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과 공동체를 가르는 깊은 균열의 정치적 기원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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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과 공동체를 가르는 깊은 균열의 정치적 기원에 관하여
  • 고현석 기자
  • 승인 2023.11.25 14: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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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린연단 〈오늘의 세계〉 제22강_ 박상훈 국회미래연구원 초빙연구위원의 「개인과 공동체」


네이버문화재단의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열 번째 시리즈 ‘오늘의 세계’ 강연이 매주 토요일 네이버 스퀘어 종로에서 진행되고 있다. 여섯 섹션 총 54강으로 구성된 이번 시리즈는 인류 공동체에서부터 개인의 실존에 이르기까지 지금 여기의 어젠다를 새로운 시선으로 담론의 장을 펼친다. 오늘의 사회와 문화 영역에서 일어나는 변화의 추이를 점검해보는 네 번째 섹션 ‘오늘의 사회와 문화’ 제22강 박상훈 연구위원(국회미래연구원)의 강연을 발췌 소개한다.

정리   고현석 기자
사진·자료제공 = 네이버문화재단


개인과 공동체를 가르는 깊은 균열의 정치적 기원에 관하여


박상훈 연구위원은 오늘의 한국이 “성숙한 나라가 지향하는, ‘도덕적으로 자율적인 개인’, ‘연대와 통합의 원리가 우선하는 공동체’, ‘생산과 돌봄 그리고 은퇴 후의 삶을 계획할 수 있는 지역 사회’를 만들 전망은 어둡다 못해 비관적”이라고 하면서 “국가적 차원의 성장과 발전이 왜 개인과 공동체의 안정된 삶과 병행 발전하지 못하고”, “균열과 갈등, 적대와 증오의 심화로 이어지고 있는가”를 질문한다. 이와 관련해 비록 “정치가 모든 것을 설명할 수는 없겠지만, 정치적 차원의 이해와 결합할 때만 사회적ㆍ경제적ㆍ문화적 갈등과 분열은 물론 개인의 심리적 불안과 긴장의 문제도 좀 더 깊이 생각해볼 수 있다”라는 차원에서 ‘정치’를 보다 강조해 들여다볼 것을 제안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국가를 버리고 자연으로 갈 수 없다면 국가를 운영하는 정치의 문제, 특히 정치 실패의 문제를 정말로 진지하게 생각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한다. 그에 이어 세부적 수준에서 “사나운 시민을 만드는 사나운 정치의 문제”, “한국의 정치 양극화”와 그 유형적 특징, “정치 양극화의 한 귀결로서 팬덤 정치”, “팬덤 정치가 낳은 정치가 유형”, 그리고 “적대와 혐오의 정치가 낳는 문제들”, “민주주의에 대한 오해의 문제”를 하나하나 짚어본 다음 이제는 속도전이 아닌 “느린 민주주의를 옹호”할 때가 된 듯하다고 말한다. 

 

지난 11월 4일, 박상훈 연구위원이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 오늘의 세계>의 22번째 강연자로 나섰다. 사진제공=네이버문화재단

1. 빠른 발전의 큰 사회적 비용

이제 대한민국은 제3세계도 개발도상국도 신흥발전국도 아닌, 그 이상으로 발돋움했다. 그러나 국가의 힘을 가리키는 지표들과는 달리 구성원 개인의 행복감이나 사회의 공동체성을 보여주는 지표는 아주 다른 사실을 말해준다. 성숙한 나라가 지향하는, ‘도덕적으로 자율적인 개인’, ‘연대와 통합의 원리가 우선하는 공동체’, ‘생산과 돌봄 그리고 은퇴 후의 삶을 계획할 수 있는 지역 사회’를 만들 전망은 어둡다 못해 비관적이다. 국가적 차원의 성장과 발전이 왜 개인과 공동체의 안정된 삶과 병행 발전하지 못하고, 그와는 정반대의 균열과 갈등, 적대와 증오의 심화로 이어지고 있는가.

사회적ㆍ경제적ㆍ문화적ㆍ심리적 접근도 모두 중요하겠지만, 사회 자체가 갖는 연대와 통합의 능력은 정치의 역할 없이 조망되기 어렵다. 정치가 모든 것을 설명할 수는 없겠지만, 정치적 차원의 이해와 결합할 때만 사회적ㆍ경제적ㆍ문화적 갈등과 분열은 물론 개인의 심리적 불안과 긴장의 문제도 좀 더 깊이 생각해볼 수 있다.


2. 국가를 운영하는 문제의 중요성

국가는 구성원 개인과 공동체를 중시하겠다는 공적 약속을 통해 정당성을 추구하고, 그 기초 위에서 권위를 행사하는 거대한 체계이자 조직으로 작동한다. 국가라고 하는, 인간이 만든 인위적 정치 공동체의 등장 이전과 이후는 전례 없는 자유와 번영은 물론 그에 수반된 새로운 부자유와 갈등을 감수하게 했다. 정치는 바로 이 국가의 문제를 다루는 일을 한다.

싫든 좋든 국가는 인간 삶의 일부이자 이제는 없어서는 안 될 새로운 자연이 되었다. 국가가 그 사회 국민/시민의 모습을 집약하고 있다는 사실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결국 문제의 핵심은 누가 어떻게 국가를 선용하는 방향으로 통제할 수 있는가에 인간과 공동체의 거의 모든 문제가 달려 있다는 점이다. 국가가 인간의 자연적ㆍ사회적 삶의 의제를 진전시키는 방향으로 작용할 수 있는지 아니면 그 반대인지의 문제를 벗어난 적은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치는 실패할 수 있다. 국가도 혼란에 빠질 수 있다. 민주주의에서라면 시민은 언제든지 이런 결과에 직면하고 또 시민 스스로 그런 혼란을 만들 수 있다. 우리가 국가를 버리고 자연으로 갈 수 없다면 국가를 운영하는 정치의 문제, 특히 정치 실패의 문제를 정말로 진지하게 생각해야 한다. 

 

3. 사나운 시민을 만드는 사나운 정치의 문제

정치학은 ‘좋은 정치가 좋은 시민을 만들고, 사나운 정치가 사나운 시민을 만든다’는 자각에서 시작된 학문이다. 한 개인의 좋음과 정치 공동체의 좋음은 분리될 수 없다. 나아가 정치 공동체의 좋음을 실현하거나 보전하는 것이 한 개인의 좋음을 실현하거나 보전하는 것보다 더 크고 우월한 대안이라는 점 역시 부정할 수 없다. 

정치가의 역할 역시 그 연장선에서 생각해볼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전통에 따르면, 말의 내용에 책임성을 가져야 하는 정치가는 시민의 좋은 성품과 자질(ethos) 형성에 기여한다. 정치가를 군주로 표현한 마키아벨리에 따르면 공화주의 정치가의 소임은 시민의 선한 자유의지(virtù)를 발양하게 하는 데 있다. 오늘날에도 시민적 덕성(civic virtue)은 정치가의 좋은 역할 없이 진작되기 어렵다. 

따라서 정치야말로 최고의 시민 교육장이자, 선출된 시민 대표들이야말로 그에 합당한 교육자의 역할을 해야 하는 곳이 아닐 수 없다. 그 결과에 따라 시민 개개인의 삶이 좀 더 평화롭고 건강하고 안전하고 자유롭고 평등할지 그렇지 않고 고립되고 분노하고 적대하고 혐오하고 파괴적이 될지가 달라진다고 할 수 있다. 지금 우리 정치는 시민의 삶에 어떤 역할을 하는 정치일까. 좋은 시민을 만드는 좋은 정치일까, 시민을 사납게 만드는 사나운 정치일까. 우리의 정치가들은 시민적 자유를 증진하는 사람들일까 아니면 파괴하는 사람들일까. 오늘의 한국 사회야말로 정치의 존재 이유를 그 근본으로부터 따져봐야 하는 상황이 아닐 수 없다.


4. 한국의 정치 양극화: 유형적 특징 13가지

정치학자들은 한국의 사나운 정치를 ‘양극화 정치’로 정의해왔다. 정치 양극화는, “정당 정치나 의회 정치가 관용의 범위 밖으로 뛰쳐나가 정치가 해야 할 타협과 조정 대신 극단적 대립으로 치닫는 것”을 가리키는 용어로 자리 잡았다. 우선 한국의 양극화 정치가 갖는 특징을 유형화해보자.

한국의 정치 양극화가 가진 유형론적 특징 13가지 (출처 - 개인과 공동체: 열린연단)

5. 정치 양극화의 한 귀결로서 팬덤 정치

한국의 양극화 정치가 정당 정치를 초점으로 삼는 개념이라면, 팬덤 정치는 대중 정치나 대중 민주주의의 특정 유형에 대해 생각해 볼 기회를 제공한다. 나아가 포퓰리즘 정치의 한국적 유형을 특징화할 수 있는 개념으로서 나름의 장점도 있다.

팬덤 정치는 불합리한 정치다. 시민을 극단적으로 분열시켜 놓고 인간관계를 증오와 혐오로 갈라놓은 뒤 자기들끼리 몰려다니는 어두운 정치다. 서로가 다르게 옳기 위한 정치가 아니라, 자신들만 옳기 위한 정치다. 이런 정치는 정치가 아니라 독단이며, 독단은 민주주의의 적이다. 정치가 이 세상을 밝고 다정한 곳으로 만들어야 할 소명을 버리면 우리 삶이 위험해진다. 팬덤 정치는 우리에게 그런 정치의 희망을 빼앗아가는 정치다.

 

6. 팬덤 정치가 낳은 정치가 유형

팬덤 정치가 한국적 포퓰리즘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면 그 핵심은 악성 포퓰리즘이라는 데 있다. 팬덤 정치는 정치적 대표의 범위를 제한하고, 사회적으로 중요한 갈등을 억압하는 기능을 하기도 한다. 정당 내부적으로는 모두가 팬덤 대중이나 팬덤을 가진 정치 세력에 굴종적이게 만든다. 

대다수가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국회의원에는 다섯 유형이 있었다. 첫 번째는 선동가형이다. 두 번째 유형은 외견상 매우 적극적이고 전투적인 것 같지만 실제로는 무능력하고 무책임한 의원들이다. 세 번째는 일종의 개인 독점형 의원 유형이다. 네 번째는 도덕적으로 뻔뻔한 유형이다. 다섯 번째는 이른바 ‘팬덤 인싸’에 들어가는 것을 동경하고 거기에 속하지 못해 안달하는 의원이다. 더 중요한 것으로 이 다섯 유형의 의원들이 가진 공통점은 반대자나 비판자를 만나기 싫어한다는 것이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홍보다.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주목받지 못하거나 지지자들에게 잊히면 어쩌나 하는 데 있다. 


7. 적대와 혐오의 정치가 낳는 문제들

인간 삶에서 갈등과 대립은 피할 수 없지만, 정치가 하는 일은 그러한 갈등과 대립을 순치시켜 수치심이나 복수심을 갖지 않게 하는 데 있다. 수치심과 복수심을 갖게 하면서도 언젠가 자신들이 그 대상이 될지 모르는 것에 두려워하는 팬덤 정치는 그런 의미에서 정치가 긍정적으로 기능하지 못하게 한다. 남이 두려워하는 것을 보고 즐거워하면서도 스스로 두려워한다는 점에서 어쩌면 내적으로는 가장 나약한 존재들이 주도하는 정치가 팬덤 정치일지 모른다. 엄밀히 말해 그런 심리는 두려움(fear)보다는 포비아(phobia) 즉 공포에 가깝다. 

팬덤 정치가들은 자신들이 보편적으로 인정받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안다. 따라서 그들은 자신과 같은 부족(tribe)을 찾고 그들에게서 공감과 위로를 얻는다. 그런 그들이 찾는 부족이 팬덤 ‘커뮤니티’다. 이들 커뮤니티는 외부자의 눈에는 편견을 내면화한 곳이지만, 내부자에게는 ‘참으로 옳은 곳’이다. 그들에게 회원은 절대적 동지들이지만, 밖에서 볼 때 그들은 서로에 대해 편견 증폭자 내지 혐오 증식자 역할을 한다. 팬덤 커뮤니티는 정치에서 혐오 범죄를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갖게 하는 곳, 궁극적으로는 허망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오만한 용기를 갖게 하는 동류 집단이 되었다.

 

8. 민주주의에 대한 오해의 문제

정치 양극화의 첫 번째 국면인 2009년과 두 번째 국면인 2019년 사이에 촛불 집회와 대통령 탄핵이라는 대사건이 있었다. 이 대사건을 이후 한국 정치가 어떻게 다뤄왔는지의 문제와 양극화 정치의 두 번째 국면 나아가 팬덤 정치의 폭발은 깊은 관련을 갖는다.

예기치 않은 이후 변화를 정당화한 민주주의론이 광범하게 동원되었는데, 그 특징은 한마디로 “국민 주권 민주주의론”이라 할 수 있는 것이었다. 국민의 직접 정치, 직접 참여는 국민 주권의 이름으로 상찬되었다. 국민 주권 민주주의를 앞세웠던 정부의 이해 방법은 달랐다. 우선 촛불 집회를 국민의 명령 내지 국민 주권의 구현으로 이해했고, 대표적인 직접 민주주의 방식으로 정의했다. 공론화 위원회도 청와대 국민 청원도 국민 주권의 실현 내지 직접 민주주의의 일환으로 정의했다. 국민이 직접 참여하면 직접 민주주의라는 식이다. 하지만 전체 국민 총회 혹은 전체 시민 총회에서만 적법한 주권이 발생한다. 전체 총회가 아닌 일부 시민의 정치 참여는 기본권의 표출일 뿐 그것이 주권이 될 수는 없다.

국민 주권의 대행자로서 대통령과 집권당이 대의 민주주의의 원리로 선출되었는데, 그들이 직접 민주주의를 하겠다는 것 자체가 이율배반이 아닐 수 없다. 국민 주권 민주주의는 대통령이 직접 민주주의를 앞세워 대의 민주주의를 무력화시키는 정치 이상이 될 수 없다. 2022년 대선은 국민 주권 민주주의가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를 잘 보여주었다. 첫째는, ‘정치의 실종’ 내지 ‘정치의 범죄화’ 현상이다. 둘째는 ‘정당의 실패’다. 셋째는 ‘시민성의 퇴락’이다. 넷째, 국민 주권 민주주의는 여론 조사를 유사 종교로 만들었다. 다섯째, 다원주의의 위축이다. 

일상의 민주주의 운영은 정치가와 정당에 맡기는 것이 인류가 선택한 오늘날의 민주주의이다. 국민 주권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사람들은 우리에게 다른 민주주의를 민주주의로 오해하게 만들었다. 역설적이게도 국민 주권 민주주의론자들은 강력한 대통령 혹은 대통령이 될 사람을 중심으로 움직인다. 모든 정치 에너지가 최고 권력자 내지 최고 권력자가 될 사람으로 집약되는 것이 관행이 되면 민주주의는 ‘스트롱맨’들의 게임으로 퇴락한다. 지난 대선과 그 이후 한국 정치만큼 이를 잘 보여주는 사례도 드물다. 

국민 주권 민주주의는 정당한 절차와 과정을 통해 개선하기보다 즉각 조치가 취해져야 한다는 권위주의적 ‘긴급 명령주의’와 유사한 특징을 갖는다. 당사자 집단 안에서 자율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능력을 약화시킨다. 모두 최고 권력을 향하게 하고 그에 따라 ‘타율적 개혁’을 요구하는 정서를 만들어낸다. 누군가를 향해 처벌하라, 척결하라, 구속시켜라 같은 ‘유사 공안 담론’을 통해 공론장을 피폐하게 만들기도 한다. 여야 모두 최고 권력자 개인을 둘러싼 과도한 열정이 동원되면서, 사인화된 리더 개인을, 좋아하는 사람은 너무 좋아하고 싫어하는 사람은 너무 싫어한다. 거기에 그치지 않는다. 그를 추종하든 적대하든 두 집단 모두 자신만큼 그를 좋아하거나 자신만큼 싫어하지 않는 것을 견딜 수 없어 하는 심리를 만들어낸다.

국민 주권 민주주의에 유혹을 느끼는 많은 사람들이 대의 민주주의, 정당 민주주의, 의회 민주주의를 너무 싫어한다. 국민 주권을 최고 통치자의 의지를 통해 실현하려는 실험은 전체주의를 낳았을 뿐, 그것이 민주적으로 가치 있는 결과를 낳은 적은 없었다. 한국 민주주의는 좀 더 느려져야 하고 좀 더 다원적이 되어야 한다. 좀 더 느리게 일해도 뒤쳐진 느낌을 가지 않을 수 있어야 하고, 다르다고 공격받지 않는 안전한 사회가 되어야 한다. 요컨대 사회를 분열과 적대로 이끄는 양극화 정치, 팬덤 정치는 우리가 발전시켜야 할 길이 국민 주권 민주주의도, 직접 민주주의도 아니고, 책임 정치에 기반을 둔 다원주의적 민주주의임을 더 깊이 생각하게 해준다.

 

9. 느린 민주주의를 옹호하며

현대 민주주의는 일종의 혼합 정체(mixed polity)이다. 민주주의에는 전체주의와 권위주의적 요소가 상존한다. 민주주의 하에서도 권위주의와 전체주의는 경제 우선주의와 일치된 국민-국가-민족을 외칠 때마다 스멀스멀 우리 사이로 들어온다. 그렇기에 민주주의가 더 민주적이 되려면 더 다원적이어야 하고 더 느려져야 하며, 이를 인내하고 관용하는 차분한 시민성이 뒷받침해 줘야 한다.

언론이든 시민 단체든 모두가 나서서 자신들의 요구대로 안 한다면서 더 급하게 일하라고 야단이다. 전체주의나 권위주의는 무슨 일이든 빨리하는 장점이 있지만, 민주주의는 어떤 일이든 빨리 못하게 할 때 가치를 갖는데도 다들 그렇게 한다. 민주주의는 시간이 걸린다. 하지만 약한 체제가 아니다. 다르고 느린 것의 다원적 가치들이 사회 전체적으로 더 넓은 협력과 더 깊은 신뢰를 만들 수 있다. 민주주의자의 실력은 조급함과 독주를 제어할 때 발휘된다. 느리게 살 수 없으면 협동의 가치가 구현될 수 없다. 

모든 사람을 시간에 쫓겨 살게 만든 이상한 민주 사회가 우리 앞에 있다. 속도전 경쟁으로 치면 세계 최강 국가다. 경쟁 부문이 있는 곳이라면 어김없이 ‘국가 K’가 모습을 드러낸다. 세계 7위의 우주 강국이 되고, 스페인과 이탈리아의 경제 규모를 넘어서고 잠재 성장률에서 일본을 제치고, K팝ㆍK뷰티ㆍK드라마로 이어지는 시리즈에 국민배우ㆍ국민가수ㆍ국민MCㆍ국민드라마 시리즈가 나란히 가는 동안 자살, 산재 사망, 가계 부채, 남녀 임금 격차, 이혼 증가, 사교육비 지출 등의 어두운 현실에는 관심이 없는 사회다.

2001년에 시작해 2021년에 끝난 아프간 전쟁에서 민간인을 포함해 17만 2000여 명이 사망했다. 같은 20년 동안 한국의 자살자는 24만여 명이나 되었다. 속초나 남원처럼 인구 8만 명 수준의 지방 도시 세 개가 사라질 규모다. 민주주의가 속도전을 동반하면, 전쟁 이상으로 불행한 결과를 낳는다. 느리더라도 제대로 하면 된다고 말해주지 않는 사회에서 개인과 공동체는 깊은 분열로 고통받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느려져야 다른 게 보인다. 멈춰서 찬찬히 돌아볼 수 있어야 자연의 시간을 닮아갈 수 있고 돌봄과 은퇴 후의 삶을 살아갈 지역 공동체가 눈에 들어올 수 있다.


☞ 강연 바로보기: [열린연단]_ 개인과 공동체 (박상훈 국회미래연구원 초빙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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