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부서진 곳에서는 어떤 사물도, 어떤 인간도 존재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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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부서진 곳에서는 어떤 사물도, 어떤 인간도 존재할 수 없다
  • 이현건 기자
  • 승인 2023.10.31 12:2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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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어와 존재: 언어는 어떻게 우리의 생각을 만들고 처세와 정치를 결정하는가 | 퀴브라 귀뮈샤이 지음 | 강영옥 옮김 | 시프 | 320쪽

 

언어와 인식 중 무엇이 먼저라고 생각하는가? 저자 퀴브라 귀뮈샤이는 “내 언어의 한계는 내 세계의 한계를 의미한다”고 말한 비트겐슈타인의 말을 인용하면서, 언어가 우리에게 세계를 열어주는 동시에 우리를 그 안에 가둔다고 말한다. 즉, 언어는 우리의 인식에 변화를 일으킨다. 우리가 그 단어를 알고 있기 때문에 그것이 무엇을 지칭하는지 인식할 수 있는 것이다. 어떤 언어를 쓰느냐에 따라 그 언어에 담긴 세계관을 흡수하고 언어가 만들어낸 풍경에 젖어든다.

저자는 언어가 ‘한 개인’과 ‘사회’라는 존재의 집이자 우리의 생각과 삶을 이루는 소재라고 분명하게 밝힌다. 언어에 따라 우리의 생각은 가지를 치고 더 나아가 관점과 신념을 형성하며 처세와 정치까지 결정한다고. 오래전부터 쓰여 익숙해진 말, 효율과 기준을 내세운 꽤 그럴듯하게 들리는 표현, 권력과 주류 아래 조장되어온 언어 체계를 정확하게 인식하고, 항상 의구심을 품어야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특히 저자는 언어와 정치적 비인간화의 상호관계에 주목했다. 누가 세상을 설명하는가? 누가 서술하고, 누가 서술되는가? 누가 이름을 붙이고, 누구에게 이름이 붙여지는가? 언어가 우리가 인식하는 세계에 영향을 준다는 것은 더 이상 논쟁할 필요가 없는 사실이다. 사람들은 이름 붙여지지 않은 자들에게 존재의 배경을 묻지 않는다. 자신들이 기준이고, 표준이고, 척도다. 특히 권력이, 발언권이 있는 쪽이 정해준 언어는 그렇지 못한 사람들의 관점과 개성을 지워버린다. 

저자가 오랫동안 언어라는 주제에 열정적으로 천착해온 것은 자신이 겪은 것처럼 한 사회가 개인에게 가하는 부조리와 부당함을 알아차리고, 언어를 통해 정치적 비인간화가 공고해지는 것에 체념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이 책은 저자가 이런 현실 속에서도 더 많은 환대와 포옹을 지속적으로 요구해온 과정이 담겼다. 저자의 글을 따라가다 보면 사회 구조에서 소외되고 있는 자들의 말에 귀 기울이는 것이 어째서 우리 모두의 당면 과제인지를 가늠해볼 수 있다.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못한’ 언어를 아주 대범하게 사용하는 사람들, 이들이 말을 통해 뱉는 고정관념은 주류가 아닌 사람들에게 무지의 갑옷이 되어 짐이 되고, 약하고 인간적인 순간에 이들을 굴복시킨다. 증오심에 불타오르는 이런 자들은 정치적 올바름이 아니라 정의에 저항하고 있으면서도 자신들을 보수주의자쯤으로 여긴다. 이들이 혐오의 대상에게 혐오를 표현하는 순간 인터넷에서 반향실을 발견하고, 되풀이되고, 극단화된다. 그리고 지속적인 여론으로 나타난다. 저자는 혐오는 그것이 어떤 형태든 무시되어서는 안 되며, 이를 용인해서도, 토론에서 새로운 자극제가 되는 ‘의견’으로 격상시켜서도 안 된다고 지적한다. 증오가 의견이 된 순간 말은 부서지고, 그 자리엔 어떤 사물도, 어떤 인간도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녀는 한 인간이 다른 인간에 의해 하나의 범주로 간주될 때, 얼마나 굴욕적이고 금치산 선고를 받은 것처럼 무기력한지 자신의 자전적 이야기를 털어놓으며, 차별과 소외가 범람하는 세계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다르게’ 말할 수 있는지, 어떻게 해야 더 ‘인간적’으로, 표준과 척도, 효율을 내세우지 않고 한 존재를 배제하지 않으면서 말할 수 있는지 살핀다. 특히 쿠르트 투홀스키의 말, “언어는 무기다”를 인용하며서 언어가 화자들이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무기가 될 수도 있지만 무기에 그치지 않고 도구가 될 수도 있다며 ‘도구로서의 말하기’를 강조한다.

저자의 메시지는 “나로 존재하고, 말하고, 연결될 수 있는 세상”으로 축약해볼 수 있다. 그녀는 세상 자체는 정의롭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아직 우리는 모든 사람들의 인간다움이 실질적으로 인정받는 구조, 한 사람의 관점이 다른 사람에게 위협이 되지 않는 구조에서 살고 있지 않다. 다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 모두는 ‘인간’이라는 점이다. 우리는 실수를 하고, 상처를 주고받는다. 이것을 인정하고 이 겸허함을 바탕으로 서로에게 끊임없이 한 가지 입장만 강요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을 경직된 관점으로 구속하지 않을 때, 그리고 언어, 생각, 삶의 구조와 한계를 인식할 때 모든 사람들이 혈통, 인종, 신체, 종교, 성별, 성적 지향, 국적, 빈부 격차와 관계없이 자유롭게 말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런 후에야 우리 모두는 나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다.

이 책은 복잡성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인간으로서 동등한 권리를 갖고 존재할 수 있고, 그 길로 가기 위한 성찰이자 더 나은 사회를 건설하겠다는 우리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언어를 찾아가는 과정을 담았다. 우리의 언어, 생각, 느낌, 삶의 구조와 한계를 인식할 때 우리 모두는 동등한 권리를 갖고, 말하고, 존재할 수 있다는 저자의 주장은, 혐오가 뉴노멀이 된 오늘날 꼭 필요한 목소리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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