꽤나 복잡한 월지의 행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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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나 복잡한 월지의 행적
  • 연호탁 가톨릭관동대학교 인문도시 사업단장
  • 승인 2023.12.09 1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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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호탁 교수의 〈말로 푸는 역사 기행〉_ 꽤나 복잡한 월지의 행적

 

“以銅爲鏡, 可正衣冠. 以史爲鏡, 可知興潜.”(당태종 이세민)

구리로 거울을 만들어 옷차림을 단정히 하고, 역사를 거울로 삼아 흥망이 있음을 알지라. 


불가의 대승경전 중에 『유마경(維摩經)』이 있다. 이 경전이 언제 편찬되었는지 확실치 않으나 중국에서 최초로 번역된 시기가 삼국시대 오(吳)나라 건흥(建興) 2년(253)이므로, 인도에서는 대승불교의 전성기이던 2세기 후반에서 3세기 전반 사이에 완성된 것으로 짐작된다. 정확한 명칭이 『불설유마힐경(佛說維摩詰經)』인 이 경전을 최초로 한역(漢譯)한 사람은 지겸(支謙)이라는 인물이다.

불가에서는 출가승의 성별을 여성 어미 ‘-니’에 의해 구별짓는다. 그래서 비구(比丘)는 남성 스님, 비구니(比丘尼)는 여스님을 가리킨다. 사미(沙彌), 사미니(沙彌尼)는 십계를 받고 불도를 닦는 어린 승려를 이르는 명칭이다.

승단에 속하지 않는 불자의 명칭도 남녀를 구별한다. 우바새와 여성형 우바이(優婆夷)는 출가하지 않은 불교신자들, 즉 남녀 재가신자(在家信者)를 통칭하는 말이다. 우리나라 절에서는 보통 우바새를 거사(居士)(님), 처사(處士)(님)이라고 부른다. 여신도는 대개 보살 또는 보살님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는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보살(菩薩)의 본 의미와는 거리가 있고, 단지 보살계를 받은 불교신자라는 정도의 의미로 사용된다. 보살은 bodhisattva의 음차어인 보리살타(菩提薩埵)의 줄임말이다.

우바새와 우바이는 佛, 法, 僧 3보에 대해 3귀의례(三歸儀禮) 서약을 하고, 불살생 · 불투도, 불사음 · 불망어 · 불음주의 5계(五戒)를 지키고, 선법(善法)을 행해야 한다. 이들을 근선남, 근선녀라 부르는 것은 불법승 삼보(三寶)를 가까이 하는[親近] 남녀란 뜻이다.

支謙이라는 인물로 돌아가서 그는 月支人이라고 전한다. 본래 月支는 정주사회의 국가 체계가 아닌 느슨한 형태의 부족연맹체 성격을 지닌 정치체였다. 월지인들은 기원전 2세기 신흥 유목 집단 흉노와의 파워 게임에서 패하자 서방으로 이주를 감행한다. 서천과정에서 오늘날의 아프가니스탄 북부로 추정되는 박트리아를 정복하고 쿠샨(Kushan) 왕조를 세웠다. 한자로는 귀상(貴霜)이라고 적었다. 그 나라를 한나라 사서는 여전히 월지라 불렀다. 월지국은 불교국가였다.

 

                                                           월지족의 이동 / 위키피디아

월지 상인이나 사신, 승려들을 통해 중앙아시아와 동남아 국가들, 그리고 동북아 지역에 불교 교리의 전파와 세력 확장이 이루어졌다. 중국은 이들 서역국가와의 교류를 통해 일찍이 불교를 받아들였다. 서역과의 왕래가 활발해지며 중국 내지에 들어와 사는 월지인이 늘어나면서 한나라 땅으로 이주한 월지인은 지(支)를 성으로 삼았다.

지루가참(支婁伽讖>支讖), 지량(支亮), 지겸(支謙), 지민도(支愍度), 축법호(竺法護. 竺姓為後改) 등이 다 중국에 불교를 전파한 월지인들이다. 축법호(236~313년)는 처음에는 지법호라고 불렸으나 스승인 축고좌(竺高座)의 성을 따서 축법호라고 고쳤다. 그의 이름 법호(法護)는 산스크리트어 다르마락샤(Dharmaraksa)의 훈차어다. 다르마는 흔히 달마(達摩)로 음차되며 ‘法, 진리’라는 뜻을 지닌 말이다. 중국 소림사를 개창한 달마대사의 이름이 바로 그러하다.

이 정도의 정보만도 월지에 대해 관심 없는 사람에게는 골치 아픈 법이다. 그런데 月支의 語音과 語義 문제를 잠시 잊고 나름 한가롭게 지내던 어느 날, 우연찮게 예상치 않은 곳에서 월지의 흔적을 다시 만났다. 아무래도 월지와는 끊을 수 없는 그 어떤 인연이 맺어져 있는가 보다.

발견이나 발명은, 위대한 것이든, 미미한 것이든, 우연히 이뤄지는 경우가 많다. 사람과 사람 집단을 가리키는 명사 어미로 ‘-나(na)’를 사용하는 집단은 돌궐계통에 속한다는 관찰이 그렇다. 6세기 중반 몽골 초원 오르혼 강 유역에 수립된 돌궐 제2제국의 우두머리 집단은 아시나 부족이다. 게르만 민족의 대 이동을 촉발한 흉노(匈奴)를 서방에서는 훈나(Hunna)라고 불렀다.

 

                                                                 흉노의 이동 경로

우리말 어휘 중에 사람을 지시하는 어미로 ‘-나’를 쓴 경우가 ‘가시나’와 ‘사내~사나이’ 외에 고구려 건국을 주도한 다섯 개의 지역 정치체인 5部 명칭 중 계루부(桂婁部)를 제외한 순노(順奴), 연노(涓奴), 관노(灌奴), 절노(絶奴) 4부가 있다(삼국지 위서 동이전). 삼국사기는 이들을 환나(桓那), 비류나(沸流那), 관나(貫那), 연나(緣那) 등이라고 묘사하고 있다. 이들은 각각 동서남북 사방을 나타낸다: 

❶ 순노 또는 환나: 동방, 좌측, 청색
❷ 연노, 소노(消奴): 비류나, 서방, 우측, 백색
❸ 관노나 관나: 남방, 전방, 적색
❹ 절노, 제나, 연나: 북방, 후방, 흑색
❺ 계루: 중앙, 내부, 황부(皇父)

이들 노(奴) 또는 나(那)는 부족 수준의 사회적 단위를 가리키는 말이다. 나(那)는 하천변의 토지를 뜻하는 천(川), 양(壤)과 같은 뜻으로 여진어와 만주어, 그리고 툰드라 순록유목민 언어인 나나이어의 ‘나’와도 통하는 말로, 고구려 형성에 핵심 역할을 한 어미 ‘-나’ 사용 집단은 하천이나 강을 끼고 세력을 구축한 집단으로 추측된다.

다른 지역에서도 그렇지만 우리나라 동해안 지역 남자들은 아직도 어린 여자나 처녀를 가시, 가시나(>갓나) 등으로 부른다. 발음상 간나, 갈라 라고도 한다. 가시가 버시와 짝을 이뤄 쓰이기도 한다. 사전을 찾아보면 ‘부부(夫婦)를 낮잡아 부르는 말, 즉 낮춤말’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그런데 이 말은 일상의 언어생활, 특히나 상류층에서는 점잖지 못하다고 거의 쓰이지 않는다. 부부와 같은 의미로 ‘부처(夫妻)’나 ‘내외(내외)’, ‘이인(二人)’ 외에 ‘항배(伉配)’와 같은 어려운 한자어가 쓰인다. 흥미롭게도 ‘가시버시’가 중세국어나 근대국어의 문헌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대신 중세에는 ‘부부(夫婦)’를 뜻하는 말로 ‘남진겨집’이 주로 쓰였다. 그리고 ‘남진계집’으로 변모하여 근대에까지 생존했다. 현대에 이르러서는 소실 위기에 처해 있다. 

 

연호탁 가톨릭관동대학교 인문도시 사업단장

한국외대에서 영어학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명지대에서 중앙아시아사 전공으로 두 번째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가톨릭관동대 관광경영학과 명예교수로 그동안 『중앙일보』에 ‘차의 고향’, 『동아일보』, 『중앙일보』, 『문화일보』 등에 칼럼 ‘문명의 뒤안, 오지 사람들’, 『교수신문』에 ‘욕망의 음식: 음식문화사’를 연재했다. 저서로는 『문명의 뒤안 오지의 사람들』, 『차의 고향을 찾아서』, 『궁즉통 영어회화』, 『중앙아시아 인문학 기행: 몽골 초원에서 흑해까지』, 『문화를 여행하다: Travel, Culture&People』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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