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사유하는 분열증적인 두 방식 ··· 루이 알튀세르의 유고집 《역사에 관한 글들》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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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사유하는 분열증적인 두 방식 ··· 루이 알튀세르의 유고집 《역사에 관한 글들》에 대하여
  • 배세진 연세대·정치철학 
  • 승인 2023.12.30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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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에 관한 글들: 비-역사의 조건으로부터 역사의 조건으로』 (루이 알튀세르 지음, 배세진·이찬선 옮김, 364쪽, 2023.11)

 

프랑스에서 루이 알튀세르(Louis Althusser)의 유고집 출간은 계속되고 있다. 정확히 말할 수는 없지만 최소 단행본 다섯 권 이상이 여전히 출간을 기다리고 있다. 프랑수아 마트롱(François Matheron, 2021년 사망)의 뒤를 이어 G. M. 고슈가리언(G. M. Goshgarian)이 경탄스러운 수준의 학술적 정교함을 지닌 자신의 개입을 통해 유고집을 출간하는 작업을 수행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이에 발맞춰 《역사에 관한 글들》의 공역자인 필자를 포함해 많은(물론 소수의…) 알튀세르 연구자들이 유고집의 번역을 수행하고 있다. 이로 인해 알튀세르의 새로운 얼굴이 한국의 독자들에게까지 알려지고 있다.

 

물론 알튀세르가 생전에 출간한 저서들조차 완역되지 않은 상황에서 유고집의 출간에 집중하는 작업이 가지는 한계는 분명 지적되어야 한다. 이것이 알튀세르의 얼굴에 관한 왜곡된, 또는 그렇지는 않다고 해도 최소 불균형한 상을 제시할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한계와 문제점을 십분 인정하면서도, 유고집이 가지는 그 놀라움으로 인해 알튀세르 연구자들은 이 수수께끼 같은 텍스트들을 도저히 번역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도로 정리하도록 하자. 그리고 앞으로 알튀세르 연구자들이 유고집들뿐만 아니라 생전 출간 저서들까지 온전히 한국어로 번역하도록 노력할 것이라 한국의 독자들에게 말하는 것으로 미안함을 표현하도록 하자.

알튀세르의 유고집이 가지는 놀라움은 무엇일까? 이를 해명하기 위해 알튀세르의 가장 ‘말 잘 듣는’ 제자인 에티엔 발리바르(Étienne Balibar)의 ‘정세의 알튀세르’와 ‘구조의 알튀세르’(결국 이로부터 파생되는 ‘정세의 알튀세리앵들’과 ‘구조의 알튀세리앵들’) 간 구분을 취하도록 하자(물론 필자는 여러 ‘정황’상 발리바르가 최소 2000년대 이후로는 스스로를 정세의 알튀세리앵으로 위치 짓는다고 생각하는데, 이에 대한 논의는 아쉽지만 다음을 기약하도록 하자). 알튀세르 사유의 놀라움은 그가 인간, 사회, 세계, 그러니까 우리의 유고집과 관련해서는 결국 ‘역사’를 사유함에서 한편으로는 구조에 방점을 두고 다른 한편으로는 정세에 방점을 둔다는 점에 놓여있다. 알튀세르는 구조, 필연, 경향(과 반경향)에 방점을 두는 사유와 정세, 우연, 사건에 방점을 두는 사유(사실 이는 현대 프랑스철학, 더 나아가서는 인문사회과학 전체가 이를 중심으로 끊임없이 회전하는 그러한 대당이기도 한데) ‘사이’에 걸터앉는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의해야 할 점은 이를 알튀세르가 역사를 사유함에서 초기에는 구조에 방점을 두고 후기에는 정세에 방점을 둔다고, 또는 불규칙하게 특정 시기마다 어떤 때는 구조에 어떤 때는 정세에 방점을 둔다고, 또는 규칙적으로 구조와 정세에 방점을 두기를 번갈아가면서 일종의 ‘갈지자 걸음’(random walk)을 걷는다고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런 것이 전혀 아니라, 알튀세르는, 우리의 유고집이 정확히 보여주듯, 동일한 시기에 동일한 저서에서(특히 아래에서 언급할 《‘자본’을 읽자》가 정확히 그렇다) 구조와 정세 모두에 방점을 둔다. 하지만 이는 알튀세르가 구조와 정세 모두를 중시한다는 얘기가 전혀 아니라(알튀세르는 그런 ‘시시한’ 사유를 했던 인물이 전혀 아니다), 구조에 방점을 두는 행보와 정세에 방점을 두는 행보를 분열증적으로 동시에 취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역사에 관한 알튀세르의 ‘분열증적 행보’(démarche schizophrénique)라 규정하도록 하자. 

알튀세르는 이러한 분열증적 행보를 취하기 때문에 구조의 알튀세르와 정세의 알튀세르라는 두 얼굴로 동시에 등장해 우리를 당황케 하는 것이고, 그래서 (필자를 포함한) 그의 넓은 의미의 제자들은 구조의 알튀세리앵과 정세의 알튀세리앵으로 분열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유고집 출간 작업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기 전까지는, 심지어 발리바르까지도 포함해서(스스로 고백하듯 그는 《마키아벨리와 우리》라는 정세의 알튀세르의 가장 아름다운 작업이 유고 출간을 위한 준비작업 이전에는 존재하는지조차 몰랐다), 그 누구도 이러한 두 얼굴의 알튀세르를 입체적인 방식으로 만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마트롱과 고슈가리언의 노고로 오늘날 우리는 어느 정도 알튀세르의 이러한 두 얼굴 모두를 마주할 수 있는데, 이를 통해 우리는 알튀세르가 구조의 알튀세르로서 집필한 텍스트들은 대체로 공식적으로 출간하고, 정세의 알튀세르로서 집필한 텍스트들은 대체로 서랍 속에(몇몇 텍스트의 경우 심지어 발리바르에게도 보여주지 않고…) 넣어두었다는 테제를 이끌어낼 수 있다. 물론 이러한 테제는 어느 정도 인식계발적(heuristique)이기는 하지만(필자 또한 강의에서 이 테제를 종종 활용하곤 한다) 학술적으로는 꽤나 부정확한 것인데, 왜냐하면 알튀세르의 유고집 출간을 통해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바는 그의 생전 출간 텍스트들에 대한 우리의 이해 자체가 전혀 입체적이지 못했다는 점이기 때문이다. 설명해보자.

지금까지 우리는, 알튀세르가 1965년 《마르크스를 위하여》와 《‘자본’을 읽자》의 ‘이론주의’의 시기, 그러니까 구조의 알튀세르의 계기에서 출발해 이데올로기 개념의 역량을 점진적으로 승인하게 되면서 정세의 알튀세르의 계기에 도달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다가 1980년 자신의 아내 엘렌 리트만(Hélène Rytman)을 살해하는 비극적 사건 이후 1990년 사망 전까지 자신의 이전 작업(구체적으로는, 그것이 아무리 ‘서방 마르크스주의적인 것’이라 해도, ‘구조’에 관한 꽤나 정통 마르크스주의적인 사유) 전체를 무효화하는 우발성의 유물론을 전개한 것으로, 결국 ‘포스트-구조주의’(여기에서 이 ‘포스트-구조주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매우 모호하며 앞으로 우리는 이를 학술적으로 엄밀히 정의해야 할 것이다)로 전향한 것으로 이해해왔다.

물론 알튀세르가 1970년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들〉 논문 이전과 이후로 이데올로기 개념의 역량을 점진적으로 승인하게 되고 그러면서 역사에서 우연의 지위를 격상시킨다(구체적으로는 ‘과소결정’ 개념을 복권한다)는 설명은 정확하다. 하지만 알튀세르가 1980년의 파국 이후 스스로를 파괴하기 위해 자신의 이전 작업 전체를 부정하는 우발성의 유물론을 사유하기 시작한다는 주장은 유고집들이 보여주듯 지지되기 힘든 설명이며(1980년 이전에 쓰여진 유고들 상당수가 우발성의 유물론에 관해 사유하기에), 또한 1970년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들〉 논문 이전 알튀세르, 특히 1966년부터 시작되는 자기비판(이데올로기 개념과 밀접히 연관되는) 이전 알튀세르, 결국 1965년 《마르크스를 위하여》와 《‘자본’을 읽자》의 알튀세르가 순일하게 구조의 알튀세르이기만 하다는 주장도 유고집들의 출간으로 인해 이제는 지지되기 힘든 설명이 되었다. 

필자는 알튀세르가 이데올로기 개념의 역량을 점진적으로 승인하게 되면서 역사에서 우연의 지위를 격상시키는 경향을 취한다는 설명은 유지하면서도 알튀세르 자신이 1965년에서부터, 또는 그의 파리 고등사범학교 교수 자격시험 지도를 위한 강의록인 《알튀세르의 정치철학 강의》(후마니타스, 2019)를 통해 알 수 있듯 이미 그 이전부터, 구조의 알튀세르와 정세의 알튀세르라는 두 얼굴 모두를 분열증적으로 가지고 있었다고 믿는다. 그래서 알튀세르의 생전 출간 저서들에 대한 독해도 이제는 달라져야 하는데, 이 점을 고려한다면 왜 안토니오 그람시에 대한 알튀세르의 평가가 그토록 양가적(결국 분열증적)이었는지, 조금 더 구체적으로는 왜 《‘자본’을 읽자》의 4장 ‘고전파 경제학의 결점들: 역사적 시간 개념 개요’와 5장 ‘마르크스주의는 역사주의가 아니다’가 충돌하는지 등의 난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왜 알튀세르는 이러한 분열증적 행보를 취했던 것일까? 평생을 괴롭혔던 그의 조울증 때문에? 자신의 ‘이론적 속마음’을 공적 출판물을 통해 표현할 수 없게 강제하는 ‘스탈린주의적인’ 프랑스 공산당 때문에? 그러니까 그의 철학적 헌신과 정치적 헌신 간 찢어짐(écartèlement) 때문에? 물론 이 모든 설명들은 근거 있는 것이다. 하지만 필자는 알튀세르가 이러한 분열증적 행보를 취해 두 얼굴을 가지게 되어 ‘대체적으로는’ 구조에 방점을 두는 사유는 공적으로 출간하고 정세에 방점을 두는 사유는 서랍 속에 넣어두게 된 근본적인 이유가 알튀세르 자신이 마르크스의 부활을 위해 취했던 필생의 과업 그 자체가 마르크스를 청산하지 않으면서도 마르크스의 난점과 공백을 넘어 마르크스를 비-마르크스적 사상들과 접속시켜 혼종적 괴물을 만들어내는 분열증적인 것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마르크스를 위해, 마르크스에 반해 마르크스를 읽어야 한다는 과업 말이다.

하지만 조금 더 사상사적 맥락을 고려해 이를 서술해본다면, 알튀세르는 ‘상부구조에 관한 이론’으로서 서방 마르크스주의의 핵심 이론가(고전 마르크스주의자나 스탈린주의자가 아니라)로서 마르크스를 위해 마르크스를 읽으면서도 현대 프랑스 철학자로서(결국 ‘포스트-구조주의자’로서… 알튀세르가 프랑스 공산당에 평생 헌신한 평당원이자 세계적 마르크스주의자일 뿐 아니라 미셸 푸코, 자크 데리다, 자크 랑시에르, 알랭 바디우 등의 선생이자 동료이자 친구이기도 했다는 점을 기억하자) 마르크스에 반해 마르크스를 읽어야 했고, 이로 인해 마르크스에 관한 분열증적 독해를 수행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알튀세르 이후의 포스트-마르크스주의라는 혼종적 괴물들(에르네스토 라클라우와 샹탈 무프의 것이든, 발리바르의 것이든, 네그리의 것이든, 낸시 프레이저의 것이든…)을 생산해내면서, 우리가 앞서 살펴보았던 구조, 필연, 경향(과 반경향)인가 정세, 우연, 사건인가라는 역사적 대당으로 표현되었던 것이고. 

이러한 견지에서 보자면, 《역사에 관한 글들》은 너무나도 흥미로운 유고집이다. 《역사에 관한 글들》의 핵심인 ‘책 속의 책’ 《제국주의에 관하여》(1973년 집필) 그 자체가 이러한 알튀세르의 분열증을 체현하고 있는 텍스트이지만, 그 이외에도 《제국주의에 관하여》 만큼 중요한 역사에 관한 단편들 중 몇 가지 또한 이러한 분열증을 체현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 이 유고집 자체가 역사에 관한 알튀세르의 텍스트들 중 일부를 고슈가리언이 탁월한 전략적 선택에 따라 시기 순으로만 배치한 것이기에 이러한 분열증이 여실히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배치 덕에 이 유고집은 다른 유고집들과 달리 (역사에 관한 성찰이라는 점을 제외한다면) 일관된 문제의식으로 관통되어 있지 않으며, 그 안의 여러 텍스트들이 구조와 정세 사이에서 진동하며 상호 충돌하고 있다. 심지어 《제국주의에 관하여》는, 《‘자본’을 읽자》가 4장과 5장을 중심으로 그러한 것과 동일하게, 바로 그 안에서 텍스트들이 구조와 정세 사이에서 진동하며 상호 충돌하고 있다.

그래서 독자들은, 알튀세르 연구자들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은, 현대 프랑스철학 연구자들은, 인간, 사회, 세계, 결국 역사를 바라보는 자신들의 입장의 전거로 쓰기 위해, 그 누구라도 이 《역사에 관한 글들》에 자신의 몸을 의탁할 수 있을 것이다. 해제에서 진태원 교수가 지적했듯 역사를 철학적으로 사유하기 위해 그 누구도 구조와 정세 중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지 답을 제시할 수 있다 말할 수 없는 오늘날의 상황에서, 이러한 아포리아를 끝까지 견뎌내며 분열증적 행보를 취한 알튀세르의 사유 실험은 21세기에 마르크스주의를 공부하는 이에게든 현대 프랑스철학을 공부하는 이에게든 마르지 않는 원천으로 기능할 것이다. 

p. s. 마지막으로 1963년의 대담 녹취록 〈문학사에 관한 대화〉에 관해 간단히 언급하고 이 글을 마무리하기로 하자. 알튀세르는 《마르크스를 위하여》(후마니타스, 2017)에 수록된 〈피콜로 극단: 베르톨라치와 브레히트(유물론적 연극에 대한 노트)〉를 포함해 예술에 관한 아주 소수의 ‘희귀한 단편들’을 남겼는데, 이 단편들 모두가 우리의 예술에 관한 사유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점은 익히 알려져 있다. 공역자 이찬선의 탁월한 번역으로 우리는 이제 예술, 특히 문학에 관한 알튀세르의 또 다른 단편을 읽을 수 있게 되었는데, 한국의 독자들은 필자가 옮긴 《제국주의에 관하여》보다는 이 흥미로운 텍스트에 더 많이 주목할 것이라 예상한다.

발리바르와 데리다가 이미 암시했듯 〈피콜로 극단: 베르톨라치와 브레히트(유물론적 연극에 대한 노트)〉가 《마르크스를 위하여》의 ‘도난당한 편지’이자 ‘부재하는 중심’이요 그 수수께끼의 ‘열쇠’인데(왜 그러한지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할 기회가 언젠가 있을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문학사에 관한 대화〉 또한 《역사에 관한 글들》의 ‘도난당한 편지’이자 ‘부재하는 중심’이요 그 수수께끼의 ‘열쇠’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몇몇 알튀세르주의자들이 지적한 바 있듯 알튀세르는 예술에 관한 성찰을 통해 자신의 정치에 관한 사유의 열쇠를 제시해왔는데, 이 〈문학사에 관한 대화〉 또한 ‘문학’과 ‘문학의 역사’에 관한 성찰을 통해 《역사에 관한 글들》 전체의 목표인 ‘역사 그 자체’에 관한 성찰로(결국 비-역사의 조건에서 역사의 조건으로) 나아가고 있다.

역사를 사유하기 위해서는 역사뿐만 아니라 그 (불)가능조건인 비-역사 또한 (유사-초월론적으로) 사유해야 한다는, 그래서 ‘문학사의 병리학’을 실천해야 한다는, 그런데 이러한 학문적 실천을 행할 수 있는 것은 이데올로기적 ‘지층들’ 또는 ‘형태들’을 사유하는 역사유물론 뿐이라는 알튀세르의 확언은 정확히 마르크스주의와 현대 프랑스철학 사이에 놓여있다. 우리는 〈문학사에 관한 대화〉를 꼼꼼히 독해함으로써 《역사에 관한 글들》, 아니 더 나아가 알튀세르의 텍스트들 전체의 분열증적 행보에 분열증적으로 ‘입문’할 수 있는 것이다. 

 

배세진 연세대·정치철학 

연세대학교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 커뮤니케이션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프랑스 파리-시테대학교에서 석사학위를, 같은 대학원(정치철학 전공)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연세대학교 매체와예술연구소 연구원이자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 대학원 미디어문화연구 전공 강사로 활동하며 미셸 푸코, 루이 알튀세르, 에티엔 발리바르, 자크 비데, 주디스 버틀러의 현대 프랑스 철학을 문화연구의 틀에서 연구·번역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 《마르크스의 철학》, 《마르크스의 생명정치학》, 《역사유물론 연구》, 《검은 소》, 《마르크스주의 100단어》, 《마르크스와 함께 푸코를》, 《미셸 푸코》, 《가부장 자본주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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