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위그노들의 자유를 위한 위대한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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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위그노들의 자유를 위한 위대한 여정!!
  • 이명아 기자
  • 승인 2023.10.22 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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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 종교개혁의 역사 | 김충현 지음 | 충남대학교출판문화원 | 357쪽

 

이 책은 근대 프랑스에서 소수자였던 위그노들의 자유를 위한 위대한 여정을 담고 있다. 16세기 프랑스에는 종교개혁을 지지했던 개신교도들, 즉 위그노로 불리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당시 프랑스는 가톨릭교회의 장자로서 개신교를 박해했고, 이러한 상황에서 위그노들은 종교적 자유를 위해 투쟁을 시작했다. 이때 왕족들이 위그노들을 지지했는데, 종교개혁사상을 옹호했던 기독교 인문주의자 마르그리트 드 나바르가 있었고, ‘위그노 여왕’으로 불리며 종교전쟁을 이끌었던 잔 달브레와 그의 아들 앙리 드 부르봉이 있었다. 

앙리 드 부르봉은 살리크 법에 따라 앙리 4세로서 프랑스 왕이 되었는데, 이후 과거의 동료들을 위해 낭트칙령을 발표하여 종교적 자유를 허용했다. 그러나 그의 아들 루이 13세와 손자 루이 14세는 왕국의 통합을 위해 낭트칙령을 철회하고 위그노들을 박해했다. 위그노들은 포기하지 않고 박해에 대항하여 지속적으로 저항했으며, 이러한 저항을 통한 희생은 1787년 루이 16세의 ‘관용칙령’을 통해 그 결실을 보았다. ‘관용칙령’으로 위그노들은 종교적 자유뿐만 아니라 시민으로서 다른 프랑스인들과 평등하게 살 권리를 획득했다.

프랑스 종교개혁의 역사는 1536년 칼뱅(Jean Calvin)이 『기독교강요』(Institutio Christianae Religionis)를 저술한 때부터 시작되는데, 그는 1534년 발생한 가톨릭 미사를 비판하는 벽보사건에 대하여 위그노들을 변호하면서 『기독교강요』를 저술하였다. 

칼뱅을 비롯하여 개신교 신학자들은 성경에 나오는 여성들을 통해 교회에서 여성의 역할이 중요함을 강조했고, 특히 칼뱅은 사회적으로 특별한 경우에 여성들에게 지도권이 주어지며 남성을 지배할 수 있다고 언급했다. 그러므로 프랑스 종교개혁에서 여성들이 큰 활약을 했던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1~3장은 프랑스 왕실 소속이자 나바르(Navarre) 왕국의 여왕이었던 마르그리트 드 나바르(Marguerite de Navarre)와 그녀의 딸 잔 달브레(Jeann d’Albret)에 대한 연구 결과를 담았다.

마르그리트 드 나바르는 프랑수아 1세(Francois I)의 누나로서 개신교에 매우 우호적이었고 스스로도 개신교 사상에 고무되었기 때문에, 프랑스 왕실에서 개신교의 보호자로서 행동했고 따라서 개신교가 전파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그러나 프랑스의 가톨릭 전통을 무시할 수 없었던 마르그리트가 개신교로의 개종 없이 미온적인 태도를 보인 것과 달리, 그녀의 딸인 잔 달브레는 1560년 크리스마스에 공개적으로 개신교로 개종을 하면서 ‘위그노 여왕’으로 활약하였다. 잔은 자신의 영지인 베아른(Bearn)에서 개신교 예배를 합법화하는 법령을 시행했고, 프랑스 종교전쟁에 참여하여 위그노들을 지휘했다. 그러나 1572년 44세를 일기로 젊은 나이에 사망했기 때문에 그녀의 행보는 결실을 보지 못했다.

처음에 어머니와 삼촌을 대신하여 ‘위그노 왕’으로서 행동했던 잔의 아들 앙리 드 나바르(Henri de Navarre)는 앙리 4세(Henri IV)로서 프랑스 왕위를 계승하게 되면서 더 많은 역할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앙리 4세는 렝스 성당에서 가톨릭 대관식을 가져야 했던 프랑스 왕권의 특성을 받아들이고 가톨릭으로 개종하면서 프랑스에서 개신교가 인정되리라는 위그노들의 꿈은 사라지고 말았다. 대신 위그노들은 1598년 가장 관용적인 낭트칙령(Edit de Nantes)을 얻게 됨으로써 많은 지역에서 예배의 자유를 확보했고, 몇몇 지역에서는 무력을 통한 방어권을 가지게 되었다. 책의 4장과 5장은 바로 이런 앙리 4세의 개종과 낭트칙령을 다루고 있다.

그러나 개신교 분위기에서 성장한 앙리 4세와 달리, 그의 아들과 손자였던 루이 13세(Louis XIII)와 루이 14세(Louis XIV)는 하나의 종교로 프랑스를 통합하여 왕권을 강화하려는 근대 유럽의 절대주의 분위기 속에서, 낭트칙령을 엄격하게 적용하는 것을 시작으로 낭트칙령의 부록과도 같은 특허장(Brevet)을 폐지한 후 결국 1685년 개신교를 금지하는 퐁텐블로 칙령(Edit de Fontainebleu)을 발표하게 되었다. 

루이 14세는 이 칙령을 통해 ‘프랑스에는 더 이상 개신교도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낭트칙령을 폐지했고, 결국 낭트칙령에서 허용된 모든 자유가 박탈되었다. 그러나 퐁텐블로 칙령이 역사상 가장 악명높은 칙령이 된 것은 개신교를 금지한 것이 아니라 위그노들의 망명을 금지하고 국경을 봉쇄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위그노들은 망명하다가 죽거나 혹은 가톨릭으로 개종하거나 하는 두 가지 대안만을 가질 수 밖에 없는 역사상 가장 비참한 신세가 되었다. 루이 14세의 위그노 박해는 7장에 그 내용을 담고 있으며, 또한 낭트칙령의 특허장을 폐지했던 루이 13세의 행적과 관련된 내용은 6장에 서술되어 있다.

퐁텐블로 칙령에도 불구하고, 신앙을 포기할 수 없었던 많은 위그노들이 결국 망명을 선택했고 대략 20만 명의 위그노들이 해외에서 은신처를 찾았다. 해외로 망명한 위그노들은 국제사회를 향해 루이 14세의 만행을 고발하며 저항하기도 했는데, 특히 위그노 목사 피에르 쥐리외(Pierre Jurieu)는 『바빌론의 압제에서 신음하는 신자들에게 보내는 목자의 편지』(Lettres pastorales aux fideles qui gemissent sous la captivite de Babylone, 1686-1689)를 통해 인민주권론이나 사회계약사상 등을 통해 루이 14세의 절대군주제를 비판했다. 또한 영국으로 망명한 위그노들은 영국의 명예혁명(Glorious Revolution)에 영향을 주었는데, 그들의 존재가 가톨릭교도인 제임스 2세(James II)의 등극에 대해 영국인들에게 공포감을 심어주었기 때문이다. 퐁텐블로 칙령 이후 위그노들의 저항과 영향에 대해서는 8장과 9장에 소개되어 있다.

마지막 10장에서는 위그노들이 해왔던 투쟁의 결실인 루이 16세(Louis XVI)의 관용칙령(Edit du Roi concernant ceux qui ne font pas profession de Religion Catholique)에 대해 다루고 있다. 1685년 퐁텐블로 칙령을 통해 그 존재를 거부당했던 위그노들은 그러나 포기하거나 좌절하지 않았고, ‘하느님은 선택된 사람들을 반드시 구원하신다’는 믿음으로 신앙을 지켰다. 결국 1787년 아주 극소수였지만 여전히 프랑스의 국민으로서 존재했던 위그노들에 대한 관용칙령이 선포되면서 위그노들은 시민으로 살 수 있는 자격을 얻었으며, 일부 지역에서 예배의 자유를 획득하였다. 이로써 1536년부터 시작된 자유를 위한 위그노들의 여정은 250년 만에 결실을 맺게 되었고, 위대한 자유를 위한 투쟁으로 기록될 만한 가치를 지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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