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석 철학과 대륙 철학의 상호 인정을 향한 작은 발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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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석 철학과 대륙 철학의 상호 인정을 향한 작은 발걸음
  • 이윤일 가톨릭관동대·철학
  • 승인 2023.10.30 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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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옮긴이의 말_ 『분석 철학 대 대륙 철학: 철학의 방법과 가치에 대한 논변들』 (제임스 체이스·잭 레이놀즈 지음, 이윤일 옮김, 도서출판비, 463쪽, 2023.09)

 

먼저 몇 가지 예화를 소개하는 것으로 시작해 보자. 프랑스의 유신론적 실존철학자인 가브리엘 마르셀과 암으로 죽어가고 있는 영국 일상 언어학파의 철학자 J. L. 오스틴이 이야기를 나누던 중, 마르셀이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자 오스틴은 “우리는 모두 죽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왜 그걸 가지고 노래를 불러야 한단 말입니까?”라고 반문했다고 한다. 분석 철학자 콰인은 철학사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겠다고 공언했고, 길버트 하만은 하버드대학의 자기 연구실 문에 “철학사는 사절”이라는 문구를 붙여놓았다. 반면에 대륙 철학자 니체는 “역사를 가지지 않는 것만이 정의될 수 있다”고 말하고, 해석학의 대가 가다머는 “역사는 우리에게 속하지 않는다. 우리가 역사에 속한다.”고 말한다. 

옮긴이에게는 아마도 이런 사건들처럼 영미 분석 철학과 유럽 대륙 철학 사이에 놓인 큰 간극을 잘 설명해주는 일화는 없는 것처럼 보인다. 서양 현대 철학을 전공하시는 분들은 잘 알고 계시듯이 영미 분석 철학과 유럽 대륙 철학은 오랫동안 서로 상대방 철학에 대해서 무심한 눈길을 보냈거나, 심지어 때로는 심각하게 적대적인 관계를 맺어왔다. 예컨대, 대륙 철학자의 눈에서 볼 때 분석 철학은 대단히 딱딱하고 무미건조한 철학이다. 논리적 엄밀성과 확실성을 강조하다 보면, 인간의 따뜻한 감정과 풍부한 정서가 개입될 여지가 별로 없기 때문이다. 그 대신 분석 철학자의 글은 논리적으로 대단히 명쾌하고, 요점을 분명히 집어 표현해내는 장점이 있다. 길게 책을 쓰지 않고 단 한 편의 논문에서 할 말을 다 한다. 

그래서 분석 철학자들은 대륙 철학을 논리적 엄밀성을 결여한 아마추어 철학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여긴다. 분석 철학자들에게 대륙 철학자는 쓸데없이 철학사에 집착하고 이상한 은유로 장황하게 알쏭달쏭한 말을 길게 늘어놓거나, 심지어 기본적인 논리적 규칙조차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로 보이기 십상이다. 한편, 대륙 철학자들은 분석 철학을, 인간의 생생한 삶과 역사적 현실을 도외시하고, 윤리적 열정이나 실존적 열정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으며, 정치적으로는 부당한 현실을 고착화하고 불의에 눈감는 보수주의 철학으로 생각했다. 요즘은 어떤지 모르지만 옮긴이의 기억으로는 이렇게 서로를 경원시하는 경향이 꽤 오랫동안 우리나라에서도 지속되었던 걸로 알고 있다.

이 책은 오스트레일리아의 소장학자들인 제임스 체이스와 잭 레이놀즈가 공저한 『Analytic versus Continental』(Acumen, 2011)을 옮긴 것이다. ‘철학의 방법과 가치에 관한 논변들’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우리말로는 『분석 철학 대 대륙 철학』으로 번역하였다. 이 책은 위 예처럼 영미 분석 철학과 유럽 대륙 철학이 20세기 초부터 지금까지 서로 대립하고 소통하지 못했던 저간의 사정을 여러 측면에서 탐구해나간다. 

저자들은 1부(1~6장)에서 대륙 철학과 분석 철학의 분열이 20세기 초 후설과 프레게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보고 있다. 그 분열은 시간이 지날수록 심화하는데, 그 뒤 러셀 대 베르그손의 대결, 카르납 대 하이데거의 대결, 프랑크푸르트학파 대 논리 실증주의 및 포퍼의 대결, 그리고 라일, 에이어, 스트로슨 등과 메를로-퐁티, 장 발 등 프랑스 및 독일 철학자들 간의 루아요몽 회합, 데리다 대 썰 간의 대결을 통해 양 전통 간 고착되어 가는 분열의 역사적 전개 과정을 그려낸다. 

2부(7~14장)에서는 분석 철학과 대륙 철학의 핵심적인 방법론상의 차이를 다룬다. 저자들은 이미 분석 철학이 언어적 전환, 개념 분석, 형이상학에 대한 회의, 철학과 과학의 연속성 주장, 환원적 분석 방법, 형식 논리학의 사용, 논증 중심, 명료성에 대한 관심, 상식의 구출 등을 그 특징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명시한다. 그러면서 특히 분석 철학은 사고 실험 및 반성적 평형 방법, 자연화하기 책략, 최선 설명 추론 등을 주요 방법론으로 사용하고 있음을 밝힌다. 이에 반해 대륙 철학은 역사성의 긍정과 그것의 철학적 우선성을 주장하는 ‘시간적 전환’, 선험적 추리(논증)의 수용, 상호 주관성 중시, 정신에 관한 반표상주의, 상식과 철학적 방법을 제휴시키려는 데에 대한 경계심, 과학에 대한 비판적 태도, 철학과 예술과의 친연성, 윤리-정치적 문제에 대한 ‘반이론적’ 태도 등을 그 특징으로 하고 있다는 점을 밝혀준다. 

3부(15~20장)에서 저자들은 두 전통의 이런 방법론적인 차이가 존재론, 시간론, 정신 철학, 윤리학, 언어 철학 등 세부 주제에 적용되었을 때, 어떤 결과가 나타나는지를 보여주는 데 주력한다. 15장에서는 하이데거, 사르트르의 현상학적 존재론과 콰인, 데이비슨의 분석적 형이상학 간의 비교가 이루어진다. 16장에서는 분석 진영인 데이비슨의 의미론적 진리론 및 마이클 더밋의 반실재론과, 하이데거, 메를로-퐁티, 푸코를 중심으로 한 대륙적 반실재론이 비교된다. 17장에서는 대륙의 ‘시간적 전환’ 맥락에서 반현재주의적인 데리다와 들뢰즈의 시간관과 분석 철학의 소위 4차원주의 시간관이 대비되고 있다. 18장에서는 심신론과 관련하여 분석적 표상주의와 대륙적 반표상주의가 비교되고 있다. 19장에서는 윤리학을 주제로, 공리주의와 자유주의로 대표되는 분석 철학의 이론적 접근법과 덕 윤리학과 비슷한 유형으로 진단되는 대륙 철학의 반이론적 접근법이 논의된다. 

끝으로 20장에서는 타인 마음 존재의 확인 문제를 놓고 전개된 양 전통의 여러 가지 이론들을 비교한다. 이 문제의 해결은 분석 철학 쪽에서는 일종의 회의론을 극복하는 기획의 일환으로 보여지면서 소위 ‘이론’ 이론이나 흉내 이론이 소개되며, 대륙 철학 쪽에서는 존재론적 차원의 문제로 설정되면서 상호 주관성에 대한 선험적 논증 및 소위 표현 우선주의를 통해 정당화되는 것으로 설명된다. 

결론부에서 저자들은 불행히도 분석-대륙의 분열이 여전히 고착되어 있고 아직도 진행 중이라는 점을 확인한다. 또 그동안 서로 화해할 수 있는 기회가 종종 있었으면서도 그것을 살리지 못한 것에 대해 아쉬움을 토로하기도 하고, 프리드맨의 의견을 좇아 양측의 화해를 성사시킬 수 있었을 중요한 중도적 철학자로 에른스트 카시러를 거론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들은 자기들의 작업에 어느 정도 수긍할 만한 의의가 있을 것으로 평가한다. 그것은 소위 종교 철학의 ‘약한 불가지론’의 입장을 원용해 메타-철학적인 불가지론을 견지하는 것이다. 이것은 분석 철학이나 대륙 철학이 각자의 ‘타자’를 가지지 않고서는, 어느 한쪽의 철학을 이해할 수 없다고까지 주장하지는 않지만, 대신 자기 고유의 철학적 전통을 이해하는 데 메타-철학적인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에게 ‘타자’의 눈은 주의를 기울일 만한 가치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리하여 양 전통은 상대방의 회의론적인 눈을 통해 자기 자신의 전제들을 보게 됨으로써 온건한 다원론적인 이득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돌이켜 보니, 우리나라도 영미 분석 철학과 유럽 대륙 철학에 다 관심을 가지고 철학을 하시는 분은 매우 드문 것 같다. 이 두 영역을 모두 연구하는 것은 정말 출중한 학문적 역량이 없으면 안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내 기억으로는 연세대 철학과의 이승종 교수님이 양쪽을 다 아우르는 글을 쓰시는 대표적인 학자이신 걸로 보인다. 오래전에 연세대에서 옮긴이에게 이승종 교수님의 『크로스 오버 하이데거』를 연세 학술상 후보 저서로 심사를 의뢰하였는데, 아마도 이 책이 우리나라에서는 양 전통의 철학을 다 충실하게 다루고 있는 가장 모범적인 사례일 것이다. 당시 쓴 심사평이 남아 있지는 않지만, 칸트의 절창을 흉내 내서 “대륙 철학 없는 분석 철학은 공허하고, 분석 철학 없는 대륙 철학은 맹목이다.”라는 글귀를 집어넣었던 기억은 난다. 이 책을 통해 우리 철학계에서도 영미 분석 철학과 유럽 철학의 상호 인정을 향한 작은 발걸음이 디뎌지기를 희망한다.

 

이윤일 가톨릭관동대·철학

가톨릭관동대학교 명예교수. 숭실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철학과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저서로는 〈의미, 진리와 세계〉, 〈논리로 생각하기 논리로 말하기〉, 〈현대의 철학자들〉, 〈논리와 비판적 사고〉(공저)를 낸 바가 있으며, 번역서로는 〈파롤〉, 〈콰인과 분석철학〉, 〈철학적 논리학〉, 〈인간의 얼굴을 한 윤리학〉, 〈마이클 더밋의 언어철학〉, 〈진리와 해석에 관한 탐구〉, 〈예술철학〉, 〈포스트모던 해석학〉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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