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센트 반 고흐, 누가 그를 광인으로 규정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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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 반 고흐, 누가 그를 광인으로 규정하는가
  • 이명아 기자
  • 승인 2023.11.07 2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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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회가 자살시킨 자, 반 고흐 | 앙토냉 아르토 지음 | 이진이 옮김 | 읻다 | 228쪽

 

이 책은 20세기 프랑스의 작가 앙토냉 아르토(Antonin Artaud, 1896-1948)가 화가 빈센트 반 고흐의 생애와 작품에 관해 쓴 글 〈사회가 자살시킨 자, 반 고흐〉와 함께 회화 및 연극을 다룬 짧은 글 다섯 편, 그리고 아르토의 그림을 부록으로 수록하여 아르토의 예술론과 작품 세계를 보다 생생하게 느낄 수 있도록 했다. 

1947년, 파리의 오랑주리 미술관에서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1853-1890)의 회화전이 열렸다. 한 예술 주간지는 전시 소식을 알리며 정신과 의사 프랑수아조아킴 비어의 글을 통해 화가와 그의 작품을 소개했다. 비어에 따르면 반 고흐의 일생 대부분은 신경 정신적 퇴화의 증거로 가득차 있고, 광기가 그의 천재성을 낳았으며 그의 예술 활동은 정신적 문제들에서 기인한다. 이 글을 접한 앙토냉 아르토는 “한낱 의사의 빌어먹을 수술칼이 위대한 화가의 천재성을 내리 만지작거리게 둘 수 없다”고 격분하며, 이에 대한 반박으로 〈사회가 자살시킨 자, 반 고흐〉를 집필했다.

이 글에서 저자 아르토는 병리학적 진단으로 대상화된 반 고흐의 생을 의학의 폭력으로부터 구출하여, 그의 생이 지닌 날것의 경련을 시적 언어로 되살리고자 한다. 이런 점에서 아르토가 이 책을 통해 포착하려는 반 고흐의 삶은 그가 잔혹극의 무대에 올려야 한다고 생각한 삶과 다르지 않다. 이때 아르토가 말하는 ‘잔혹’이란 피가 튀는 잔인함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건조한 사실들의 나열로는 포착할 수 없는 “살아 있는 존재의 심장 박동, 그 생명의 헐떡거림과 경련으로서의 ‘생’” 그 자체다. 아르토는 사유를 넘어선 감각으로, 말이 아닌 음악으로 반 고흐의 그림 속에서 꿈틀대는 생의 약동에 다가간다.

아르토는 이 과정에서 반 고흐에 대한 정신의학적 판단과 규정, 나아가 정신의학이 지닌 권위와 사회 구조 자체를 근본부터 재론하며, 사회와 정신의학의 공모 관계를 통찰한다. 거짓과 위선, 부르주아적 관성과 타자에 대한 멸시로 병든 사회는 정신의학을 발명해 자신의 호위병으로 삼고, 정상성이라는 규범에 따라 개인을 통제하고 평준화하려 한다. 자유분방한 생의 박동은 의학과 사회에 의해 광기로 축소 해석된다. 그러나 반 고흐는 이러한 사회와 공범이 되기를 거부하며 스스로 광인의 길을 선택한 ‘진정한 광인’이다. 아르토에 따르면 보들레르, 에드거 앨런 포, 니체, 횔덜린, 로트레아몽과 같은 작가들 또한 사회가 금지한 무한을 살고자 했던 ‘진정한 광인’에 속하며, 이들은 규범 바깥에 놓인 “진실을 발설하지 못하게 사회가 입을 틀어막고자 했던 사람”이다.

아르토 역시 정신병원에 강제 입원을 당해 약 9년간을 감금 상태로 지낸 적이 있다. 그가 경험한바 정신의학은 ‘완벽한 정상인’을 만들기 위해 정신을 해체하고 통제 가능한 것, 정상적인 것을 기준으로 재건하려 든다. 그러나 아르토는 자신의 고통을 의학에 양도하여 사회가 정한 신체적, 도덕적 표준에 포섭되기를, 그리하여 ‘치료’되기를 거부하며 다음과 같이 언명한다. “나는 내 고통의 주인이다.” “내 안의 것에 대한 심판자는 오직 나다.” 개개인이 지닌 고유한 내적 풍경은 결코 사회가 정한 단 하나의 표준적 풍경화에 맞춰질 수 없다. 반 고흐 역시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으며, 그는 자신의 길을 스스로 밝히기 위해 모자에 열두 개의 초를 달고 밤 풍경을 그리러 밖으로 나간 명민한 이였다. 그렇게 태어난 그의 작품들은 폭발 직전의 에너지를 오롯이 간직하고, 아르토는 화폭을 경련케 하는 이 진동에서 음악이 솟아남을 느낀다. 반 고흐의 이 음악에 아르토는 텍스트의 독재에서 벗어난 음성 언어, 말 바깥으로 떠난 방언으로 화답한다.

〈사회가 자살시킨 자, 반 고흐〉에는 아르토가 연극을 통해 쌓아올린 고유의 예술론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그가 보기에 기존의 서구 연극은 현실적 질서를 단순히 재현하고 갈등을 관습적으로 해결할 뿐, 기존하는 도덕적, 사회적 체계에 의문을 제기하지는 못했다. 이에 따라 연극은 저녁 시간의 여흥으로 전락하여 관객을 단순히 엿보는 자로 만들어 버렸다. 그러나 연극은 부당한 사회 상태를 전복하고 관객의 신경과 심장을 깨워야 한다. 이에 아르토는 새로운 연극인 잔혹극을 제안하여 배우의 몸, 공간의 공기, 관객의 몸을 진동시키며 무대와 객석의 구분을 무화시키고자 한다. “빠져나올 수 없는 답보 상태와 고통 속에서도 돌파하여 작동하는 이 생, 순수하고 냉혹한 이 감정, 이것이 바로 잔혹이다.”(《연극과 그 이중》) 반 고흐의 그림에는 아르토가 연극을 위해 찾아 헤매던 잔혹의 감정이 선연히 살아 숨 쉬고 있다.

그런데 아르토는 연기하는 사람, 글 쓰는 사람인만큼이나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기도 했다. 이 책에 부록으로 실린 다섯 편의 글은 그가 자신의 전시 〈앙토냉 아르토가 그린 초상화와 데생〉을 위해 쓴 것으로, 연극과 시, 회화를 관통하는 그의 예술론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연극이란 단지 “무대 위의 화려한 볼거리가 아니라, / 불덩이와 진짜 고깃덩어리로 된 도가니”로서 생의 감정을 일깨워야 하며, 이는 회화를 비롯한 다른 예술 또한 마찬가지다. 이 편린들은 상이한 예술 분과들이 어떻게 하나의 관점 아래 연결될 수 있는지 보여주며, 예술의 저항적 책무를 잔혹의 언어로 선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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