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의지가 책임 원칙의 존재 이유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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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지가 책임 원칙의 존재 이유인가?
  • 민경국 논설고문/강원대 명예교수·한국자유주의학회 회장
  • 승인 2023.12.17 07: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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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경국 칼럼]

자유와 책임은 서로 불가분의 관계다. 자신의 행동에 대하여 책임을 지지 않는다면 혼란이 초래한다. 책임 윤리가 없으면 자유 사회는 불가능하다. 그런데 지성사나 정치사에서 가장 오래된 그리고 아직도 생생히 살아 있는 믿음이 있다. 그런 믿음은 책임 원칙의 전제는 자유의지라는 것이다. 인간이 어떤 인과성에도 예속되지 않고 마음먹은 대로 자신의 행동을 결정한다면, 이를 ‘의지론’이라고 말하는데, 그 행동과 행동결과에 대하여 그에게 책임을 물을 수도 비난 또는 칭찬도 할 수 있다고 한다. 이에 반하여. 만약 인간이 마음먹은 대로 할 수 없는, 따라서 인과성에 좌우된다면, 이를 ‘결정론’이라고 말하는데, 그의 행동과 행동결과에 대하여 그에게 책임을 부여할 수도, 죄도 있을 수 없고, 그를 칭찬이나 비난해서도 안 된다고 한다. 

따라서 철학적, 정치적 논쟁은 자연히 인간행동은 인과적 결정의 산물이냐, 아니면 인과적 연쇄의 바깥에 존재하는 자유의지의 산물이냐의 논쟁으로 압축되었다. 이 논쟁은 철학적 사유의 차원에서는 물론, 현실의 정치와 재판, 입법 그리고 경제 등 많은 실천적 분야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의지론 vs. 결정론: 유령 같은 문제

그러나 이 논쟁에서 특이한 사실은 어느 경우에도 결론이 그 전제로부터 도출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의지론에서 인간은 인과법칙의 밖에서 행동하기 때문에, 칭찬이나 비난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 것으로 간주할 수 있는 ‘자아’의 구축은 단지 인간의 책임면제만을 정당화시킬 수 있을 뿐이다. 이에 반하여 책임 개념은 결정론적 견해에 기초하는 게 의미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즉 자아는 칭찬이나 비난에 영향을 받는 것으로 여길 수 있다. 따라서 하이에크가 정곡을 찔렀듯이, 자유의지 여부와 관련된 전체 쟁점은 실체가 없는 유령 같은 문제라고 볼 수밖에 없다.

1980년대 뇌과학자들은 전에 없던 매우 정밀한 최첨단 도구를 가지고 두뇌 속을 샅샅이 뒤졌지만, 자유의지는 없고 오로지 물리·화학적으로 인과적으로 작동하는 신경구조만 있을 뿐이었다. 신경구조와 독립적인 자유의지 또는 자아 같은 것은 없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정신의 존재론적 근거는 없다

1974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였던 프리드리히 하이에크가 이미 100여 년 전에 자유의지의 존재를 부정했다. 그가 21살에 썼던, 흥미롭게도 오늘날 뇌과학의 효시(嚆矢)로 알려진 『감각적 질서(The Sensory Order)』(1921/1952, 민경국 역, 자유기업원 2000)에서 인간행동의 자연주의적 인과성을 강조함으로써 자유의지(정신)의 존재론적 근거를 부인했다. 모든 인간행동은 물리적 과정에 의해서 인과적으로 결정되지만(신경결정주의), 자동인형과 같이 행동이 미리 정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자유의지를 반대하는 극단적인 사람도 인간행동이 기계적으로 결정된다는 것을 수용하지 않는다.

하이에크는 자유의지가 없다고 해서 특정한 행동은 특정한 물리적 환경의 필연적 결과로 인정될 수 있다는 유물론적 결정주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행동은 “유전적 소질과 축적된 경험, 그리고 과거의 개인적 경험에 비추어 해석된 새로운 경험이 함께 영향을 미처 결정된다." 따라서 외부의 물리적 영향에서 차단된, 다시 말해 인과연쇄의 바깥에 존재하여 인과관계를 통제하는 자유의지(자아, 나)란 존재하지 않는다.

 
책임 윤리는 교육적 기능

우리가 개인에게 자신의 행동과 행동결과에 대하여 책임을 부여하는 것은 ‘달리 행동할 수 있었음에도 그렇게 행동했다는 이유 (의지의 자유) 때문이 아니다. 질서정책에서는 과거 회고적이 아니라 미래 전망적이다. 그리고 자유도 개인 차원의 심리적 차원이 아니라 행동 차원의 자유다. 그래서 책임을 부여하는 것도 행동에 영향을 미쳐서 바람직한 방향으로 행동을 유도하기 위해서다. 사람들을 칭찬하고 비난하는 것도 그들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기 위한 것이다. 게임이론의 의미로 표현한다면, 변절자에게 책임을 부여하여 비협력적 게임을 협력적 게임으로 만들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책임 원칙의 존재 이유는 교육적 기능 때문이다. 이는 사람들의 자유로운 의사결정을 이끌고 또 그들의 행동을 보다 더 합리적으로 만드는 데 있다. 개인들이 잘못을 저지를 경우 이에 대하여 책임을 진다는 것을 미리 알게 되면 그들은 조심스럽게 그리고 신중하게 행동한다. 책임 원칙이 적용되어 책임을 의식하게 만들면 그렇지 않을 때에 취하게 될 장래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고 또 그런 행동을 변경할 것이다.

 

민경국 논설고문/강원대 명예교수·한국자유주의학회 회장

강원대학교 경제학과 교수를 거쳐 현재 같은 대학 경제학과 명예교수이다. 서울대학교 문리대를 졸업하고 독일 프라이부르크대학교 경제학 석사·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하이에크소사이어티 회장과 제도경제학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사)한국자유주의연구회 회장을 맡고 있다. 주요저서로는 『하이에크, 자유의 길』, 『국가란 무엇인가: 자유주의 국가철학』, 『자유주의의 도덕관과 법사상』, 『자유민주주의란 무엇인가』, 『시장경제의 법과 질서』, 『하이에크 자유주의 사상 연구』, 『경제사상사 여행』 등 다수의 저서와 역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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