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심한 사과’에 대한 심심한 사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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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심한 사과’에 대한 심심한 사과
  • 조원형 편집기획위원/서울대·언어학
  • 승인 2023.11.21 03:14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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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원형 칼럼]

최근 일부 청소년들이 ‘심심한 사과’라는 말의 뜻을 잘 모른다고 해서 논란이 된 적이 있었다. 이 청소년들은 ‘마음의 표현 정도가 매우 깊고 간절하다’라는 뜻을 가진 형용사 ‘심심(甚深)하다’를 지루하다는 뜻의 ‘심심하다’로 잘못 이해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이것이 과연 그렇게까지 논란이 되고 비난을 받을 일인지 모르겠다. 사실 ‘심심한 사과’나 ‘심심한 감사’ 같은 말들은 요즘 성인들도 평소에 잘 사용하지 않는 말이지 않은가. 그러니 청소년 세대가 이 말을 일상생활 속에서 들어 보았을 리는 사실상 만무하다.

물론 웬만한 한국어 구사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맥락을 파악해서 ‘심심한 사과’가 지루하다는 뜻이 아니라는 것쯤은 짐작할 수 있었을 테고,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다면 사전을 찾아서 뜻을 파악할 수 있었을 것이다. 더구나 요즘은 표준국어대사전이나 우리말샘과 같은 한국어 사전을 온라인으로 쉽게 검색할 수 있을 만큼 사전 보기가 편해진 시대이기도 하다.

하지만 아무리 사전을 찾아서 뜻을 파악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언어의 자연스러운 변화를 거스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한때는 일상적으로 쓰이던 말이 어느새부터인가 거의 쓰이지 않게 되고 이내 잊혀지며, 또 다른 곳에서 전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새로운 말들이 생겨나 생명력을 얻기도 한다. ‘심심(甚深)하다’ 역시 그렇게 자연스러운 언어 변화 과정 속에서 잊혀져 가는 수많은 낱말들 중 하나일 뿐이다. ‘기체후일향만강’과 같은 예스러운 표현들이 오늘날 거의 쓰이지 않게 된 것처럼 ‘심심한 사과’도 이른 시일 안에 사어가 될 것으로 보인다. 이 말은 이미 ‘깊은 사과’, ‘진심 어린 사과’, ‘간절한 사과’ 등 다양한 표현으로 거의 완벽히 대체되었으니 ‘심심한 사과’가 다시금 한국어 일상 어휘 목록을 비집고 들어올 가능성은 거의 없을 것이다.

사라지고 잊혀지는 것이 어디 어휘뿐일까. 말소리 또한 마찬가지다. 적어도 서울 지역어에서 모음의 음장(길이) 구분은 거의 잊혀진 존재가 되어 가고 있다. ‘심심한 사과’에 들어가는 ‘심심(甚深)’은 표준 발음법에 따르면 첫 음절을 길게 발음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반면 지루하다는 뜻의 ‘심심하다’는 모든 음절을 짧게 발음하는 것이 표준 발음이다. 하지만 청소년들이 ‘심심한 사과’의 뜻을 모른다고 비난했던 ‘어른들’ 중에 이 말을 ‘심ː심한 사과’라고 발음하는 것이 표준 발음이라는 사실을 알았던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지 궁금하다.

때로는 문법과 관련된 요소도 변화한다. ‘잊히다’와 ‘잊혀지다’ 가운데 표준어는 무엇일까. 정답은 ‘잊히다’이다. 하지만 오늘날 ‘잊히다’라는 말을 쓰는 사람들은 찾아보기 어렵다. 거의 모든 한국어 사용자들이 ‘잊혀지다’라는 어휘를 쓴다. 1980년대 초반에 나온 대중가요 중에도 <잊혀진 계절>이라는 제목을 가진 노래가 있었다. 이미 그 시기 이전부터 ‘잊히다’라는 말은 ‘잊혀진’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2023년에 작성한 이 글에서도 ‘잊혀지다’라는 어휘를 여러 번 사용했다.

이처럼 누가 보더라도 사어에 가까운 표현이라면 말을 하는 사람, 글을 쓰는 사람이 애초에 되도록 사용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 말을 듣고 그 글을 읽는 사람이 제대로 알아듣기 어려울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상대방이 알아듣기 힘들 줄 알면서도 어려운 표현을 쓴다면 그것은 말을 하고 글을 쓰는 사람의 잘못이다. 필자가 지난달에 이 지면을 빌려 ‘웰니스’와 같은 표현에 문제가 있다고 했던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야기한 것이었다.

그러니 이제는 ‘심심한 사과’ 같은 말을 ‘잊혀져 가는’ 말로 인정하고 굳이 다시 무덤 속에서 꺼내 오려고 애쓰지 않는 편이 차라리 바람직할 것이다. 만일 이 말에 사람과 같은 지각이 있다면 자기 자신을 이렇게 사어나 다름없이 취급하는 데 대해 불만을 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심심한 사과’를 알아듣는 사람이 극히 적어진 지금은 ‘깊은 사과’ 같은 더 쉽고 일상적인 말을 쓰는 것이 여러모로 합리적이다. 이에 필자는 머지않아 잊혀질 것으로 보이는 ‘심심한 사과’라는 말에 마지막으로 심심한 사과를 보내면서 이제부터는 이렇게 남들이, 특히 필자보다 젊은 세대들이 어려워하는 말을 되도록 쓰지 않겠다고 다짐해 본다.

그리고 ‘심심한 사과’니 ‘금일(今日)’이니 ‘중식(中食)’이니 하는 말을 곧바로 이해하지 못했다고 비난받은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그렇게까지 잘못한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를 들려드리고 싶다. ‘금일’은 ‘오늘’로, ‘중식’은 ‘점심식사’로 고쳐서 이야기하면 그만이다. 이렇게 쉬운 말이 있는데도 외면하고 굳이 ‘금일’이니 ‘중식’이니 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더 큰 문제라는 점도 함께 말씀드리는 바이다.

 

조원형 편집기획위원/서울대·언어학

서울대학교 언어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과 대학원에서 언어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만하임 라이프니츠 독일어연구원 방문학자, 국립국어원 학예연구사 등을 거쳐 현재 서울대학교 기초교육원 강의교수로 일하고 있다. 주요 논문으로 “천주가사에 대한 텍스트언어학적 연구”, “텍스트언어학에 기반한 ‘쉬운 언어(Leichte Sprache)’ 텍스트 구성 시안”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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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원형 2023-12-04 13:59:40
애독자님께) 감사합니다. 바로잡았습니다.

애독자 2023-12-03 15:31:56
지면을 빌어가 아니라 빌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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