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은 셀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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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은 셀프”
  • 조원형 편집기획위원/서울대·언어학
  • 승인 2023.12.04 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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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원형 칼럼]

서울 명동의 한 음식점 정수기에 아래와 같은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사진: ‘물은 셀프’ / 2023년 11월 24일 조원형 촬영>

물은 셀프. 한국인에게는 꽤 익숙한 말일 것이다. 세계에는 음식점에 가면 물을 따로 주문해서 마셔야 하는 지역이 적지 않지만 한국의 웬만한 음식점에서는 이처럼 손님들이 물을 마음껏 떠다 마실 수 있다. 이는 한국의 수자원이 그만큼 풍부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2012년 기준 자료이기는 하나 UN에서도 한반도 전역을 ‘물이 거의 내지 전혀 부족하지 않은 지역’으로 분류한 바 있다. (출처: https://www.un.org/waterforlifedecade/scarcity.shtml (2023년 12월 4일 확인)) 더구나 대한민국은 화강암 지대가 널리 분포되어 있다는 지질학적 특성 덕분에 단지 물이 풍부하기만 할 뿐만 아니라 깨끗한 물을 구하기도 수월한 지역에 속한다.

그러다 보니 음식점에서 손님이 물을 마음껏 직접 가져다 마시는 것은 한국을 찾은 외국인들에게 꽤 낯선 모습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만큼 대다수 음식점들을 비롯해 물을 제한 없이 제공하는 곳에서는 이 사실을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도록 공지하고 안내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물은 셀프’는 영어로 어떻게 번역해야 할까. 적어도 ‘water self’는 아닐 것이다. 영어에 ‘self-service’라는 말이 있기는 하지만 이 말을 ‘self’로 줄일 수는 없다. 이것을 ‘셀프’로 줄여 말하는 것은 ‘셀프서비스’를 외래어로 받아들인 한국어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그러니 한국어로는 이미 관용어구로 굳어진 ‘물은 셀프’라는 말을 써도 큰 문제가 없겠지만 영어로는 다른 표현을 써야 한다.

하지만 이 문제를 놓고 영어를 잘못 쓴 음식점 업주만을 탓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처럼 사용 빈도가 높은 관용어구들은 사실상 공공언어의 영역이기도 하다. 그런 만큼 국립국어원 등 공신력 있는 기관에서 서비스 분야 관용어구 번역 자료집을 만들어서 민간에 배포하고 홍보해 주었으면 한다. 이렇게 하면 외국어가 익숙하지 않은 사람도 ‘물은 셀프’를 영어 등 여러 언어로 어떻게 쓰면 좋을지를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의 여러 음식점에 ‘물은 셀프’라는 안내문을 붙일 수 있는 것은 손님이 물을 쉽게 얻을 수 있도록 정수기나 냉장고와 같은 편의 시설을 갖추어 놓았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음식점 경영자들을 비롯한 서비스 업주들이 ‘번역은 셀프’로 하면서도 그 번역어에 오류가 없게 하려면 번역을 쉬우면서도 정확하게 할 수 있게 해 주는 참고 자료가 필요할 것이다. 이는 누구나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서비스 분야 관용어구 번역 자료집이 꼭 있어야 하는 이유이다.

 

조원형 편집기획위원/서울대·언어학

서울대학교 언어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과 대학원에서 언어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만하임 라이프니츠 독일어연구원 방문학자, 국립국어원 학예연구사 등을 거쳐 현재 서울대학교 기초교육원 강의교수로 일하고 있다. 주요 논문으로 “천주가사에 대한 텍스트언어학적 연구”, “텍스트언어학에 기반한 ‘쉬운 언어(Leichte Sprache)’ 텍스트 구성 시안”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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