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 … 〈한일고금비교론〉 ⑩
상태바
자살 … 〈한일고금비교론〉 ⑩
  • 조동일 논설고문/서울대학교 명예교수
  • 승인 2023.11.26 01:1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조동일 칼럼]

사람이 자기 삶을 스스로 마감하는 자살은 정상이 아니여서 비난받아 마땅하다. 그러니 부득이한 경우에는 자살하는 것이 떳떳할 수 있다. 李恒福(이항복)이 자기 형 이야기를 한 데서 좋은 본보기를 찾을 수 있다. (<<白沙集>> 제2권 <繕工監監役官 將仕郞李公墓誌>)

임진왜란이 닥치자 李恒福은 중책을 맡고 있어, 선조 임금을 모시고 의주로 가야 했다. 줄곧 같이 지내던 형 李松福(이송복)은 관직이 대단치 않은 덕분에 산골로 피란할 수 있었다. 소식을 몰라 갑갑해 하고 있다가, 형이 다음과 같이 되었다는 말을 전해 듣고 아주 애통해 했다.

 

士夫(사부)가 도적을 한 번 만나면 무릎 꿇고 살려달라고 애걸한다. 이것을 계책이라고 여기는데, 옆에서 보면 개돼지 짓이다. 불우하게 공격받아 찢겨 죽는 사람도 많은데, 어리석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차라리 자결해 적의 칼날을 더럽히지 않아야 한다. (이렇게 말하던 형이) 갑자기 도적을 만나자 물에 빠져 죽었다.

 

武將(무장)이 나라를 위해 적과 싸우다가 힘이 모자라 패배하면 자살해야 하는가? 항복하고 목숨을 빌어야 하는가? 끝까지 싸우다가 적의 칼에 죽어야 하는가? 아니다. 자살하는 것이 떳떳하다. 許穆(허목)이 이런 주장을 분명하게 하고, 그런 武將 許完(허완) 찬사를 썼다. (<<記言>> 별집 19권 <贈判書許公碑銘>)

 

明愼師律        군율을 조심스럽게 밝히고
推誠愛士        성심으로 군사를 사랑해,
士卒思死        사졸이 목숨을 걸게 한 것
仁也              어짐이로다.

潼關之報        동관의 보고를 받고
率勵壯氣        앞장서서 사기를 돋우어
破虜全師        적을 격파하고 군사가 온전함은
勇也              용맹이도다.

昏王泯亂        어두운 임금의 혼란으로
穢濁盈塗        더럽고 탁한 것이 가득해도
介潔不汚        더럽혀지지 않고 깨끗한 것은
廉也              청렴이도다.

逢時不利       때가 불리해지자,
誓不辱名       욕되게 하지 않을 이름
自殺以明       자살로 밝힌 것은
決也             결단이도다.

 

빼어난 장수 許完은 네 가지 훌륭한 점이 있다고 했다. 임진왜란 이래로 계속 싸우면서 군율은 조심스럽게 시행하고, 사랑으로 군졸을 움직인 것은 仁(인) 어짐이라고 했다. 북쪽의 여진족을 막던 부대가 潼關(동관)이라는 곳에서 포위되었다는 보고를 받고, 앞장서서 싸워 이긴 것은 勇(용) 용맹이라고 했다. 못마땅한 군주 光海君(광해군) 시절의 혼탁에는 말려들지 않고 물러나 있었던 것을 廉(염) 청렴이라고 했다. 남한산성을 에워싼 청나라의 대군을 소수의 병력으로 공격하다가 패배하고, 자살을 감행해 이름을 깨끗하게 한 것을 決(결) 결단이라고 했다. 仁ㆍ勇ㆍ廉ㆍ決의 훌륭함이 대등하고, 자살한 決이 특별한 의의를 가진다고 하지 않았다.

한국의 武將은 직책이고, 일본의 武士(부시)는 신분이다. 일본의 武士는 국가를 위해 싸우다가 패배한 경우가 아닌데도 자살을 자주 했다. 개인적으로 모욕을 당하거나 억울한 누명을 쓰면 으레 切腹(셋뿌쿠)라고 하는 할복자살을 격식에 맞게 했다. 조선통신사의 일원으로 일본을 다녀온 南龍翼(남용익)은 이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聞見別錄> 風俗)

 

성품이 잔인하고 각박한 짓을 잘하여 설사 형벌을 받아 죽어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스스로 원해 자결하게 될 때는, 목욕ㆍ이발하고서 눈을 감고 염불하며 스스로 배를 가르고 손으로 오장을 움켜내어 죽는다. 구경하는 사람들이 훌륭하다고 칭송하고, 자손도 이름이 나게 된다.

 

明治維新 이듬해인 1869년에 할복자살 관행을 금지할 것인지 논의했다. 서양의 시선이 신경이 쓰인 것이다. 할복자살을 비호하는 논자들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패트릭 스미스, 노시내 옮김, <<일본의 재구성>>, 299면)

 

할복은 이 땅의 정기를 발원으로 하며, 야마토의 혼이 머무는 신전이다. 할복은 이 땅의 미풍양속이며, 우리나라가 외국보다 우등한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가 왜 서양의 유약함을 흉내내 이 관습을 금지해야만 하는가.

 

일본의 武士가 아주 훌륭하다고 널리 알리려고 영어로 책, Bushido: The Soul of Japan is a book written by Inazō Nitobe exploring the way of the samurai(1899)에서 武士의 할복자살을 크게 칭송했다. 책 이름을 번역하면, <武士道, 일본의 魂, 新渡戸稲造가 쓴 책, 사무라이의 길에 대한 탐구>이다. 자료 검증을 철저하게 하기 위해, 해당 대목 원문을 제시하고, 직역한다.

 

Now my readers will understand that seppuku was not a mere suicidal process. It was an institution, legal and ceremonial. An invention of the middle ages, it was a process by which warriors could expiate their crimes, apologize for errors, escape from disgrace, redeem their friends, or prove their sincerity. When enforced as a legal punishment, it was practiced with due ceremony. It was a refinement of self-destruction, and none could perform it without the utmost coolness of temper and composure of demeanor, and for these reasons it was particularly befitting the profession of bushi.

이제 나의 독자들은 셋뿌쿠가 단순한 자살 과정만은 아님을 이해할 것이다. 그것은 제도의 하나이고, 규정이나 의례를 갖추었다. 싸울아비들이 죄를 씻고, 과오를 사과하고,불명예에서 벗어나고, 벗들을 되찾아 그들의 성실성을 입증하도록 한 중세의 고안물이다. 그것이 법률에 의거한 처벌로 강요되더라도, 정해놓은 의례를 따라야 했다. 그것은 스스로 파괴한 자기 자신의 정화이며, 기질이나 몸가짐이 아주 냉철하지 않고서는 실행할 수 없다. 이런 이유에서 武士의 직분과 특히 잘 어울린다. 

 

이 말에 동의할 수 있는가? 온 세계 사람들이 일본의 武士는 과연 훌륭하구나 하고 감탄할 수 있는가? 제도로 공인되고 순서가 의례로 평가되는 최상의 자살이 있어야 한다고 인정하는가? 그런 자살이 거행된다면 찾아가 목격할 용의가 있는가?

이 모든 질문에 대해 나는 “아니다”라고 단호하게 대답한다. 일본에 반감을 가진 한국인이라고 나무라지 말기 바란다. 일본인도 사람이라면 “아니다”라고 하는 것이 당연하다. 세상의 어느 누구도 생각이 다를 수 없다.

불명예가 있다면, 비난을 감수하면서 비상한 노력으로 씻어야 한다. 위협받지 않고 있는 생명을 스스로 훼손해 명예를 구하겠다는 것은 파렴치한 책임회피이고, 용서할 수 없는 본말전도이다. 萬生對等生克(만생대등생극)의 이치에 따라, 모든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 숭고한 도리이다. 

부끄러운 과거를 자랑하지 말고 청산을 위해 함께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 분명한 결론이지만, 실행되지 않는다. 어리석은 과오에 끈덕진 미련을 가진다. 서푼어치 오기 때문에 걷잡을 수 없는 광기에 사로잡힌다.

일본정신 예찬으로 대단한 인기를 누리던 작가 三島由紀夫(미시마유키오)는 군국주의의 부활을 외치며 1970년에 武士들이 하던 방식대로 할복자살을 했다. 그보다 3년 전에 “武士가 가는 길은 죽음이다”, “主君을 위해서 언제든지 죽을 수 있어야 한다”고 하는 책을 써냈다. (<<葉隱入門>>) 어느 主君을 어떤 이유에서 위하려고 죽었는지 의문이다. 죽음을 신앙으로 삼는 것을 자살로 입증하는 아주 어리석은 짓을 했을 따름이다. 그런데도 추종자나 추모자가 이어진다. 

川端康成(가와바타야스나리)는 1968년에 일본 최초의 노벨문학상수상자가 되었다. 일본의 영광이라는 칭송과는 거리가 먼 말로 수상 기념강연을 했다. (<美しい日本の私―その序説>) 남의 말을 인용해 “내가 언제 자살하겠다고 작정해도, 자연은 나를 위해 더욱 아름다우리라”고 했다. 자기는 서양의 것과 정신이나 품격이 다른 동양의 虛無를 추구한다고 했다.

드높은 찬사가 이어지고 있는데, 4년 뒤인 1972에 자살했다. 武士의 할복자살을 이어받지 않고, 가스관을 입에 물고 죽어 있는 것이 발견되었다. 文은 武와 달라 자살의 격식보다 이유가 더 소중하다고 한 것인가? 자연과 함께 아름다움을 누리는 虛無를 실현했다는 말로 예찬하는 소리가 국내외 널리 퍼져 계속 들린다. 제 정신이라고 할 수 없다.

한국문학은 아직 三島由紀夫나 川端康成와 같은 경지에 이르지 못했다고 한탄할 것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 위에서 든 李恒福이나 許穆의 글 같은 것을 다시 쓰고 있다.

일본이 구제 불능이라고 할 것인가? 아니다. 악몽에서 깨어나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 우리 모두 건실한 삶을 예찬하는 대등의 노래를 함께 부르자.

 

조동일 논설고문/서울대학교 명예교수·국문학

서울대학교 불어불문학과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으며 같은 대학 대학원 국어국문학과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계명대학교, 영남대학교, 한국학대학원 교수를 거쳐 서울대학교 교수를 지냈다. 서울대 명예교수이자 학술원 회원으로 계명대학교 석좌교수를 역임했으며 현재 중국 연변대학 명예교수이기도 하다. 주요 저서로 <서사민요연구>, <한국문학통사>(전6권), <우리 학문의 길>, <인문학문의 사명>, <소설의 사회사 비교론>(전3권), <대등한 화합: 동아시아문명의 심층> 등 다수가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