 계획을 세우는 일이 실존적 기투에 기초한다면, 실존적 기투는 서사적 기투에 가깝다. 기투를 통해 포착, 유지, 실현되는 가능성은 서사적 가능성과 구별하기 어렵다.

 

4. 광학적 모델의 세계: 헤겔의 현상학과 가상 개념

광학적 모델은 오늘날 메타버스로 진화하는 가상현실이 시각 우위의 세계이자 이미지 우위의 세계임을 고려할 때 반드시 살펴봐야 할 모델이다. 가상과 실재를 어떻게 구별하고 현상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가? 가상성 논쟁의 역사 전체에서도 가장 풍요로운 유산을 남긴 시기가 헤겔의 『정신현상학』(1806) 출간 전후다. 당시 가상에 관한 관심은 현상학(Phänomenologie)이라는 말을 처음 만든 람베르트에 의해 촉발되었다. 이때 가상(Schein)은 이중적 의미를 지닌다. 사물의 진상과 반대되는 가짜 이미지란 뜻도 있지만, 본질이 자신을 드러내는 현상이란 뜻도 있다. 람베르트의 현상학에서도 가상은 일방적으로 참이거나 거짓이 아니다. 다만 참과 거짓의 중간에 놓인 어떤 것이고, 그렇게 중간에서 가상과 실재를 연결해주는 교량에 해당한다.

이런 가상에 대한 이론을 람베르트는 현상학이라 불렀는데, 이 새로운 학문은 17세기 이래 철학자들의 관심을 받아온 광학에서 영감을 얻었다. 광학은 시각적 원근법의 원리를 탐구한다. 원근법의 원리를 정확히 알면 우리는 하나의 이미지에서부터 그 사물의 원래 모습을 찾을 수 있다. 거꾸로 한 사물에서부터 관점에 따라 생겨날 서로 다른 형태의 이미지를 예상할 수도 있다. 그런데 람베르트는 광학을 일반화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단지 시각적 가상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모든 종류의 감각적 가상, 그리고 심리적ㆍ도덕적 차원의 가상을 다루는 원근법을 생각했다. 그리고 그런 일반적 원근법을 현상학이라 불렀다. 초월적 원근법 혹은 초월적 광학에 해당하는 학문이 현상학인 것이다. 현상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의 과제가 진리와 가상의 관계를 밝히는 데 있고, 이를 바탕으로 학문적 인식 전체의 체계를 수립하는 데 있다.

헤겔의 현상학은 람베르트의 현상학과 닮은 데가 있다. 둘 모두 경험에서 나타나는 현상을 통해 진리에 도달하려는 계획이다. 그러나 차이도 크다. 헤겔의 현상학은 현상을 통해 진리에 도달하되 기나긴 여정을 거쳐 점진적으로 도달하는데, 정확히 이런 측면에서 람베르트의 현상학과 크게 구별된다. 또한 람베르트는 현상과 실재를 분리하여 설정하고 양자 사이의 거리를 전제했다. 그리고 현상의 참과 거짓을 판정할 기준을 현상 바깥의 실재에 두었다. 그러나 헤겔에게서 기준은 현상(경험) 자체 안에 있다. 현상과 실재(본질)는 둘이 아니라 하나가 된다.

현상이야말로 피안으로서의 내면이 지닌 본질로서, 사실상 그 피안을 충만케 하는 것이다. 초감성적인 것은 참으로 있는 그대로 정립된다면 감각적이거나 지각된 것인데, 이런 것의 진리는 현상 속에 있다. 그러므로 초감성적인 것[=본질적인 것]은 현상이며, 현상으로서 존재한다.이런 불이(不二)의 논리는 『정신현상학』보다는 이후에 출간되는 『논리학』이나 『미학 강의』에서 자주 역설된다. 이런 저작에서 가상(Schein)이나 가현(Scheinen)은 “본질의 본질”로 정의된다. 즉 현상하지 않는 본질은 본질일 수 없다는 것이다. 나타나고 가시화된다는 것이 본질의 본질적 속성이다. 가상 그 자체가 본질에 본질적이다. 

 

헤겔의 『논리학』은 본질에 본질적인 나타남의 운동을 반성(Reflexion)이라 부른다. 헤겔은 『정신현상학』에서부터 반성을 절대자(개념, 생명, 힘)의 운동 구조로 정식화했다. 그리고 그 반성의 운동 구조를 다시 이중 부정에 해당하는 “자기 관계적 부정(die sich auf sich beziehende Negation)”으로 정식화한다. 반성의 논리나 자기 관계적 부정(이중 부정)의 논리는 불이(不二)의 논리다. 가상과 실재, 현상과 본질은 외면적으로 분리되거나 서로 대립하기만 하는 둘이 아니다. 서로 비추고 의존하고 자극하는 가운데 하나를 이룬다. 그러나 이것은 모든 차이나 대립이 사라지는 하나가 아니다. 헤겔의 논리학은 불이를 가르치면서 동시에 불일(不一)을 역설한다. 반성의 운동 속에서 가상과 실재의 대립이 소멸하되 다른 차원에서 형태를 바꾸어 다시 등장한다.

우리는 이런 것을 「매트릭스」 같은 영화에서 본다. 가상현실 속에서 다시 가상현실이 열리는 영화들. 이런 영화들을 통해 유명세를 더한 책이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1981)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디지털 매체 시대의 이미지를 시뮬라크르(simulacre)라 부른다. 시뮬라크르는 원본 없는 이미지, 실재보다 더 실재적인 이미지, 실재를 삼키고 소멸시키는 이미지다. 시뮬라시옹(simulation)은 그런 원본에서 해방되어 자율성을 획득한 이미지가 자기 자신을 복제 및 증식하는 운동을 가리킨다.

보드리야르는 디지털 매체 시대가 곧 시뮬라크르의 시대임을 역설한다. 시뮬라크르의 시대에는 가상과 실재, 현상과 본질의 경계가 완전히 무의미해지거나 사라진다. 이 점에서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은 헤겔의 반성(반조)과 유사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차이 또한 크다. 한마디로 시뮬라시옹의 논리는 불이의 논리이되 전일(全一)의 논리다. 반면 반성의 논리는 불이의 논리이되 불일의 논리다. 

실재뿐만 아니라 세계 자체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실재 세계라는 근본적 환상이 자리한다. 「매트릭스」 같은 영화가 그리고자 하는 것이 이런 상황이다. 이는 불이의 논리가 전일의 논리로 전도되어 일어난 허무주의적 귀결이다. 디지털 매체 시대, 가상현실이 일반화되는 시대에는 기본적으로 가상과 현실이 둘이 아니라는 믿음이 일반화되어갈 수밖에 없다. 삶과 문화가 양자 사이에서 복잡하게 얽혀들어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불이의 논리는 또 하나의 양자택일의 과제를 남겨놓는다. 불이의 논리가 전일의 논리와 짝을 이룰지, 아니면 불일의 논리와 짝을 이룰지를 두고 선택해야만 하는 것이다.

 

☞ 강연 바로보기: [열린연단]_ 가상현실의 철학적 이해 (김상환 서울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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