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 위기 앞에서 새로운 좌표계를 제시하는 ‘근대인의 인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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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 위기 앞에서 새로운 좌표계를 제시하는 ‘근대인의 인류학’
  • 이현건 기자
  • 승인 2023.12.23 22: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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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재양식의 탐구: 근대인의 인류학 | 브뤼노 라투르 지음 | 황장진 옮김 | 사월의책 | 744쪽

 

이 책은 과학기술학의 대가이자 생태주의 정치철학을 독보적으로 제시해온 프랑스 철학자 브뤼노 라투르 사상의 모든 것이 담겨 있을 뿐 아니라, 서구 근대성이 낳은 온갖 문제의 근본 원인을 파헤치고 그 해법과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는 책이다. 라투르는 서구 근대인과 그들을 따라 근대화를 추구한 비서구 근대인이 ‘자연’과 ‘사회’를 구분하고, ‘객체’와 ‘주체’를 갈라놓는 이분법으로 인해 정치적 극한갈등과 기후변화라는 위기에 빠졌다고 진단한다. 요컨대 근대인은 자신과 타자를 파악하는 데 모두 실패했다. 잘못된 이분법의 좌표계로 세상을 재단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라투르는 또 하나의 근대성 비판을 제출하는 데 그치지 않고, 비근대인을 대상으로 삼았던 서구 인류학의 시선을 반전시켜 근대인 자신을 인류학적 탐구의 대상으로 삼는다. 이를 통해 근대인이 추구해온 과학, 기술, 정치, 경제, 종교, 예술, 도덕, 법 등의 영역을 가로지르며 근대적 가치와 제도의 실상을 밝히고, 열다섯 가지 존재양식의 개요를 제시한다. 서구와 비서구, 인간과 비인간의 뒤얽힘이 극적으로 증가하는 인류세 시대에 대응하여 한층 더 다원적이고 생태적인 대안적 좌표계를 확립하기 위해서다. 이로써 이 책은 근대화의 폭력과 오류를 넘어 생태화의 길로 나아가며 비근대인, 비인간, 그리고 지구와 함께하는 새로운 ‘외교’의 가능성을 연다.

결국 이 책은 ‘과학’과 ‘경제’의 지배를 넘어 근대 세계를 어떻게 재묘사할 것인가, 그리고 근대적 가치 가운데 무엇을 계승할 것인가에 대한 지속적인 탐구다. 저자는 우리가 어떻게 학문 간, 문화 간, 인간과 비인간 간의 소통을 통해 지속 불가능성이 입증된 서구 근대성의 삶의 형태와 범주를 재설계할 수 있는지를 핵심적으로 묻는다.

책의 1부 「근대인의 존재양식에 대한 탐구를 어떻게 가능하게 할 것인가」는 탐구의 목표를 설정하고, 근대인에 대한 이해를 진전시키려는 모든 노력을 이해할 수 없게 만드는 두 가지 주요 장애물(객관적 지식의 문제, 구성과 실재의 문제)을 제거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마침내 다시금 경험에 의지해서 다양한 유형의 존재자들에 대해 적절하게 말하는 법을 알게 된다. 단지 상이한 ‘언어 게임’의 문제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대신, 존재론적 다원주의를 올바로 다룰 수 있게 되고, 세계를 구성하는 수많은 행위자들로 눈을 돌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2부 「어떻게 존재양식의 다원주의로부터 이득을 얻는가」에서는 존재양식의 다원성으로부터 이득을 얻고 무엇보다 주체/객체의 분할이라는 감옥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위치를 찾는다. 여기서 탐구하는 여섯 가지 양식(재생산, 변신, 습관, 기술, 허구, 지시)은 비교인류학을 위한 완전히 다른 기초를 제공해준다. 이를 통해 존재양식들의 출현, 존재양식들이 갖는 가치들의 변동, 그리고 각 존재양식의 출현이 다른 존재양식들을 파악하는 우리의 능력에 미친 부정적 효과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2부의 결론에서 라투르는 이러한 분석을 활용하여 존재양식들을 좀 더 체계적인 방식으로 배열할 수 있도록 대안적 좌표계를 제시한다.

이러한 대안적 좌표계를 통해 3부 「어떻게 집합체들을 재정의할 것인가」에서는 더 지역적이며 사회과학의 관습에 가까운 여섯 가지 존재양식(정치, 법, 종교, 애착, 조직, 도덕)을 식별한다. 이 존재양식들은 탐구의 마지막 두 가지 주요 장애물인 ‘사회’라는 관념, 그리고 특히 다른 어떤 양식보다 근대인의 특유성을 더 잘 보여주는 ‘경제’라는 관념을 재조립하는 데 도움을 준다. 자본주의의 종말보다 지구의 종말을 상상하기가 더 힘든 것은 ‘경제’라는 관념이 우리 인간 삶 전체의 아주 중요한 부분과 결부되는 세 가지 존재양식(애착, 조직, 도덕)을 근대적 제도 속에서 전혀 구분하지 않고 융합시켰기 때문이다. 라투르는 이 세 가지 존재양식을 상세히 설명함으로써 ‘경제’라는 숨은 신을 넘어서 이를 보다 민주적이고 도덕적인 문제들과 결부시킬 수 있는 방향을 제시한다.

결론에서 라투르가 밝히듯 이 책은 하나의 완성된 저작인 동시에 계속 진행 중인 집단적 탐구 프로젝트다. 탐구를 통해 발견된 경험을 공유하고 다양한 존재양식을 존중할 뿐 아니라, 나아가 저자의 설명과 다른 설명을 제안하고 탐구 자체를 외교적 장치로 변환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이로써 각각의 존재양식이 조화로운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제도를 다시 설계하고, 전쟁의 세계 속에서 새로운 평화를 위한 외교의 가능성을 제안하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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