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수각과 동헌 … 〈한일고금비교론〉 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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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수각과 동헌 … 〈한일고금비교론〉 ⑪
  • 조동일 논설고문/서울대학교 명예교수·국문학
  • 승인 2023.12.09 2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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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일 칼럼]

일본에 가면 天守閣(탠슈가쿠)이 놀라운 구경거리이다. 거대한 성안 높은 곳에 여러 층으로 우뚝하게 서 있는 흰색 건물이 天守閣이다. 가장 크다는 大阪(오오사카)의 것과 가장 아름답다는 姬路(히메지)의 것은 안에 들어가 오르고, 다른 것들은 바라다보았다.

天守閣이 놀라운 이유는 크고 웅장한 데만 있지 않고, 한국에는 비슷한 것도 없기 때문이다. 지방의 官長(관장)이 임무 수행에 사용하는 공공건물인 점에서, 일본의 天守閣은 한국의 東軒(동헌)과 비교할 수 있다. 이 둘은 공통점은 적고 차이점은 많다. 일본과 한국은 동질성보다 이질성이 더 큰 것을 말해주어, 여러 측면에서 검토할 필요가 있다.

天守閣과 東軒은 한자 이름을 사용하는 것이 같으면서, 天과 東, 守와 무엇, 閣과 軒이 달라 대조가 된다. 天은 높은 곳이고, 東은 동쪽이다. 守라고 한 수비와 대조를 이루는 것은 治라고 할 통치이겠는데, 필요하지 않아 생략했다. 閣과 軒은, 가족과 함께 거주하는 예사 집이 아닌 별난 건축물이다. 그러면서 閣은 특정한 임무를 수행하기에 알맞게 닫혀 있고, 軒은 누구나 찾아올 수 있도록 열려 있다.

天守閣은 홀로 우뚝하다. 大阪의 것은 8층, 姬路의 것은 5층이다. 올라가면 사방이 잘 보인다. 성안의 다른 모든 건물, 이름이 밝혀져 있지 않는 것들을 일방적으로 압도한다. 침입자가 성문으로 들어와도, 길이 여러 겹 굽어 있어 당황해 하다가 격퇴되게 한다. 성 주위에는 깊은 해자가 있어 건너기 어렵다. 비싼 입장료를 내고 들어갔어도, 쫓겨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東軒은 가족을 위한 內衙(내아), 손님을 위한 客舍(객사)와 같은 높이로 이웃해 있다. 서열은 客舍ㆍ東軒ㆍ內衙 순이다. 鄕廳(향청), 作廳(작청), 將廳(장청), 官奴廳(관노청) 등의 이름을 가진 다른 여러 건물도 당당하다. 담이 있어도 영역을 구획하는 구실이나 한다. 해자는 물론, 성이랄 것도 없다. 관아 건물이 민가와 이어져 있다. 그 앞에 으레 있는 국밥집이 지금도 많은 손님을 맞이한다.

건물의 구성에서 차등론과 대등론의 차이가 잘 나타난다. 차등론을 잘 보여주며 예사롭지 않은 것을 과시하는 일본의 天守閣은 영탄의 대상이 되어, 관광객이 넘친다. 멀리서 온 서양인도 많다. 나도 끼어들어 인파에 밀리며 구경했다. 東軒은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방식에는 큰 차이가 없다고 하면서 대등론을 확인해, 인기가 없다. 건물을 복원해 놓아도, 호기심을 가지고 모여드는 사람들이 없다. 관광 수입 경쟁에서 완전히 패배하는 것을 알고, 입장 무료로 한다.

하늘에 높이 솟은 天守閣에서 수비 임무를 수행하는 관장은 모두 武士(부시)이다. 동쪽으로 열려 있는 東軒에서 통치 임무를 수행하는 관장은 대부분 文士(문사)이다. 天守閣에서 수행하는 수비 임무는 예상되는 침입군과의 전투에서 이기는 무력을 갖추도록 요구한다. 명품 칼이 큰 자랑이다. 東軒의 文士 관장은 말로 백성과 소통하며 방법으로 통치의 임무를 수행한다. 소통을 잘하도록 하는 명언을 마음에도 벽면에도 새겨둔다. 天守閣의 위세와 東軒의 소통이 좋은 대조가 된다.

大名(다이묘)이라고 하는 天守閣의 주인은 지위가 세습되었다. 전국의 지배자 將軍(쇼군)이 축출하거나 다른 大名의 공격을 받고 패배하지 않는다면, 능력 검증 없이 기득권을 대대로 누렸다. 東軒의 관장은 과거 급제로 상당한 학식이 공인되어야 자격을 얻었다. 다른 임무를 맡고 경험과 경력을 쌓다가, 지방 행정을 맡으라는 명령에 따라 부임해 임기 동안만 봉직했다. 감시의 대상이어서, 부정이 적발되면 파직되었다. 어느 쪽이 그 지역 주민들에게 더 유익했는지 생각해볼 일이다.

과거 시험에는 부정이 따를 수 있다. 학식은 오용될 수 있다. 관장 임용이 뇌물에 좌우될 수 있다. 부임해 가렴주구를 일삼으며 치부를 할 수 있다. 감시 방법이 많아도 효력이 의문이다. 그 때문에 개탄하고 질책하는 소리가 높았다. 관장 노릇을 해보지 못하고 귀양살이를 한 丁若鏞(정약용)이 <牧民心書>(목민심서)를 써서 많이 나무라도 소용이 없었다.

이런 이유를 들어 관장 세습제가 더 좋았다고 할 것인가? 大名은 다스리는 지역 전체가 자기 소유여서 부정을 저지를 필요가 없었다. 수탈을 삼가고 농민을 보호해야, 얻는 것이 더 많았다. 교육부장관을 지낸 한국의 교육학자가 “일본에서는 세금을 다 낸 농민은 철저하게 보호했는데, 한국의 관장들은 끝없는 착취를 했다”는 요지의 글을 써냈다. 그 때문에 한국의 농민이 더 불행했던가?

아니다. 농민의 행불행은 두 가지 요인으로 결정된다. 하나는 토목공사의 규모이다. 天守閣을 세운 성의 축조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토목공사이다. 하단의 바위가 너무 커서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이와 견주어보면 東軒이 있는 관아를 짓는 작업은 아주 소규모이다. 동원된 농민이 고난을 겪은 정도가 아주 다르다. 농민이 고생한 정도를 명확하게 입증해준다.

또 하나 더욱 결정적인 요인은 인구 비례 군인의 수이다. 아주 오랜 기간 동안 어디서나 농민이 농사를 지어 얻는 소출은 한정되어 있었다. 그 가운데 상전이 먹을 것을 가져가고 나머지를 자기 차지로 하면, 농민이 그런대로 살아가며 다시 농사를 지을 수 있다. 상전과 군인 양쪽이 먹을 것을 덜어내면, 농민은 생존이 어려워진다.

다스림을 일로 삼는 상전의 비율은 어디서나 비슷했다. 경쟁을 줄이려고 자체 조정을 했기 때문이다. 군인은 마구 늘일 수 있고, 일을 잘하는 농민 가운데 선발하므로, 남아 있는 농민을 더 힘들게 한다. 이것이 일본의 상황이다. 한국은 군인의 수가 적어 농민이 고통을 덜 받았다. 文治(문치)가 武治(무치)보다 농민을 더 잘살게 하는 것이 불변의 사실이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농민이 신음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고, 비판하는 논의가 발견되지 않는다. 이것은 무슨 까닭인가? 일본 농민이 더 잘살았다는 증거로 오해하지 말고 숨은 이유를 찾아야 한다. 농민은 기력이 모자라고 보복이 두려워, 아예 입을 다물었나? 농민의 처지를 이해하고 대변할 지식인이 없었던 것이 더욱 중요한 이유이다. 이런 사정이 겹쳐 일본에서는 밑으로부터의 역전이 일어나지 않는다.

일본은 天守閣이 잘 보여주는 차등론을 극대화해 국력으로 삼고 침략자가 되었다. 그 때문에 우리만 피해자가 되지 않고 일본 백성도 참혹한 시련을 겪었다. 物極必反(물극필반)의 원리에 따라 일본이 전쟁에서 패배하고 재출발을 하지 않을 수 없었으나, 깊이 반성하지 않는다. 차등론에 미련을 가지고, 우월감의 근거로 삼으려고 한다.

한국은 일본의 차등론과 대조가 되는 대등론의 독자적인 전통을 시대 상황에 맞게 활용하지 못하고 훼손하다가 국권을 상실했다. 식민지 통치에 항거하는 동안에 얻은 자각을 동력으로 삼고, 차등론을 대등론으로 넘어서는 비약을 이룩하고 있다. 여러 분야에서 한일 역전을 일으키고 있다.

그 때문에 일본이 위축될 필요는 없다. 한국과 모자라는 것을 보충해주는 대등한 관계를 가지고, 함께 나아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유럽문명권의 차등론을 청산하고 지구 전역에서 대등론을 실현하는 대전환을 위해 힘쓰는 것이 마땅하다.

天守閣을 보고 나오면서 생각했다. 축성 공사에 동원된 엄청난 힘이 어딘가는 남아 있을 것이다. 학문에서 되살려 세계사의 거대한 바퀴를 함께 돌리자고 말하고 싶다.

 

조동일 논설고문/서울대학교 명예교수·국문학

서울대학교 불어불문학과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으며 같은 대학 대학원 국어국문학과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계명대학교, 영남대학교, 한국학대학원 교수를 거쳐 서울대학교 교수를 지냈다. 서울대 명예교수이자 학술원 회원으로 계명대학교 석좌교수를 역임했으며 현재 중국 연변대학 명예교수이기도 하다. 주요 저서로 <서사민요연구>, <한국문학통사>(전6권), <우리 학문의 길>, <인문학문의 사명>, <소설의 사회사 비교론>(전3권), <대등한 화합: 동아시아문명의 심층>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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