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재계와 상징계의 대립, 라캉에서부터 살피는 현대 프랑스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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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재계와 상징계의 대립, 라캉에서부터 살피는 현대 프랑스 철학
  • 이현건 기자
  • 승인 2023.10.22 0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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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캉, 바디우, 들뢰즈의 세계관 | 장용순 지음 | 이학사 | 272쪽

 

이 책에서 저자 장용순 교수는 현대 프랑스 철학이 공유하는 공통의 세계관을 추출하고, 그가 독창적으로 고안한 도식을 적극 활용하여 누구나 이해할 수 있도록 라캉, 바디우, 들뢰즈를 중심으로 주요 철학자들의 사상을 풀이한다. 저자는 이 도식 체계를 머릿속에 넣으면 아무리 어려운 개념이나 용어가 나와도 휘둘리지 않고 프랑스 철학의 전체 지도를 파악할 수 있다고 자신한다.

이 책의 도식들은 기본적으로 ‘빨간색 타원’과 ‘파란색 타원’이라는 대립 구도로 이루어져 있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모피어스가 토마스 앤더슨에게 빨간약과 파란약을 내놓으면서 ‘빨간약을 먹고 실재를 보겠느냐, 파란약을 먹고 이 세계에 머무르겠느냐’를 선택하게 하는데, 이것이 바로 라캉이 말하는 ‘실재계’와 ‘상징계’의 의미와 정확하게 맞아떨어지기 때문에 지은이는 이 두 색깔을 선택했다.

이러한 대립 구도는 ‘마그마’-‘지각’, ‘혼돈’-‘질서’로도 설명된다. 이 책은 엄청난 에너지나 힘이 부글부글 끓고 있는 마그마의 상태, 요동치는 흐름이 있는 혼돈의 상태, 생명 그 자체, 역동적인 에너지의 상태를 빨간색 타원으로 표현한다. 한편 마그마는 계속 그 상태로 있는 것이 아니라 굳어서 지각이 되고, 세계에는 자연과 대조되는 인공물과 질서가 만들어진다. 이 책은 이런 것을 파란색 타원으로 표현한다. 그런데 마그마가 굳어도 군데군데 굳지 않은 부분이 생기는 것처럼 질서를 아무리 잘 만들어도 완전히 덮이지 않는 부분이 있다. 이러한 부분은 파란색 타원에 점점이 뚫린 빨간색 구멍으로 표시된다. 이 빨간색 구멍은 고정되지 않고 계속해서 꿈틀꿈틀 움직인다. 지은이는 이 부분이 라캉 정신분석에서 가장 난해한 개념인 ‘대상 a’라고 설명한다. 이 책의 도식과 다양한 비유는 대상 a를 쉽게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대상 a는 라캉 정신분석에서 정신질환을 분류하는 데에도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대상 a는 증상 개념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라캉은 정신질환을 크게 ‘신경증, 도착증, 정신병’으로 분류한다. 먼저 ‘신경증’에는 대다수의 사람이 가지고 있는 강박증과 히스테리가 포함된다. 이 책에 따르면 강박증은 상징계의 질서 체계가 완벽하게 막고 있어 대상 a, 즉 증상이 아예 출현하지 못할 때 나타난다. 증상이 상징계를 뚫고 빠져나가면 히스테리로 발현된다. 한편 상징계가 덜 형성되면 ‘도착증’이, 상징계가 아예 형성되지 않으면 ‘정신병’이 생긴다. 이 책은 이러한 정신질환의 분류 및 형성 과정을 상징계, 실재계와 상상계의 도식, 쾌락과 고통의 진폭 그래프, 영화의 예를 사용하여 알기 쉽게 설명한다.

이러한 기본적인 구도는 라캉의 개념들뿐 아니라 바디우와 들뢰즈로 이어지는 현대 프랑스 철학자들의 세계를 살피면서도 지속적으로 등장한다. 하지만 저자는 프랑스 철학이라는 숲의 전체 지도를 제시하면서도 숲속으로 들어가 나무 하나, 꽃 하나를 살피는 일을 소홀히 하지 않고, 분명하게 알아두어야 할 각 철학자들의 사상의 특징과 핵심을 짚어나간다. 예를 들면 라캉의 ‘증상’, 바디우의 ‘사건’, 들뢰즈의 ‘특이성’이라는 주요 개념을 도식에서 동일한 맥락으로 설명한다. 우리가 라캉, 바디우, 들뢰즈를 각각 읽을 때는 이러한 개념들이 너무 현란하게 설명되어 있어서 서로 다른 의미처럼 느껴지는데, 도식을 통해서 그 핵심을 살펴보면 같은 지점을 말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20세기 후반 존재론의 양대산맥으로서 문제의식을 공유했던 바디우와 들뢰즈에게는 많은 공통점이 있다. 하지만 이 책은 두 철학자가 따르는 계보가 다르기 때문에 분명히 존재하는 차이점들을 설명하는 것도 놓치지 않는다.

 

각 철학자들의 세계에 대한 배경 설명도 그들의 진리관을 자세히 알아보는 데 큰 도움을 준다. 바디우의 아버지는 수학 교사였는데, 나치에 대항해서 싸운 레지스탕스였고 툴루즈 시장을 역임했다. 바디우는 어릴 때부터 툴루즈 극장에서 무용, 연극, 오페라를 많이 봤으며, 어머니가 문학을 하여 그 영향으로 시와 소설도 많이 읽었다. 그래서 바디우는 연극, 춤 같은 공연예술과 시 같은 문학의 예를 즐겨 사용한다. 

한편 들뢰즈의 진리관을 이해시키기 위한 배경으로 이 책은 수학 개념인 미분, 적분의 매우 기본적인 원리와 그래프를 제시한다. 미적분을 설명하는 이유는 그 개념이 들뢰즈가 말하는 잠재태와 현실태 사이의 운동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과학이나 수학이 철학과 밀접하게 연관되는 것이 프랑스 철학의 전통이라는 점을 언급하면서 지은이는 그 기반을 알고 있으면 프랑스 철학을 더욱 쉽게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하지만, 수학을 꼭 알지 못해도 프랑스 철학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독자들을 친절하게 안내한다.

이 책의 도식은 세 명의 철학자뿐만 아니라 바타유, 데리다와 같은 프랑스 철학자들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데, 20세기 후반 프랑스 철학은 체계 하부의 무질서에 대한 탐구를 공유하기 때문이다. 프랑스 철학 세계에서 19세기가 체계를 만드는 시기였다면 20세기는 체계의 저변을 탐구하는 시기였는데, 현대 프랑스 철학은 광기를 받아들일지언정 억압은 용납하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이를테면 저자는 〈퐁뇌프의 연인들〉과 같은 프랑스 영화의 이야기 구조가 많은 사람에게 기이하게 받아들여지곤 하는데, 그 이유가 프랑스 철학 특유의 성격이 영화에도 어느 정도 반영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또한 이러한 경향은 1968년 프랑스 문화혁명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 운동에서는 관료적 시스템과 구태의연한 제도를 타파하고, 인간의 욕망을 인정하고, 자유로운 삶과 상상력의 권리를 인정해달라고 외쳤다. 이처럼 영원성보다는 일시성을, 동일성보다는 차이를, 실체보다는 관계를 강조하고 중요하게 생각하는 프랑스 철학의 관점은 많은 사람이 그것을 어렵게 느끼는 이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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