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리적 논거 통한 열린 시각으로 고대사 바라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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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리적 논거 통한 열린 시각으로 고대사 바라봐야
  • 홍성화 건국대·사학
  • 승인 2024.01.07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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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에세이]

요즘 인터넷이나 유튜브를 보다 보면 깜짝 놀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우리의 고대사를 이야기하는 중에 고구려의 광개토왕(廣開土王)이 일본 열도로 건너가서 일본을 공격했다든지, 일본 열도는 고구려, 백제, 신라 등의 나라에 의해 점령당했다든지 하는 검증되지 않은 내용들이 난무하고 있기 때문이다. 급기야는 기존 역사학자들을 일본의 대표적 역사왜곡인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을 추종하는 친일식민사학자로 매도하고 있기까지 한다. 

주지하다시피 유튜브는 조회수를 늘려야만 수입을 얻을 수 있는 구조로 되어 있기 때문에 어떻게든 센세이셔널한 내용으로 치장하려는 과욕이 이러한 상황을 만들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일반인들이 이러한 내용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다면 그릇된 역사상을 가질 수도 있는 것이기에 무척 우려되는 상황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역사에 대한 논쟁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기존의 통설적인 견해가 모두 역사적 사실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닐 수도 있기 때문에 비판적 사고는 필요한 것이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엄정한 사료비판을 전제로 한 상태에서 합리적인 논거를 통해 역사를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현재 각종 인터넷이나 유튜브에서 연출되고 있는 상황은 논쟁이라기보다는 역사를 깊이 성찰하지 않고 과도한 극우주의에 경도된 이들에 의한 선동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과거 일제 식민지하에 있었던 데에 대한 앙갚음을 고대사에 투영시켰다고 해야 할까? 

이러한 주장의 중심에는 고대 한일관계에 대한 잘못된 인식과 『일본서기(日本書紀)』에 대한 몰이해가 자리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일본서기』는 일본의 사서이니 『일본서기』에 나오는 지명은 모두 일본 열도 내에서 찾아야 하고 『일본서기』를 인용하면 식민사학자라는 프레임을 걸어 일반인들을 선동하고 있는 형국이다.

그렇다면 과연 『일본서기』를 인용하면 식민사학자인 것인가?

『일본서기』는 일본의 고대사를 기록한 역사서로 우리나라로 치자면 『삼국사기』와 비교해볼 수 있는 책이다. 그런데 『일본서기』에는 우리의 기록에 나오지 않는 한반도 관계 기사가 다수 등장하고 있는 것이 눈에 띈다. 특히 우리나라에 전해지지 않는 「백제기(百濟記)」, 「백제본기(百濟本記)」, 「백제신찬(百濟新撰)」이라는 소위 ‘백제 3서’도 등장한다. 이처럼 한반도의 사료가 많이 등장하는 것에 대해서는 원래 백제에 있었던 사료가 백제 멸망 후 백제 유민들에 의해 왜국으로 전해졌기 때문인 것으로 보고 있다. 

이렇듯 우리의 사서에 나오지 않는 한반도 관계 기록을 많이 싣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구도 상에 있어서는 일본이 한반도의 나라들보다 항상 우위에 자리하고 있다. 예를 들면 고구려나 백제, 신라는 전부 일본에게 조공을 바치는 나라로 되어 있고, 일본이 한반도의 일부 지역을 점유하거나 백제에게 한반도의 땅을 하사하는 내용도 보이고 있다. 그러다 보니 일각에서는 우리나라와의 관계 설정 등에 있어서 허무맹랑한 내용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위서(僞書)로 치부하는 사람까지 있는 실정이다.

그렇다면 『일본서기』는 위서인가? 

만약 지금의 사람이 과거에 쓴 것처럼 가공해서 책을 만들면 그것을 위서라고 한다. 하지만 『일본서기』는 현재의 누군가가 허위로 쓴 것이 아닌 720년경에 쓰인 책으로 판단하고 있기 때문에 위서로 보고 있지는 않다. 다만 720년경에 쓰였는데 그것이 당시 일본의 번국(蕃國)사관에 의해 일본중심적인 입장으로 왜곡 서술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일본서기』 편찬의 배경이 되는 시기는 7세기 후반이다. ‘일본(日本)’이라는 명칭이나 ‘천황(天皇)’이라는 칭호가 처음 만들어진 시기를 7세기 후반으로 보고 있는데, 이때는 알다시피 한반도에서 삼국통일 전쟁이 일어난 이후 신라에 의해 대대적으로 체제가 정비되던 시기였다. 일본의 경우도 이 시기 천황이나 황족을 중심으로 한 전제정치를 목표로 하여 율령제에 의한 중앙집권 국가 건설에 주력했다. 그런 측면에서 천황의 지위가 절대화, 신격화되었는데, 이러한 때에 편찬되었던 것이 『일본서기』였다. 

필자는 종종 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 이러한 질문을 하곤 한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역사책이 진실을 얘기해주고 있는 것일까?’ 만약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역사책이 진실이라고 한다면 필자와 같이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은 밥 굶어 죽을 수밖에 없다. 왜? 그 책의 내용만 읽어보면 그것이 곧바로 진실이기 때문에 추가적으로 또 다른 연구를 할 필요가 없으니까. 하지만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역사책이 진실이 아닐 수도 있기 때문에 그것을 검증하는 사람이 필요한 것이다. 그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 바로 역사가인 것이다. 

역사책이라고 하는 것에는 우선 당대 역사를 서술하는 사람의 사관이나 입장, 생각들이 반영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당대에 잘못 인식한 내용이라든지, 과거에서부터 전해진 잘못된 글들 또한 포함될 수 있다. 따라서 역사책들 중에는 작성자의 정치적 의도나 개인적 명예심, 이해관계에 의해 사실이 왜곡되거나 조작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과거 우리나라 1970~80년대의 신문과 방송들은 정부나 계엄사의 통제로 보도 지침에 따라 기사의 내용이나 편집 방향이 결정되었다. 따라서 당시의 역사를 서술하고자 할 때에는 이러한 사실을 제대로 알고 있어야만이 신문 기사의 밑바탕에 깔려 있는 의미를 파악할 수 있으며 그렇게 해야만이 당시의 역사를 올바르게 구현할 수 있게 된다.

결국 역사책에 쓰인 진술이 신빙성 있는 것인지를 분석하여 그 증거 능력을 밝혀내는 작업이 필요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선별하는 작업이 필요한 것이며 『삼국사기』에 단 한 줄 씌어 있는 것만을 보고 사실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여타 다른 자료와의 비교, 검토를 통해 과연 그 기술이 신빙성이 있는 것인지, 타당한 것인지를 검토해야만 한다. 

고대 일본의 야마토 정권은 일본 열도를 통합하기 위해 4세기 이래 백제를 비롯한 한반도의 국가로부터 우수한 선진문화를 받아들였다. 결국 이러한 결과로 야마토 정권은 고대국가를 완성할 수 있었지만, 백제가 패망한 이후 위기상황에 빠지게 되었고 그러던 중에 율령국가를 추진하게 되면서 신라를 적대시하고 자신들이 한반도보다 우월했다는 인식으로 바뀌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서기』에 보이는 한반도 관계 기록은 그 자체를 역사적 사실로 볼 수는 없지만, 본래 백제계통의 원사료로부터 개변(改變)된 것이므로 그 안에서 왜곡된 내용을 걷어내게 되면 당시의 역사적 사실을 찾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예를 들어 무령왕 탄생 전승과 계보의 경우는 『일본서기』 속 ‘백제 3서’의 원사료가 비교적 사실에 바탕을 둔 기록으로 이루어졌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삼국사기』에는 백제의 제25대 무령왕(武寧王)이 제24대 동성왕(東城王)의 둘째 아들로 기록되어 있다. 이에 반해 『일본서기』에 인용된 「백제신찬」에는 무령왕과 동성왕을 곤지(昆支)의 아들로 위치시키고 있다. 어느 기록이 맞는 것일까?

이에 대한 단서는 1971년 공주에서 발견된 무령왕릉에서 찾을 수 있다. 무령왕릉 지석(誌石)에 따르면 무령왕은 523년 62세에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다. 「백제신찬」에도 무령왕이 태어난 해를 461년(신축년)이라고 적고 있으니 이는 무령왕릉 지석에서 도출된 연도와 동일한 셈이다. 

『일본서기』에서는 무령왕보다 앞서 즉위한 동성왕에 대해 곤지의 둘째 아들로 479년 왜국에서 귀국하여 즉위할 때의 연령을 유년(幼年)이라 적고 있다. 어디까지를 유년으로 보아야 할지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을 수 있지만 대개 13∼15세를 기준으로 하게 되면 동성왕은 465년 이후에나 출생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동성왕이 461년에 출생한 무령왕보다 나이가 어렸다는 것이다. 

동성왕은 461년경 곤지가 왜국에 파견되어 정착한 이후에 태어났다고 되어 있기 때문에 연령적으로 무령왕보다 아래일 확률이 높다. 이는 곤지의 둘째 아들이 동성이었다는 「백제신찬」의 기록을 통해서도 첫째 아들이 무령이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를 통해 보면 『삼국사기』에서 무령왕이 동성왕의 둘째아들이라는 기록은 타당성이 없고 오히려 『일본서기』내 「백제신찬」의 계보가 더 정확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본서기』에 나오는 한반도 관련 지명을 일본 열도 내에서 찾아야 한다는 주장의 경우도 일본 열도 거의 대부분을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등의 나라가 점령하였다는 그릇된 인식 속에서 나온 것이다. 이 주장은 1960년대 북한의 김석형(金錫亨, 1915~1996)이 발표했던 ‘분국론(分國論)’을 그 근저에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분국론은 1960년대 김일성종합대학교 교수를 지냈던 김석형이 그동안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였던 ‘임나일본부설’에 대해 경종을 울렸던 가설이다. 사실 해방 이후에도 일본의 임나일본부설에 대해 이렇다 할 반박을 하지 못했던 것이 우리의 현실이었다. 

이때 김석형은 ‘삼한삼국의 일본열도 내 분국에 대하여’라는 논문을 통해 삼한과 삼국의 한반도인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열도 내에 분국(分國)을 건설했다는 이론을 발표했다. 즉, 고대 한반도에 있던 나라들이 일본으로 넘어가 일본에 같은 이름의 나라를 세웠다는 것이다. 이후 이러한 내용은 『초기조일관계연구』라고 하는 단행본을 통해 고고학과 신화학 등을 분석하여 체계화되기에 이른다.

예를 들면 임나일본부설의 증거 자료로서 언급되는 것 중에 하나가 5세기 중국의 『송서(宋書)』 왜국전(倭國傳)의 기록이다. 중국 남조 송나라의 역사책인 『송서』에는 왜와 교류를 하면서 왜왕이 ‘왜 백제 신라 임나 가라 진한 모한 제군사 왜국왕(倭 百濟 新羅 任那 加羅 秦韓 慕韓 諸軍事 倭國王)’이라는 관작(官爵)을 인정해줄 것을 송나라에게 요청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에 송에서는 백제는 제외했지만, 나머지 지역, ‘왜 신라 임나 가라 진한 모한 6국 제군사(倭 新羅 任那 加羅 秦韓 慕韓 六國 諸軍事)’의 칭호를 내리고 있다. 이러한 기록을 근거로 일본의 학자들은 당시 한반도 남부에 대한 왜의 지배권을 중국이 인정했던 것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김석형은 당시 왜왕권이 작위를 받았다는 신라, 가야, 임나, 진한, 모한 등의 나라들이란 실은 한반도에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각각의 나라에서 건너온 이주민이 같은 이름으로 일본 열도 내에 건국한 분국이었다는 분국론을 주장한 것이다. 즉, 삼국 이전의 삼한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한반도인들이 정치, 군사적 거점을 구축하고, 본국과 같은 이름의 일본 열도 분국을 만든 후 일본 열도의 통일과정을 보여주는 것이 『송서』의 내용이며 일본 내에 있는 가야의 분국에 설치한 것이 임나일본부라 주장한 것이다. 임나일본부를 한반도가 아닌 일본 열도 내에 있는 것으로 설정을 바꿔버린 것이었다.

처음 주장한 1960년대 당시 이는 대담한 가설로서 일본 열도를 충격에 몰아넣기까지 했다. 그동안 일본 내에서 펼쳐진 고정관념을 깨고 수많은 연구와 분석을 통해 고대 한일관계를 새롭게 성찰하는 계기를 마련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문헌적으로나 고고학적으로 분국론의 내용을 실증할 만한 증거가 나타나고 있지 않고 많은 부분이 현실에 부합하지 않아 사실로 보고 있는 학자들은 없다. 한반도로부터 일본 열도에 많은 이들이 건너왔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이 같은 이름의 나라를 세웠다는 증거는 없다. 김석형 또한 직접 일본 열도를 조사했던 것이 아니라 몇몇 유물, 유적 관련 자료를 중심으로 구상했던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이론을 역사적 사실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일본에서는 고대 한일관계의 연구사를 거론할 때 김석형의 분국론이 빠지는 경우는 없다. 그만큼 당시 일본인들이 받은 충격이 대단했다는 것을 암시한다. 따라서 현재 분국론은 그 사실 여부보다는 근대 일본역사학의 반성을 촉구하고 새로운 인식으로 한일관계를 바라보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을 뿐이다.

필자는 지난 30여 년간 일본 열도를 돌아다니면서 가장 많은 한반도 관련 유적을 찾아다닌 몇 안 되는 한국인 중에 한 사람이다. 일본의 역사 왜곡을 바로 잡기 위해 몸소 일본 열도를 찾아다니면서 많은 연구 성과도 도출하였지만, 일본 열도 어느 곳에도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가 국가를 만들었다는 증거는 없었다. 

일본 열도에서 한반도 관련 유적, 유물이 발견되는 것을 보고 이것이 한반도인이 건너가서 세웠던 국가의 흔적으로까지 확대 해석할 수는 없다. 이는 거꾸로 한반도에서 일본 계통의 유물이 발견되었다고 해서 일본이 한반도를 지배했다고 볼 수 없는 것과 같다. 고대 한반도와 일본 열도의 상호교류 속에서 나타난 산물을 곧바로 지배와 피지배의 사관으로 보려고 하는 것은 잘못된 인식이다. 이러한 인식은 과거 식민사관 속에서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했던 사람들이 한일관계를 지배와 피지배의 사관으로 보았던 것과 동일한 오류를 범하고 있다. 근거도 없이 마음 속 소망만은 일본을 지배하고 싶다는 욕망이 판을 친다면 황국사관에 젖어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고 하는 일본 극우주의의 식민사관과 무엇이 다른 것인가?

그동안 우리 학계의 고대사 연구는 과거 일본이 설정해놓은 식민사관을 탈피하는 과정을 통해 지금까지 성장해왔다. 더욱이 『일본서기』를 통한 고대사의 재해석을 통해 임나일본부설의 부당성을 입증해왔고 이는 일본학계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서기』를 통한 고대사의 해석과 관련해서는 아직 미진한 부분이 있으며 지금까지의 통설적 해석에 대해서도 문제점이 부각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점이 유튜브 등에서 그릇된 역사상을 설파하는 데에 빌미를 주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필자도 칠지도(七支刀)에 대한 해석과 기문(己汶), 임나 4현 등의 지명 비정과 관련해서 통설과 다른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런 만큼 기존 역사학자들도 통설에만 집착할 것이 아니라 『일본서기』에 대한 치밀한 분석과 연구를 통해 좀 더 열린 시각으로 역사를 바라다보아야 할 것이다.

 

홍성화 건국대·사학

건국대학교 글로컬캠퍼스 교양대학 교수. 연세대를 졸업하고 고려대학교 사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충청북도 문화재위원회 전문위원, 동아시아비교문화연구회 회장, 동아시아고대학회 부회장, 예성문화연구회 부회장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는 『한일고대사 유적답사기』, 『왜 5왕』, 『칠지도와 일본서기: 4~6세기 한일관계사 연구』, 『일본은 왜 한국역사에 집착하는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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