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 따른 美의 음차 … měi, mî, bí, mu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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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에 따른 美의 음차 … měi, mî, bí, mui?
  • 연호탁 가톨릭관동대·영어학
  • 승인 2020.04.05 1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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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획연재: 연호탁의 ‘말로 푸는 역사 기행’ (12)_ <美珍香>은 미진향으로 읽어야 할까? Měizhēnxiāng 아니면 Bí-chin-hiang으로 읽어야 할까?


오늘은 2020년 4월 1일이다. 여느 해 같으면 도처에 벚꽃이 화려하게 피어나고, 사람들은 우스갯소리나 거짓말을 늘어놓으며 시답잖은 세상사를 조롱할 것이다. 그런데 코로나바이러스가 사람들의 미소를 빼앗았다. 불안한 나머지 답답하고 짜증이 난다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이탈리아에서는 사망자 수가 1만1천 명을 넘었다고 한다. 전쟁도 아니고 눈에 보이지도 않는 바이러스의 위력이 대단하다. 이런 침울한 상황 하에서 글을 쓰는 게 온당한가? 괜히 마음에 걸려 유치한 변설을 늘어놓으며 나는 글쓰기를 계속한다.

내가 몸담고 있는 대학은 강릉에 있다. 이곳에 강릉김씨 시조 김주원 공의 무덤이 있다. 그는 본디 경주김씨였으나 왕위계승전에서 밀려 강릉을 식읍으로 받고 이곳에 와 회한의 삶을 살다가 누구나처럼 세상을 버린 모양이다.

강릉 출신은 아니지만, 본관이 강릉김씨인 조선 세조, 예종, 성종 대의 문인 김시습이 있다. 소리 없이 피는 꽃, 은은한 향기가 되레 사람을 취하게 하는 매화를 좋아해선가 그의 호는 梅月堂이다. 춘향 모친은 月梅요, 내가 아는 어떤 중국 소녀는 冬梅고, 一枝梅라는 멋진 이름의 의적도 있다. 매월당이 세사에 낙담하고, 사람에 정을 못 붙이고, 여기저기 정처 없이 떠돌아다닐 때 쓴 시에 <달밤에 옥피리 소리를 듣다(月夜聞玉笛新羅舊物)>가 있다. 계림(鷄林) 즉 경주에서 지은 것인데, 여기서 옥피리의 곡조를 사뇌조(詞腦調)라 하고 그 노래를 라후가(羅候歌)라 하였다. 詞腦는 調가 아니라 歌와 합쳐져 사뇌가란 말만 기억에 남아 있다. 도대체 詞腦가 뭐고, 羅候는 또 뭘까? 이들에 대해서는 다음에 짚어보기로 한다. 다만 태양을 가리키는 우리말에 해와 수리가 있고, 라도 있음을 미리 말해 둔다.

▲ 김시습 초상화
▲ 김시습 초상화

말 난 김에 강릉이 본관인 김시습은 약관인 21세 때인 1455년(세조 1) 수양대군(首陽大君, 세조)이 난을 일으켜 조카를 폐위하고 왕위를 찬탈했다는 소식을 듣고, 3일간 통곡을 한 뒤 보던 책들을 모두 모아 불살라 버리고는 스스로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어 전국 각지를 유랑하였다.

사육신이 처형되던 날 밤 한양성 내 모든 사람이 두려움에 몸을 떨고 있을 때 거리에서 거열형(車裂刑)에 처해진 사육신의 시신을 바랑에 주섬주섬 담아다가 노량진 가에 임시 매장한 사람이 바로 김시습이었다고 전한다. 스물한 살 나이에 비해 담대함이 존경스럽다. 이후 그는 관서지방을 유람하며 역사의 고적을 찾고 산천을 보면서 많은 시를 지었다. 『매월당집』 「탕유관서록(宕遊關西錄)」 발문에서 그는 방랑을 시작한 동기를 다음과 같이 전한다.

나는 어려서부터 성격이 질탕(跌宕)하여 명리(名利)를 즐겨하지 않고 생업을 돌보지 아니하여, 다만 청빈하게 뜻을 지키는 것이 포부였다. 본디 산수를 찾아 방랑하고자 하여, 좋은 경치를 만나면 이를 시로 읊조리며 즐기기를 친구들에게 자랑하곤 하였지만, 문장으로 관직에 오르기를 생각해 보지는 않았다. 하루는 홀연히 감개한 일(세조의 왕위찬탈)을 당하여 南兒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道를 행할 수 있는데도 출사하지 않음은 부끄러운 일이며, 도를 행할 수 없는 경우에는 홀로 그 몸이라도 지키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였다.

내가 돌아가고 싶은 나이인 26세 때인 1460년(세조 6)에는 관동지방을 유람하며 지은 시를 모아 『탕유관동록(宕遊關東錄)』을 엮었고, 29세인 1463년(세조 9)에는 호남지방을 유람하고 『탕유호남록(宕遊湖南錄)』을 엮었다. 그의 방랑이 부럽고 문재 또한 부럽다. 강릉김씨지만 서울에서 태어난 그가 대관령 너머 낯선 곳 강릉에서 다소 이질적인 강릉 사투리를 접했을 때 느낌이 어땠을까? 머리카락을 자박생이라고 하는 걸 알고 일단 놀란 뒤 마음속에 잘 담아 후일 다른 이들에게 재미삼아 전했을 수도 있다.

새로운 언어와 접촉하면서 가장 손쉽게 일어나는 어휘 차용은 여러 경로로 이루어진다. 국경 지대의 互市에서 이방인이 이방인의 언어를 이해하려는 과정에서, 또는 포교 과정에서, 그리고 전쟁이 벌어지고 정복자의 언어를 피정복민이 수용하는 과정에서, 그밖에 과거의 강제 이주, 근래의 자발적 이민, 전쟁 포로 등의 적응 과정에서 끊임없이 어휘와 문법 차용이 계속되어 왔다. 중앙아시아의 지명에 티베트어가 남아있는 데는 이런 까닭이 있다. 

貞觀 22년(649년) 당나라 안서도호부 소관의 安西四鎭이 설치됐는데, 구자龜玆, 소륵疏勒(현 카시가르), 우전于闐(현 호탄), 언기焉耆(현 카라샤르)가 여기에 해당한다. 21년 뒤인 고종 22년(咸亨 元年, 670년)에 龜玆가 吐蕃에 점령되자 당나라는 언기를 버리고 쇄엽을 4鎭의 하나로 삼고 치소를 碎葉鎭으로 정한다. 그러다 長壽 2년(693년) 토번을 격파하면서 다시 구자를 치소로 삼았다. 改元 7년(719년)에는 쇄엽성을 서돌궐의 十姓可汗에게 내어주고 언기를 4鎭의 하나로 되삼았으나 755년에 발발한 安史의 난 이후 토번에게 이 지역을 다시 뺏기면서 안서도호부는 완전히 폐지됐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서, 산천은 依舊하다는 말처럼 산하는 변함없는데 땅의 주인만 때때로 바뀌면서 종족의 혼거와 혼혈, 그리고 언어의 혼용 현상이 발생했다. 인류 역사를 통틀어 단 하루도 전쟁이 벌어지지 않은 때가 없다. 지금도 지상 어디에선가는 어떤 그럴듯한 이유나 명분을 내세운 싸움이 벌어지고 있다. 전쟁의 결과로 승자와 패자가 정해지면 사용언어의 위계도 정해지고 십중팔구 지배 세력이 된 승자의 언어가 득세하고, 피지배계층이 된 패자의 언어는 위세를 잃는다. 그리고 일제 치하의 조선 땅에서처럼 diglossia(양층언어 사용)라는 상황이 생겨난다. 프랑스에 의한 노르만 정복 이후 영국 땅에서 일어난 언어상황도 그렇다.

그런데 나는 한자로 기록된 중국과 한국의 역사 자료를 읽으면서 인명, 지명, 종족명, 국명 등의 표기와 관련하여 字形은 차지하고 字義보다는 字音 문제 해결에 어려움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 우선 현재 우리의 한자음과 중국인의 한자음이 다르다. 또한, 오늘날 중국인의 한자음이 과거 周나라로부터 춘추전국시대를 거쳐 漢唐에 이르는 시기의 古音이 아닐 것이며, 우리의 한자음도 삼국시대의 고음과는 다를 수 있다. 音만이 아니라 訓 역시 그럴 것이다. 그러므로 고대 시기의 명칭을 지금의 음으로 읽어낸다는 것은 때때로 그 이상 어려운 일이다.  

한자 美의 중국 표준어 병음은 měi (mei3)다. 그런데 광동어 발음은 mei5(廣州話);  mei4(台山話), Hakka 방언에서의 발음은 mî; mi1이고,  閩南語(Minnan)의 경우는 지역에 따라 음이 다른데 bí(Hokkien); mui2/bhuê2(Teochew)로 지역에 따라 현격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閩南은 민의 남쪽 즉 福建(Fujian) 남부를 말하는 것으로 여기서 쓰이는 閩語를 閩南語라고 한다. 중국은 워낙 광대한 지역이기도 하지만, 민족 구성이 공식적으로 55개 소수민족에 漢族을 포함해 56개 민족으로 이뤄져 있다. 그러니 백화문에 의한 표준한자 교육이 변방이나 산간 오지로 갈수록 어려움을 겪는다. 聲調 만해도 지역마다 달라 운남, 귀주, 호북, 사천 등지는 4성이 아닌 6성을 사용한다.

▲ 싱가포르에 있는 육포가게 〈미진향〉. 진열장 안쪽과 종업원들의 머리 위에 바꾸앙(Bakkwa)이라 불리는 육고기를 조미해서 말린 육포가 보인다(사진 출처: wikipedia).
▲ 싱가포르에 있는 육포가게 〈미진향〉. 진열장 안쪽과 종업원들의 머리 위에 바꾸앙(Bakkwa)이라 불리는 육고기를 조미해서 말린 육포가 보인다(사진 출처: wikipedia).

사정이 이러하므로 과거든 현재든 한자음이 지역에 따라 다른 경우가 많다. 일례를 들어, 싱가포르에 본사를 둔 대만식 별미식품 육포 점포의 상호 <美珍香>의 만다린 병음은 Měizhēnxiāng인데, 실제로 사용하는 영어 발음표기는 Bee Cheng Hiang이며, 白話字로는 Bí-chin-hiang이다. 돼지고기, 쇠고기, 양고기 등을 향신료, 설탕, 소금과 간장으로 양념해 섭씨 50~60도에서 건조시키거나 훈제 또는 구이로 만든 식품을 육건(肉乾) 혹은 육포(肉脯)라 하는데, 肉乾(간체자로는 肉干)의 발음이 민난어로는 bah-koaⁿ(바꾸앙)이고, 표준어 병음은 ròugān 러우간[*])이다. 영어로는 Bakkwa로 표기한다.

옛날 사람들도 아마 互市라는 이름의 국경지대의 교역시장에서 이국의 특산품을 사고팔았을 것이다. 장사꾼은 돈이 되는 물건이라면, 돈벌이가 쏠쏠한 곳이면 거리가 멀어도, 노정이 험해도 고달픔 마다치 않고 길을 떠났다. 중앙아시아 출신의 소그드 상인들도 그러했다. 소그드인들은 사내아이가 태어나면 입술에는 꿀을, 손바닥에는 아교를 발랐다. 꿀처럼 달콤한 말을 하고, 들어오는 돈은 붙어서 떨어지지 말라는 염원을 담아서. 소그드 남자는 스무 살이 되면 집을 떠나 장삿길에 올랐다.

소그드는 무슨 말일까? 그리고 어떤 종족일까? 그들은 중국 문헌에 한 때 胡라고 불리고 기록되었다. 카시미르 출신의 불교 승려 이언이 편찬한 梵語雜名은 이들에 대해 한자로 胡라 쓰고 범어로는 Suli라 한다고 전한다. 거기 예기치 않게 高麗가 등장한다. 서역국가들 이름 사이에 고려는 범어로 무쿠리(畝俱理)라 부른다는 기사가 적혀있다. 무쿠리의 고대 음은 무엇이며, 또 이 말의 어의는 무엇인가?

몽골 초원의 투르크 비문에는 고구려를 투르크어로 뵈클리(bökli)라 기록하고 한편에는 貊人이라 각인했다. 고려가 貊́이라는 맹수를 토템으로 하는 민족이었기에 맥인이라 불렸을 것이다. 현재 貊에 대한 중국어 발음은 mò, háo, he 등 다채롭다. 그런데 貊의 민난어 발음은 be̍k이다. 畝俱理에서의 무의 민난어 발음 또한 예상하듯이 bó͘다.


연호탁 가톨릭관동대·영어학

한국외대에서 영어학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명지대에서 중앙아시아사 전공으로 두 번째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가톨릭관동대 관광경영학과 교수로 그동안 『중앙일보』에 ‘차의 고향’, 『동아일보』, 『중앙일보』, 『문화일보』 등에 칼럼 ‘문명의 뒤안, 오지 사람들’, 『교수신문』에 ‘욕망의 음식: 음식문화사’를 연재했다. 저서로는 『문명의 뒤안 오지의 사람들』, 『차의 고향을 찾아서』, 『궁즉통 영어회화』, 『중앙아시아 인문학 기행: 몽골 초원에서 흑해까지』, 『문화를 여행하다: Travel, Culture&People』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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