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전자를 넘어 운명을 바꾸는 원리, 후성유전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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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전자를 넘어 운명을 바꾸는 원리, 후성유전학
  • 이현건 기자
  • 승인 2023.11.19 00:4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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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전자 스위치: 최신 과학으로 읽는 후성유전의 신비 | 장연규 지음 | 히포크라테스 | 284쪽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유전자일까 혹은 노력일까? 살면서 우리가 얻게 된 능력은 다음 세대까지 영향을 끼칠 수 있을까? 유전자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면 우리 자신과 다음 세대의 삶을 바꾸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는 걸까? 다윈과 라마르크에 의해 시작된 획득형질 유전에 대한 문제는 생물학과 진화유전학의 중심에서 오랜 시간 논쟁을 이어왔다. 하지만 20세기 중반 DNA의 구조가 밝혀지고 모든 것이 유전자에 의해 결정된다는 유전자 결정론이 지배하게 되자 유전 이외의 영향력에 대한 주장은 힘을 잃는 듯이 보였다. 

논쟁의 판도를 바꾼 것은 후성유전학(Epigenetics)이다. 후성유전은 DNA 염기서열의 변화 없이 DNA 발현과 기능이 변화하고 세대 간에 유전되는 현상을 말한다. 후성유전학은 유전자 발현을 조절하는 우리 몸의 시스템을 밝히는 유전학의 한 분야다. 주로 타고난 유전자의 변화 없이도 환경과 경험에 따라 형질이 달라지고 그 형질이 유전되는 현상을 연구한다. 후성유전학 연구가 본격화된 이후 생물학과 유전학의 판도는 뒤바뀌고 있다. 유전자를 조절하는 스위치이자 우리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스위치인 후성유전 연구는 지금 어디까지 와 있을까?

20세기 후반 본격화한 후성유전 연구는 우리 몸에 유전자 발현을 조절하는 시스템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인간 세포의 핵에 존재하는 DNA에는 염기서열의 형태로 유전정보가 기록돼 있다. 그런데 우리 몸은 유전자에 있는 모든 정보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필요에 따라 일정 정보를 활성/비활성화해 활용한다. 이때 DNA 일부 구간의 정보를 켜고 끄는 시스템이 바로 후성유전 시스템이다. 타고난 유전자는 변하지 않지만 우리의 습관이나 먹는 음식, 환경 등이 유전자 스위치 작동에 영향을 준다. 또한 이 스위치의 온/오프 결정이 유전되는 현상도 지속적으로 발견되고 있다. 유전자를 바꿀 수는 없지만 그 발현과 변형은 대물림될 수 있는 것이다. 이제 관련 연구는 질환 치료와 예방, 양육과 교육, 습관과 식성 등 주변의 환경과 몸의 상호작용에 대한 광범위한 주제로 확장되고 있다. 후성유전학이 생물학과 유전학의 중심으로 떠오르고 있는 것이다.

저자 장연규 교수는 이 책을 통해 후성유전학의 기본 원리를 상세하게 알려주는 동시에 최신 연구 결과들의 동향과 전망에 대해 소개한다. 모든 이들이 즐길 수 있도록 생물학의 기본적 개념인 유전자의 원리부터 복잡한 분자 수준의 후성유전 작용까지 순차적으로 설명한다. 유전자의 형태와 구조 그리고 후성유전이 영향을 끼치는 각각의 과정과 작동은 삽화로도 표현되어 이해에 도움을 준다. 

후성유전학은 단순히 DNA의 형질 변화를 이끌기 위해 사용하는 도구만은 아니다. 후성유전은 우리 몸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작동하는지를 알려주는 신비로운 생명 현상 중 하나다. 이 때문에 책을 읽다 보면 후성유전 시스템의 구체적인 과정뿐만 아니라 우리 몸의 다양한 현상들도 함께 이해할 수 있다. 후성유전의 영향은 실로 방대하다. 정자와 난자가 결합한 수정란이 분화하고 개체가 형성되는 발생학적 과정, 신체가 외부 바이러스에 대항해 일어나는 면역 반응, 부계나 모계 중 한쪽 유전자의 발현을 차단하는 각인유전자, 특정 질환을 유발하거나 억제하는 유전자의 발현 과정 등 우리 몸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신비가 후성유전과 관련된다. 

이 책은 총 12개의 장으로 구성돼 있다. 1장에서는 기존 유전학이 후성유전학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와 라마르크의 획득형질 유전이 확인된 예를 설명한다. 2장과 3장에서는 후성유전의 시스템을 설명하기 위해 유전자의 구조와 유전자가 응축되고 포장되는 과정을 다루고 있다. 4장에서는 일란성 쌍둥이의 유전자 발현이 서로 달라지는 이유를 후성유전과 관련해 상세히 설명한다. 5장에서는 생명 탄생을 위한 세포 분화 과정에서 후성유전 시스템의 역할을 알려준다. 6장과 7장에서는 유전자형과 형질의 관계를 설명하는 멘델의 유전법칙 등 전통적인 유전의 틀을 깨는 생명 현상과 여기에 후성유전적 시스템이 개입하는 경우들을 소개한다. 

8장에서는 후성유전이 이루어지는 주요 방식 중 하나인 DNA 포장 시스템을 상세히 살피고, 최고 수준으로 압축 포장된 이질염색질이 구성되는 다양한 현상들을 확인하며, 9장에서는 분자저울 시스템을 통해 일어나는 X염색체 불활성화 현상과 이를 위한 차별화된 압축포장 방식을 사용하는 Xist RNA의 활약을 다루고 있다. 10장에서는 몇몇 유전질환과 함께 각인 현상을 좀 더 상세히 살피고 있으며, 11장에서는 생명이 수정란에서 성체가 되기까지 같은 세포가 어떻게 후성유전에 의해 각각의 기관이 될 수 있는지 세포기억 시스템과 관련해 설명한다. 끝으로 12장에서는 암을 치료하기 위한 후성유전의 원리와 관련 약물 개발의 동향을 살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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