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대학 위기는 지성의 위기
상태바
지방대학 위기는 지성의 위기
  • 임운택 편집기획위원/계명대·사회학
  • 승인 2023.10.30 09:3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임운택 칼럼]

최근 공개된 한국경제인연합회 산하 한국경제연구원 용역 보고서는 ‘지방대학 벚꽃 엔딩’을 다시 한번 확인해주고 있다. 인구감소와 지역소멸이 주원인이라는 익숙한 진단에 “지방대학 발전은 특성화, 구조조정, 책무강화 등 3박자가 잘 맞아떨어질 때 실질적 성과를 발휘할 수 있으며, 지역인재양성-취업확대-정주여건 개선으로 이어지는 선순환 구조가 이뤄져야 한다”라는 뻔한 대안을 재차 제시하고 있다. ‘뻔한’이라는 표현은 이러한 대안을 비아냥거리고자 함은 아니다. 실제로 이런 대안이 처음은 아니지만, 많은 당사자조차 이게 과연 가능하기라도 한 것인가 하는 자괴감을 들게 하는 대안이기 때문이다. 

특성화를 하려니 지역 산업은 이미 망가질 때로 망가져 있고, 구조조정을 하려니 터미네이터가 아닌 바에야 자가 치료는 불가능하다. 교육부의 당근만 해바라기처럼 바라보면서 최소한의 채찍질을 할 뿐이다. 책무강화는 누구도 부정하지 않지만, 구조조정과 연계된 책무만 강조되고 있지, 교육의 질에는 대부분 관심이 없다. 현재의 논문공장 체제에서 교수가 교육의 질을 고민할 여유가 없다. 지역인재양성-취업확대-정주여건은 대학, 기업, 지자체의 공고한 연대와 협력관계 속에서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자면 취업과 정주는 대학교육이 성공하면 따라오는 일이지, 대학을 구하기 위한 전제조건은 아니고, 대학 본연의 기능과도 무관한 일이다. 

신자유주의적 시장화 속에서 대학의 기능과 조건, 존립 양태가 바꾸었다고 하나 대학은 엄밀히 말해서 취업기관이 아니다. 한가한 소리처럼 들려도 세계 유수의 명문대학도 교육의 질이 좋아서 결과적으로 취업에 좋은 결과를 낼 뿐이지 애당초 취업을 목표로 교육하지는 않는다. 특정 직업에서 취업을 목표를 응용학문을 가르치는 대학은 따로 있다. 고등교육법 47조에서 정의하고 있는 전문대학이 그것으로, 한국에서는 전문대학을 B급 대학으로 인식을 하지만, 엄밀하게 보면 이는 대학의 설립목표가 일반 대학교와 다를 뿐이다. 아무튼, 보고서에서 강조하는 취업확대는 엄밀하게 보면 대학의 존립근거와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다. 

보고서 제안 내용을 종합해보면, 실제 대안으로 제시된 대학 주체가 해야 할 3박자와 지자체와 정부가 해야 할 투자 내용은 외상치료에 불과한 것이지, 실제 병환의 진단이 힘들고 치료도 어려운 내상치료와는 크게 상관이 없다. 이런 진단이 빈번하게 등장하는 이유는 한국의 대학이 초고속 근대화 과정에서 인재공급이라는 기능적 역할을 했다는 환상 때문이다. 그때는 대학교육이 좋았는데, 지금은 문제가 생겼을까? 

사실 인재공급과 교육의 질의 상관관계를 확인하기는 쉽지 않다. 1980년대 후반까지 대학을 다녀본 사람들은 대부분 동의할 테지만, 대학교육이 취업과 승진에 도움이 된 것은 사실이나 요즘 유행하는 말로 높은 수준의 직무를 수행할만한 역량을 키우는 것과는 별 상관이 없었다. 전공과 무관하게 취업을 할 수도 있었고, 취업을 하면 전공과 무관하게 현장에서 실행학습(learning by doing)을 통해 직무를 익히는 것은 기본이었다. 여러 가지 이유로 휴강을 밥 먹듯 하던 시절에 교육의 질이 좋았을 리 만무하다. 필자가 전공 외 수업으로 경험한 철학강의는 원전의 난해함은 둘째 치고, 번역서도 엉망, 교수법도 솔직히 요즘 학자들보다 더 나았을 것 같지가 않았다. 한 학기 동안 철학의 심오함을 핑계로 진도는 한 챕터를 못나기고, 교수의 핵심 테제는 한 학기 내내 고장 난 테이프처럼 반복되었기 때문에 외울 정도였다. 

해외에 나와서야 그게 꽤 문제적 수업이라는 걸 알았지만, 그때는 교수나 학생이나 다들 그랬다. 그렇다고 대학교육이 의미가 없었다는 것은 아니다. 대학은 어찌됐건 지성의 전당이었고, 강의실이 아니더라도 학과에 많은 학습모임과 토론회가 있었다. 교수도 긴장해야할 만큼 학계에는 상당히 도발적인 석·박사 앙팡 테리블이 있었다. 이전이 좋았다는 것은 절대 아니나 어설픈 교수의 권위는 수입된 이론을 빨리 소화해낸 발칙한 학생들에 의해 금방 추월되는 그런 장점도 있었다. 어수선한 사회였던 만큼 요즘 세간의 질타를 받는 인문사회계열의 학술논의는 사회적 담론을 형성하기도 했다. 

대학이 지성의 전당이라는 소리는 오늘날 더 이상 듣기 어려워졌다. 인터넷, 유튜브, ChatGPT 등의 도구화된 정보수단의 범람으로 어느 책 제목처럼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을 소화하기가 쉬워졌기 때문이다. TV에는 소위 학계 인사를 초빙해서 진행되는 지식전달형 토크쇼가 범람한다. 특정 세계사도, 민주화 운동도, 각종 과학이론도 한 시간 남짓한 시간에 깨끗하게 정리된다. 추임새를 넣어주는 연예인만 이해하면 된다는 식이므로, 토론이 아니라 사실 예능형 주입식 강의인 셈이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온라인에서 이미 이러한 지식을 향유하고, 도구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촛불시위 때 강조하던 집단지성은 한꺼풀만 뒤집으면 지식의 맹목적인 소비자가 된다. 지성의 비판적 기능보다는 사실적 가치와 소비가 중요해진다. 이러면 대학이 설 자리가 없어진다. 대학이 소비자와 시장의 가치에 적응하면 할수록 반지성주의는 횡행하게 되고, 그 빈자리에 대학은 취업사관학교로서의 기능만 남게 된다. 이는 비단 인문사회과학만의 문제는 아니다. 기술변화에 따른 다양한 과학의 발전도 마찬가지이다. 4차 산업혁명의 기치 아래 너도나도 똑같은 가치를 주장하고 비슷한 연구기획서와 방송강연에 휩쓸린 연구자라면 굳이 기업에 있는 전문가보다 나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오늘날 정치, 경제, 민주주의, 과학, 기술, 이 모든 영역에서 위기의 징후가 산재한다. 지성이 이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면 결국 대학은 그 존립근거를 상실하게 된다. 그런대도 위기의 징후에 대한 진단과 처방마저 다시 수입이론에 의지하는 형국이다. 대학이 마비되었기 때문이다. 

지방대를 살리는 만능치료제는 없다고 본다. 다만, 육체에서 암세포가 전이되듯 지방이 죽으면 그 다음은 수도권 순일 것이다. 보고서에 실린 외상치료보다 더 시급하고 중요한 것은 내상치료이다. 결국 대학의 기능과 쓸모는 시대에 맞는 지성의 회복이고, 이를 교육에 담아내지 못하면 (지방)대학의 위기는 근본적으로 치유되기 어렵다. 

 

임운택 편집기획위원/계명대·사회학

독일 마부르크 대학교 사회학 박사. 현재 계명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로 한국이론사회학회 회장, 비판사회학회 편집위원장과 회장을 역임하였고, 경제인문사회연구회 기획평가위원을 맡은 바 있다. 주 연구분야는 정치경제학, 노사관계, 정치사회학, 현대 사회이론이다. 주요 저서로 <전환시대의 논리: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이중위기>, <경제의 디지털화와 노동의 미래>, 공저로 <현대사회와 베버 패러다임>, <문화, 환경, 탈물질주의 사회정책>, <청년실업과 노동시장, 그리고 국가> 등이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