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적인 현상, 뮤지컬 〈드라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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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적인 현상, 뮤지컬 〈드라큘라〉
  • 최승연 뮤지컬평론가
  • 승인 2023.12.13 1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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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승연의 〈뮤지컬 인사이트〉

 

뮤지컬 <드라큘라>가 한국 초연 10주년을 맞았다. 한국에 소개된 두 가지 버전의 드라큘라 뮤지컬 중 2014년에 초연된 브로드웨이발 <드라큘라> 이야기다. 현재 샤롯데씨어터에서 공연되고 있는 <드라큘라>는 1995년에 한국 초연된 체코발 <드라큘라>와는 다른 작품으로, 한국과 일본에서 특히 유명한 프랭크 와일드혼이 작곡했다. 대본/가사에 돈 블랙 & 크리스토퍼 햄프턴, 연출/안무에 데이비드 스완, 그리고 오디컴퍼니가 제작했다.

현재 10주년 이상 공연되는 작품이 늘어나고 있는 현상은 한국 뮤지컬 시장이 스테디셀러를 계속 만들어내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 현상은, 해당 공연들로 한국 시장의 특징이 규명되고 이를 통해 안정적인 기반이 마련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작품 내부적으로는 공연이 10년 이상 꾸준히 흥행하는 이유가 분석될 필요가 있다. 

사실 <드라큘라>는 프로덕션의 규모와 지향점에 비해 대중적으로 덜 알려진 공연이다. 한국에서는 카메론 매킨토시의 메가 뮤지컬을 카운터파트(counterpart)에 놓을 수 있지만, 미국 내에서는 영국발 뮤지컬의 ‘침공’으로 개념화되는 매킨토시의 뮤지컬에 비해 자국의 와일드혼 뮤지컬은 사실상 B급으로 인식되는 편이다. <드라큘라>는 2001년 샌디에이고 초연 이후 2004년 브로드웨이에 입성했으나 1년을 채우지 못하고 막을 내렸다. 뉴욕 타임즈의 공연 평론가 벤 브랜틀리(Ben Brantley)는 ‘해변의 놀이공원에 있는 빅토리아 시대 밀랍인형들’이 활기와 서스펜스를 만들고 섹스어필 하는 공연이라고 혹평했다. 그는 와일드혼의 전작 <지킬 앤 하이드>, <스칼렛 핌퍼넬>, <남북전쟁> 등을 ‘비싼 옷을 입힌 고물차’라고 표현하기까지 했다(Ben Brantley, “Theater Review: The Bat Awakens, Stretches, Yawns”, The New York Times, 2004. 8. 20). 실제로 <드라큘라>는 루시 웨스턴라를 연기했던 켈리 오하라의 누드 장면에 말초적인 관심이 쏟아졌을 뿐 브로드웨이에서는 자리를 잡지 못했다. 브로드웨이의 관점으로 보면, 스위스를 비롯한 유럽, 일본, 호주, 그리고 한국에서 꾸준히 공연되고 있는 비주류 포지션에 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23드라큘라] 공연사진_드라큘라 역_김준수, 전동석, 신성록 (제공. 오디컴퍼니(주))

이러한 배경은 ‘한국 공연 10주년’을 더욱 주목하게 만든다. 무엇보다도 한국 버전 <드라큘라>의 성공에는 매우 한국적인 현상이 개입되어 있다. 서사적 층위에서 뮤지컬 <드라큘라>는 브램 스토커의 원작 소설(1897)에 토대를 두고 있으나 드라큘라와 미나 머레이의 관계를 완전히 재해석함으로써 소설의 세계관에서 벗어난다. 소설에서 드라큘라는 ‘주체’가 아닌 ‘대상’이다. 여러 화자들이 일기, 편지, 전보에 1인칭 시점으로 전개한 내용과 스크랩된 신문 기사들이 다양한 관점으로 드라큘라를 묘사함으로써 그의 정체에 접근해 들어간다. 이런 특수한 서술 방식 때문에 소설에서는 끝까지 드라큘라가 누구인지 완전하게 규명되지 않는다. 그는 동물과 인간, 문명과 야만, 과학과 신화, 현대와 원시의 사이에 있는 중간자적 존재, 혼종적 존재로 이야기될 수 있을 뿐이다. 

또한 미나는 교사라는 직업을 가진, 타자기를 잘 다루는 빅토리아 시대 신여성으로 묘사된다. 그녀는 사건을 하나하나 기록하며 남편 조나단과 반 헬싱 일행이 드라큘라를 소멸시키는 데 절대적인 공헌을 한다. 드라큘라에게 흡혈을 당한 후에는 정신적 연결 상태를 이성적으로 역이용하여 드라큘라의 위치를 추적하는 네비게이터 역할을 담당하기도 한다. 반 헬싱은 이런 미나를 두고 ‘매우 뛰어난 남자의 두뇌와 여자의 심장을 겸비한 사람’이라 말한다. 미나는 급진적인 여성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남편 조나단에게 헌신하는 정숙한 여인이며, 드라큘라 소멸 후에는 완전한 인간으로 돌아와 조나단과 가정을 꾸리는 모습으로 귀환했던 것이다.  

 

                       [23드라큘라] 공연사진_미나 역_임혜영, 정선아, 아이비 (제공. 오디컴퍼니(주))

이와 같은 드라큘라의 미스터리한 정체와 미나의 서사적 위치는 그동안 수많은 해석을 낳았다. 뮤지컬의 해석은 예상할 수 있듯 단연 ‘사랑’에 있다. 뮤지컬은 미나가 드라큘라의 아내 엘리자벳사였다는 설정으로 원작을 틀어 ‘영원한 사랑’이라는 테마를 초점화한다. 이에 따라 드라큘라는 목표와 욕망이 명확한 인물이 되며, 미나 역시 드라큘라와 남편 조나단 사이에서 갈등하는 전형적인 서사 패턴에 놓인다. 이들의 관계를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다음과 같다. 드라큘라는 400년 전 신을 위한 전쟁에 참전했다가 아내 엘리자벳사를 잃고 절망하여 신을 저주함으로써 불멸의 흡혈귀가 되었다. 그는 그 긴 시간 동안 피와 외로움에 굶주리며 저주받은 삶을 버틴다. 언젠가 엘리자벳사를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일념은 드라큘라를 죽었지만 살아 있는(un-dead) 존재로 만든다. 변호사 조나단 하커의 아내 미나는 드라큘라를 만난 후 사랑과 윤리 사이에서 갈등하다 결국 드라큘라를 운명적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미나를 흡혈하여 자신과 같은 불멸의 존재로 만들고 싶었던 드라큘라는 ‘영원한 사랑’이 무엇인지 깨닫고 미나의 손에 자신의 칼을 쥐어준 채 그 칼을 심장에 찔러 넣어 자신이 완전히 소멸하는 길을 선택한다. 

뮤지컬의 인기는 원작과 다른 서사의 행간들을 배우와 관객이 채워 넣는 과정 안에서 폭발된다. 이것은 서사가 불완전해서가 아니라 너무 전형적이고 뻔해서 오히려 다른 해석이 자유롭게 개입될 수 있는 여백이 생성된다는 의미에서다. 배우들이 전체 서사의 틀 안에서 자신이 원하는 세부 서사를 어떤 뉘앙스로 가미해도 관객은 공연의 흐름과 내용을 이해할 수 있으며, 오히려 그 가미되는 뉘앙스들이 배우들 각각의 매력을 만들어낸다. 가령, 초연부터 지금까지 드라큘라를 연기하고 있는 김준수는 ‘빨간 머리카락’을 대표적 이미지로 굳혔는데 그 이미지 안에는 흡혈한 피가 머리카락 색까지 바꿨다는 세부 서사가 들어 있다. 공연에서는 이에 더해 땀이 머리카락의 염색약과 섞여 ‘빨간 땀’으로 흘러내리는 상황도 연출된다. 김준수가 연기하는 드라큘라는 이러한 뉘앙스가 중첩되며 ‘강렬함’을 핵심어로 완성된다. 그의 정념이 무대에 흘러넘치는 가운데 드라큘라는 공포스러운 존재가 아닌 ‘고결하고 순수한 영원한 사랑’이라는 추상적 개념 그 자체가 된다.

 

      [23드라큘라] 공연사진_반 헬싱 역_손준호, 박은석, 조나단 역_진태화, 임준혁 (제공. 오디컴퍼니(주))

무대미술과 음악도 드라큘라의 흥행을 이끈다. <드라큘라>의 무대는 공연에 필요한 모든 장면을 물리적으로 구현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3겹의 바닥 턴테이블과 9개의 기둥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며 구현되는 무대는 무대미술의 한계를 극한까지 밀어붙인다. 9개의 기둥에 각각 크루들이 붙어 수작업으로 전환되는 무대 위에서 배우들은 모든 장면을 마스터피스로 힘주어 완성시킨다. 여기에 큰 역할을 하는 것이 음악이다. 프랭크 와일드혼의 음악은 한국인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톤과 멜로디로 모든 장면의 정서와 분위기를 최대치로 끌어올린다. 장면의 아리아는 마치 가수의 콘서트처럼 증폭된 상태에서 끝나며, 무대 세트가 복잡하게 돌아가는 암전 상태에서 관객의 환호와 박수는 충분한 간격을 두고 울려 퍼진다. 가장 콘서트처럼 진행되는 김준수 회차는 콘서트와 같은 호흡으로 모든 장면에 방점을 찍는다. 공연 초반, 그가 쭈글쭈글한 가면을 벗고 회춘하는 장면은 이제 그의 드라큘라가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신호탄처럼 작용한다. 이 외에 다른 드라큘라를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하고 압도적이다. 
 
<드라큘라>의 성공은 한국적인 현상이다. 상업 뮤지컬의 정점에 서 있는 <드라큘라>가 시즌을 거듭하며 완성도를 높이고 있는 양상에서 작품의 생명력을 더욱 길게 연장하겠다는 제작사의 의지가 읽힌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 배우들의 세대가 교체되면 어떤 공연 문법이 생성될지 관찰될 필요가 있다. 관객과 함께 쌓이는 공연의 역사는 그 자체로 아카이빙의 가치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최승연 뮤지컬평론가

런던대학교(로열 할러웨이)에서 연극학 석사, 고려대에서 국어국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국제한국학센터 연구교수, 워싱턴 대학교(시애틀) 동아시아학과 객원연구원, 청강문화산업대학교 공연예술스쿨 교수 등을 역임했다. 주요 논저로는 “청년 테마로 본 뮤지컬: 팬덤의 참여욕망과 수행성에 대한 고찰”, “라이선스 뮤지컬의 현지화에 대한 일고찰”, “확장하는 보편, 타협하는 로컬리티”, “해방 후 오영진의 좌표와 음악극 실험”, “만들어진 비애와 감성의 연대”, 『미국 뮤지컬과 국가정체성의 형성』(공역), 『멜로드라마적 상상력』(공역)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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