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대회에 지정토론이 필요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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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대회에 지정토론이 필요할까
  • 조원형 편집기획위원/서울대·언어학
  • 승인 2023.11.07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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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원형 칼럼]

올 가을에 필자는 거의 매주 학술대회에 참석해 어떤 식으로든 발언을 했다. 발표자로 나선 적도 있지만 지정토론자로 참석할 때가 더 많았다.

일반 학술대회에서 지정토론자를 따로 두는 것은 한국 등 극히 일부 국가에서만 관행적으로 해 온 일이라고 알고 있다. 국제 학술대회에서 지정토론을 하는 경우는 거의 보지 못했다. 이번 가을에 필자가 발표를 한 학술대회도 개최 장소는 한국이었지만 규모가 비교적 큰 국제 학술대회였는데, 이때도 지정토론자가 따로 없었다.

발표 내용에 대해 질문할 사람을 미리 정해 두는 학술대회 방식에 장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지정토론자는 대부분 발표 내용을 미리 숙지하고 그에 걸맞은 질문을 준비해 오기 마련인데, 그런 만큼 깊이 있는 대화와 토론을 이끌어 내기가 상대적으로 수월해진다. 이는 학술대회를 준비하는 사람들은 물론 발표자와 청중들 또한 지정토론자에게 가장 크게 기대하는 바이기도 하다. 때로는 발표자가 발표문에서 미처 발견하지 못한 실수를 지정토론자가 먼저 파악하고 발표자에게 조언을 미리 건네기도 한다. 필자도 예전에 지정토론을 준비하면서 발표자가 발표 자료의 오류를 사전에 바로잡는 데 도움을 준 경험이 있다.

하지만 지정토론을 할 경우 다른 참가자들이 자유롭게 토론할 기회를 충분히 주지 못한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학술대회에 참석해 본 사람이라면 발표 시간이 그리 넉넉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지정토론을 하게 되면 그만큼 청중들의 질문 시간이 줄어들기 마련이다. 한 사람의 깊이 있는 질문을 기대하는 대신에 여러 사람들의 다양한 질문을 듣는 기회는 놓치게 되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지정토론 내용 자체에 오류나 미비점이 있는 경우도 더러 생기곤 한다. 이럴 때는 청중석에서 지정토론 내용에 대해 문제를 제기해야 하는데, 이럴 때조차도 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청중들의 질문을 받지 못한 채 발표를 끝내 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사실 따지고 보면 지정토론자를 두지 않으면 청중석에서 질문이 나오지 않을 때가 많아서 어쩔 수 없이 지정토론을 부탁하는 것이 오늘날 한국 학계의 현실이기도 하다. 또한 명망 있는 연구자 또는 선배 연구자에게 소장파 내지 후배 연구자가 ‘감히’ 질문하는 것을 꺼리는 관행도 좀처럼 개선되지 않고 있다. 필자 역시 몇몇 학회에서 임원으로 일하면서 학술대회 프로그램을 여러 번 짜 보았지만, 거의 언제나 이러한 ‘현실적인’ 문제를 염두에 두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언제까지나 현실 타령만 하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장점보다 단점이 더 많은 관행은 바꾸는 것이 바람직하다. 한 가지 주제에 대해 여러 가지 생각을 가진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토론하는 것이 학술대회의 목적이라면 발표자와 지정토론자의 말만 듣고 만족하기보다 되도록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이끌어 내는 것이 합당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정토론에 의존하는 데서 벗어나 청중의 자유로운 질문과 토론을 이끌어 낼 수 있는 방안을 찾아야 할 것이다.

사람들의 행동 변화를 이끌어 내는 좋은 방법 가운데 하나는 제도를 일거에 과감히 바꾸어 버리는 것이다. 그러니 그동안 지정토론 방식을 답습해 온 학회들도 바로 다음에 개최하는 학술대회부터 이 관행을 과감히 없애 버리면 어떨까 한다. 참고로 올 가을에 필자가 참석한 학술대회들 중에서 가장 생산적인 토론이 이루어졌던 때는 필자가 발표자로 나선 국제 학술대회였다는 점을 밝혀 둔다. 국제 학술대회다 보니 지정토론자가 없었는데, 그 덕분에 국내외에서 학술대회장을 찾은 여러 연구자들의 다채로운 질문을 들을 수 있었다. 맨 처음에는 외국인 참가자가 질문을 했는데, 이렇게 누군가가 먼저 물꼬를 트고 나니 한국인도 외국인도 누구나 자유롭게 질문을 하고 대화를 나누는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생겨났던 것이다. 앞으로 국내 학술대회에서도 이와 같은 경험을 더 자주, 더 많이 할 수 있었으면 한다.

 

조원형 편집기획위원/서울대·언어학

서울대학교 언어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과 대학원에서 언어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만하임 라이프니츠 독일어연구원 방문학자, 국립국어원 학예연구사 등을 거쳐 현재 서울대학교 기초교육원 강의교수로 일하고 있다. 주요 논문으로 “천주가사에 대한 텍스트언어학적 연구”, “텍스트언어학에 기반한 ‘쉬운 언어(Leichte Sprache)’ 텍스트 구성 시안”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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