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페미니즘 시대, 길 잃은 모성의 의미를 묻다 – 영화 속 어머니 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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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페미니즘 시대, 길 잃은 모성의 의미를 묻다 – 영화 속 어머니 서사
  • 정미경 경기대·글로벌어문학부​​​​​​​
  • 승인 2023.12.23 2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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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테제_ 『엄마. 어미. 여성: 재현과 해체의 어머니 서사』 (정미경 지음, 역락, 296쪽, 2023.10)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머니’만큼 개인이나 사회에 영향을 미치는 말도 없지만 정작 그것이 갖는 의미에 대해서는 묻지 않는 경향이 있다. 그 이유는 어머니의 역할이나 모성이 대개 일상적이고 자연적인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일 것이다. 출산의 능력은 육아의 의무와 결합되어 모성 신화를 기초한다. 어머니의 사랑, 어머니의 고통, 어머니의 희생. 위대한 어머니. 이 당연시되는 어머니상으로부터 벗어난 여성이라면 가차 없는 비난과 배제의 대상이 된다(에우리피데스는 메데이아의 사악함을 드러내기 위해 자식 살해를 덧붙임으로써 그녀를 신화 속 최고의 악녀로 등극시키는 데 성공한다. 메데이아 이야기에서 모성애는 이방인 배척, 능동적 여성에 대한 공포, 헌신과 배신 등 여타 문제를 집어삼킨다). 

‘모성’은 여성이 지녀야 할 지고한 미덕으로 널리 칭송받으며 일종의 신성불가침 영역으로 영원히 보존된다. 여성의 자의식이 남성의 그것에 뒤지지 않고 동등한 직업 활동을 요구하고 또 희망하는 오늘날에도 - 진취적이고 능동적인 새로운 여성상이 자리 잡기 시작한 데 비해 - 어머니성은 여성의 고유한 성질로 여전히 남아 있다. 오늘날 (가임기) 젊은 여성들이 선택한 길은 이를 우회하다 못해 아예 포기하는 쪽인 것처럼 보인다. 세계 최고에 이른 출산율 저하가 이를 증명한다. 

『엄마. 어미. 여성 – 재현과 해체의 어머니 서사』는 모성이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고 구성된 것임을 우선 이론적으로 따라간다. 18세기 가정의 발명 이전에는 어머니가 아이를 전담하여 양육하거나 교육시키지도 않았으며 모유 수유는 오히려 기피되는 일이었다고 한다. 산업화가 진행됨에 따라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의 급격한 분리가 일어나 가정을 전담하고 관할할 측이 필요했고, 더욱이 계몽주의의 이념은 아이에 대한 보다 전문적이고 집중적인 교육을 요구했다. 이제 어머니에게는 아이의 양육뿐만 아니라 교육의 전담자라는 중책이 주어진다.

이 ‘영광스러운’ 어머니 자리에 여성을 앉히는 방식은 두 가지로 나타난다. 하나는 사회가 원하는, 어머니다운 어머니를 칭송하고 나아가 신격화하는 것이다. 피에타로 대변되는 모성은 그 어떤 희생보다 숭고한 사랑으로 신성(神聖)의 경지에 이른다. 세상의 모든 어머니는 위대하고 어머니의 고통은 죽음을 초월한 사랑의 또 다른 표현이다. 자연재해의 참상이나 전쟁의 비인간성을 말하는 데에 비참하게 울부짖는 어머니의 이미지 하나가 그 어떤 장황한 말보다 더 효과적이며, 훌륭한 자식 뒤에는 훌륭한 어머니가 있다는 서사는 차고 넘친다. 이렇듯 모성 신화는 만들어지고 확산된다. 

여성을 어머니 자리로 가져가는 또 다른 방식은 어머니답지 않은 어머니, 모성 실천을 다 하지 못한 어머니를 비난하고 죄악시하는 것이다. 모성 결핍은 아이의 정서 불안과 나아가 악한 행동의 근원으로 지목되기 일쑤다. 모성애를 내면화한 여성은 아이의 잘못과 비뚤어짐에 대해 무한 책임을 느끼며 죄책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이렇게 모성 신화는 강화된다. ‘어머니’가 갖는 말의 무게는 이렇듯 한 개인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무거운데, 더욱이 ‘자기만의 한 조각 인생’을 원하는 개인이라면 이를 쉽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어머니의 역할과 의미에 대해 이 시점에서 물어야 하는 이유이다. 

‘어머니라면 이러저러해야 한다’는 ‘어머니-기능’은 선천적인 것도, 본능적인 것도 아닌 사회문화적으로 구성된 것이며 또한 어머니인 여성 자신의 욕망과 꼭 일치하는 것도 아닌 한에서 ‘어머니-여성’과 구분될 수 있다. 어머니 역할은 자아성취라는 근대의 원칙과 모순 상태에 있다. 자아를 망각하는 헌신과 희생이야말로 여성이 어머니로서 누릴 수 있는 지고한 행복으로 일컬어졌기 때문이다. 오늘날 젊은 여성들로 다시 돌아가자면, 이들은 어머니 역할을 자신들의 지상과제로 설정하지 않음으로써 이 모순에 반한다. 

『엄마. 어미. 여성 – 재현과 해체의 어머니 서사』는 이런 관점을 견지하되 이론적으로 파고 들지는 않는다. 책의 본령은 어머니가 등장하는 영화들을 선별하여 촘촘히 분석하는 것이다. 제목에 포함된 ‘엄마’, ‘어미’, ‘여성’은 책의 내용을 구분하는 세 가지 키워드이기도 하다. 

‘엄마’에서는 구성물로서의 어머니가 어떻게 좋은 어머니와 나쁜 어머니로 기능하는지 본다. 아들을 잃은 어머니가 처절한 복수극을 펼치는 가운데 모성은 연약한 여성의 강한 무기가 되고(<피에타(김기덕 감독>), 아들을 잃은 또 다른 어머니는 아들의 환생을 믿으며 현실을 부정한다(<당신을 기다리는 시간(피에로 메시나 감독)>). 모성애와 피에타는 두 영화의 서사를 뒷받침하고 이끄는 주요한 모티브이자 주제이다. <피아니스트(미하엘 하네케 감독)>와 <블랙 스완(대런 아로노프스키 감독)>에는 모성을 담보로 성인이 된 딸을 자신의 소유물로 취급하는 어머니가 각각 등장한다. 어머니의 이타적인 삶은 기실 자신의 욕망을 딸에게 투사하고 딸의 독립을 가로막는 이기적인 것으로 폭로된다. 

‘어미’에서는 모성 본능과 모성 신화를 주제로 한 영화들을 분석한다. <마더(봉준호 감독)>와 <마미(자비에 돌란 감독)>는 모성 본능에 관한 서로 다른 예로 그 의미를 묻고 있다. 그 자신 사회의 약자인 싱글맘에게 장애가 있는 아들이 있다면, 또 그 아들이 위기에 처하면 어머니는 어떤 선택을 할까. 한 어머니는 아들을 구하기 위해 살인도 불사하며 점차 괴물화되어 가고, 다른 어머니는 아들 사랑을 허락하지 않는 현실 앞에서 자신만의 삶도 있음을 소리죽여 항변한다. 두 영화에서 모성 본능은 한편 뒤틀린 어머니상으로 다른 한편 어머니-여성과 충돌하는 죄책감으로 각인된다. 

<케빈에 대하여(린 램지 감독)>는 모성 신화가 여성 개인에게 가하는 폭력을 보다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모성에 재능이 없는 여성에게 어떻게 모성이 강요되는지, 어머니가 아닌 여성으로서의 꿈과 동경이 어떻게 어머니 역할과 충돌하는지 일종의 충격 요법으로 보여주는 이 영화의 제목 ‘케빈에 대하여’는 곧 ‘어머니에 대하여’로 해석될 수 있다. 모성 신화의 해체를 다룬 영화만 있는 것은 물론 아니다. 감상적으로 모성 신화를 재구성하는 모성의 멜로드라마로 <내 어머니의 모든 것(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과 <나의 어머니(난니 모레티 감독)>를 들 수 있다. 두 영화에서는, 세상의 모든 고통 받는 자를 넓은 품으로 받아들여 돌보고 치유하는 여성성의 총화로 모성이 소환되는가 하면, 어머니는 죽지만 딸은 그 사랑에 대한 기억으로 힘겨운 현실을 살아갈 힘을 다시 얻는 것으로 모성이 찬양된다. 

‘여성’에서는 어머니로만 기능하지 않는 여성 서사를 찾아본다. <파니 핑크(도리스 되리 감독)>와 <마요네즈(윤인호 감독)>에서는 이타적이고 완전한 어머니가 아닌 이기적이고 불완전한 어머니가 등장하여 우리의 시선을 낯설게 만든다. 더 나아가 <마더(미첼 감독)>는 자신의 꿈과 육체적 욕망을 좇는 어머니로 무성(無性)적인 어머니성에 균열을 낸다. 가정이 아닌 사회, 국가와 관련된 어머니 서사도 있다. <독일, 창백한 어머니(헬마 잔더스-브람스 감독)>, <굿바이 레닌(볼프강 베커 감독)>에서는 전쟁과 통일이라는 굵직굵직한 역사와 어머니가 어떻게 조우하는지 보여준다. 

아버지 혹은 남성 부재의 사회에서 어머니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역할을 요구받지만 두 영화 공히 위기 상황에서 굳건히 자식을 지키고 길러내는 어머니 역할로 수렴되는 한계를 보인다. <마더!(아로노프스키 감독)>는 인류사 전체를 어머니 서사로 풀어낸다. 여성이 남성에 의해 ‘창조’되고 사회적 영역으로부터 배제되는 과정을 일종의 알레고리로 보여주는 가운데 영화는 여성이 누리는 유일한 특권은 고통에 찬 어머니 자리임을 가리킨다.

이렇듯 『엄마. 어미. 여성 – 재현과 해체의 어머니 서사』는 포스트페미니즘 시대에 어머니 서사가 영화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 그 경향과 특성을 살펴본다. 모성 신화가 오늘날 어떤 서사로 재생산되는지, 모성 신화를 해체하기 위한 시도들은 어떤 것이 있는지, 모성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어머니는 어떤 형태가 될지, 여성 개인으로서의 자의식과 어머니 역할은 어떻게 충돌하는지 영화 분석을 통해 알아보는 것이 그것이다. 이는 궁극적으로 포스트페미니즘 시대에 여성의 주체적 삶과 어머니 역할이 공존할 수 있는 길을 인문학적 관점에서 모색하는 하나의 제언이기도 하다. 

 

정미경 경기대·글로벌어문학부

경기대학교 글로벌어문학부 교수. 서울대학교 독어독문학과 및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독일 베를린자유대학에서 '이방인과 양가성'에 대한 주제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주요 연구 분야는 독일 현대문학, 젠더, 영화와 문학, 아동청소년문학 등이다. 지은 책으로 『키치의 시대, 예술이 답하다』, 공저로 『문학의 탈경계와 상호예술성』, 『독일영화 20』, 『오늘날의 유럽』이 있으며, 옮긴 책으로 『몸앓이』, 『팀 탈러, 팔아 버린 웃음』, 『지붕 위의 카알손』, 『카알손은 반에서 최고』, 『돌아온 카알손』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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