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과 망각, 이름 없는 죽음에서 찾은 존재의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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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과 망각, 이름 없는 죽음에서 찾은 존재의 자리
  • 이명아 기자
  • 승인 2023.12.23 2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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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테의 수기 | 라이너 마리아 릴케 지음 | 홍사현 옮김 | 문학동네 | 276쪽

 

20세기 전반 독일을 대표하는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남긴 유일한 장편소설이자 반자전적인 산문문학이다. 원제는 ‘말테 라우리스 브리게의 수기’로, 덴마크의 몰락한 귀족 가문 브리게가家의 마지막 후손이자 스물여덟 살의 무명 시인 말테가 그 주인공이다. 전체를 관통하는 줄거리 없이 단편적인 71개 장으로 구성되어 있고, 각 장에 말테가 자신의 삶에서 스스로 의미를 부여한 ‘커다란’ 것들에 대한 단상과 성찰이 담겼다.

파리라는 대도시의 익명성 속에서 말테는 자기해체 직전에 있으며, 기억의 파편을 추적하고 자신을 괴롭히는 다양한 형태의 불안을 묘사함으로써 삶을 재구성하려 시도한다. 희미하게 떠오르는 것은 개인의 정체성을 초월하는 삶의 예감이다. 릴케가 20세기 초 불안과 고뇌의 나날을 거쳐 작가로서 후기의 대작 『두이노의 비가』를 쓰기까지 변모의 전환점에서 독특한 형식으로 자기성찰을 시도한 작품이다.

젊은 시인 말테는 대도시 파리의 어느 골목, 다섯 층계를 올라간 춥고 좁은 작은 방에서, 고립된 삶 속에서 글을 쓰려 한다. 조각조각 떠오르는 기억들, 일상에서 마주친 두려움과 불안, 얼굴 없는 이웃들의 삶, 이름 없는 죽음들, 끊임없이 방 천장을 가로지르는 소음들을 생각하고, 글을 쓴다. 형식적인 구분은 없지만 소설은 페이지를 달리한 장을 기준으로 총 2부로 나뉜다. 

1부에는 파리에서 목격한 일들, 어린 시절의 신비로운 기억들과 죽음들, 보들레르와 입센, 베토벤, 크리스티안왕, 말테가 사랑한 아벨로네와 여섯 장의 태피스트리 연작 [여인과 일각수] 이야기가 이어지고, 2부에는 아버지의 죽음, ‘시간’을 돈으로 환산한 남자, 괴테와 베티나 이야기에서 사포, 루이즈 라베, 엘레오노라 두세 등의 예술가와 샤를 대공, 샤를 6세, 교황 요한 22세 등 역사적인 인물에 대한 단상들이 있다. 그리고 2부의 마지막인 성경의 ‘탕자’ 이야기를 통해 말테는 사랑받는 것을 거부하고 사랑하며 살리라고, 삶과 사랑의 방식을 바꾸리라고 암시한다. 삶의 문제를 고민했던 릴케는 그것을 끝까지 파보기 위해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말테를 삶의 가장자리 끝에,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그를 죽음 옆에 두었다.

릴케의 전기와 말테의 허구 사이의 경계가 종종 모호해지는 이 반자전적 소설에서 파리는 덴마크 청년 말테를 무겁게 짓누른다. 거리에서 죽어가는 사람, 벽을 짚고 힘겹게 걸어가는 임산부, 죽기 위해 병원으로 몰려가는 듯한 사람들, 무도병에 걸린 남자, 수레를 끌며 꽃양배추를 파는 맹인, 나병 환자, 온갖 가난하고 지친 사람들로 가득하다. 그들은 모두 서로 대화도 하지 않는 외롭고 가난한 사람들 같고, 다가올 운명만 마주하고 있는 듯하다. 말테의 내면에 들어간 우리는 죽음이 가득한 흑백의 파리를 눈앞에서 보듯 그 내면의 두려움과 공명하게 된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사진  © 사진=위키백과

말테는 짐 가방 하나와 책 상자 하나뿐인 허름한 방에서 고독하게 살고 있다. 그의 예민한 신경은 도시의 번잡함 속에서 유난히 긴장되어 있다. 파리에서의 삼 주는 그를 흔들고 완전히 바꾸어놓았다. 그는 새로운 출발을 결심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보는 것부터 제대로 하려고 한다. 모든 것을 살펴봐야 하고, 모든 것을 느끼고 이해해야 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서 모든 기억이 자기 안에서 생명을 얻고 자기 자신과 분리될 수도 없을 때 비로소 진정한 시가 탄생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1부가 불안과 죽음의 책이라면, 2부는 사랑의 책이다. 어머니와 함께 레이스를 풀어 구경하던 일, 이웃 슐린가의 불타버린 저택을 방문한 일, 어린 시절 어른들의 선물에 환멸을 느낀 일, 용감한 샤를 대공 이야기 등 많은 회상이 등장하지만, 가장 큰 줄기는 사랑에 빠진, 사랑을 하는 여인에 대한 찬가다. 엘로이즈, 베티나, 사포 등 중세와 르네상스시대 여인들이 보여준 위대한 사랑에 말테는 이렇게 경탄한다. “사랑받는다는 것은 불타버리는 것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결코 고갈되지 않는 기름으로 불을 밝히는 것이다. 사랑받는다는 것은 사라져가는 것이고, 사랑한다는 것은 영속하는 것이다.” 성경에 나오는 탕자의 이야기도 그에게는 남에게 사랑받기를 거부하고 신의 사랑만을 구하는 사람의 이야기로 해석된다.

쓸쓸한 영혼의 여정, 절묘한 시적 산문의 보물이라 일컬어지며 오늘날에도 현대인의 고독과 깊이 공명하는 이 “불안의 책”에서 말테는 궁극적으로 자신이 머물 ‘존재의 자리’에 도달하였음을 암시한다. 모든 문장이 규칙적이고 합리적이고 언어적이지 않다. 글이 아니라, 감정이 먼저 독자의 세계로 들어온다. 글은 언어가 아니라 느낌으로 전달된다. 강렬한 감정을 표현할 때 그림이, 춤이 탄생하듯 릴케의 산문은 그의 감정이 그대로 문장이 된 듯한 느낌을 준다. 릴케의 말을 빌리자면 그것은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보여주는 것이 핏속에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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