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조각의 유물이 살아 숨 쉬는 ‘지금, 여기’의 이야기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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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조각의 유물이 살아 숨 쉬는 ‘지금, 여기’의 이야기가 되다
  • 이현건 기자
  • 승인 2023.10.22 0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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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 모든 것의 기원: 어디에도 없는 고고학 이야기 | 강인욱 지음 | 흐름출판 | 352쪽

 

죽은 자는 말이 없지만, 세상을 떠난 이가 남긴 물건이나 흔적에는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수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다. 고고학은 과거의 유물을 바탕으로 문헌으로는 남아 있지 않은 옛사람들의 생활상과 문화를 복원하고 추적한다. 다시 말해, 죽은 과거에 새로운 삶을 부여하는 과정이 바로 고고학이다. 그리고 고고학자는 유물 위에 쌓인 시간의 먼지를 신중히 털어내고 그것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가만히 귀를 기울인 뒤, 자신의 전문 지식과 학문적 상상력 그리고 스토리텔링을 더해 살아 숨 쉬는 생명력을 불어넣는 이다.

이 책은 ‘32개의 유물 이야기’를 ‘잔치(Party)’, ‘놀이(Play)’, ‘명품(Prestige)’, ‘영원(Permanence)’이라는 네 가지의 키워드로 나누어 살핀다. 각각의 키워드는 인간 삶의 핵심적인 축인 ‘먹고’, ‘즐기고’, ‘욕망하고’, ‘죽음을 맞이하는’ 모습을 하나의 단어로 압축한 것이다.

지금 우리가 먹고, 마시고, 입고, 즐기는 모든 것은 그것을 처음 만들거나 발견해서 사용한 누군가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다시 말해, 유물은 인류가 미처 기록해두지 못한 역사의 구멍 난 부분을 메워주는 퍼즐 조각이자 옛사람들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타임캡슐인 것이다. 고고학자는 깨진 항아리 파편, 온전치 않은 인골, 토기에 묻은 작은 흔적들로부터도 단서를 얻어 미지의 역사를 복원하고 재구성하는 탐정과도 같다.

저자 강인욱 교수는 세계 각지의 발굴 현장을 누비며 쌓아온 고고학자로서의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고대인들의 의식주에서부터 놀이와 여행과 같은 유희의 역사, 황금과 실크 등 진귀한 물건들을 탐하고 영생을 꿈꿨던 인간의 욕망까지 과거와 현재, 삶과 죽음, 번영과 몰락의 경계를 종횡무진하며 희로애락의 인간사를 들려준다.

1부 ‘잔치: 요리하고 먹고 마시다’에서는 인간의 삶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인 음식을 주제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인류는 자연물을 채집하고 수렵해서 먹는 것에 머무르지 않았다. 그 대신 발효나 염장 등 식재료를 더 오래 보관할 수 있는 방법을 터득해 식량을 얻기 어려운 곤궁한 시기를 극복하여 생존 가능성을 높여왔다. 이와 같은 가공법은 생존 가능성만 높여준 것이 아니라 미식의 문화를 형성하는 데에도 일조했다. 세계 각지에서 발견된 저장 토기나 소줏고리 유물, 고분에서 출토된 동물이나 생선의 뼈 등을 통해 오래전 사람들이 먹고 마시던 음식과 술의 맛은 어땠을지 상상해보는 과정은 자못 흥미롭다.

2부 ‘놀이: 놀고 즐기며 유희하다’에서는 동굴벽화나 고인돌 등 고대인들이 남긴 유희와 협동의 흔적을 통해 협력하고 공생할 줄 아는 인간의 기원을 찾아 나선다. 고대의 유적지에서 발굴된 고양이 또는 강아지의 뼈나 이들의 모습이 새겨진 유물들을 통해서는 자연을 숭배하는 한편, 자연을 인간에게 유리하게 길들이며 문명을 구축해갔던 인류의 지혜와 응전의 역사를 확인할 수 있다.

3부 ‘명품: 부와 아름다움을 추구하다’에서는 황금 유물로 치장되거나 비단옷을 두른 미라와 고대의 무덤에서 출토된 황금 부장품 등을 통해 오늘날과 그리 다르지 않은, 아름다움과 부를 갈망하고 탐닉했던 옛사람들의 마음을 살펴본다.

마지막으로 4부 ‘영원: 영원한 삶을 욕망하다’에서는 무덤에 그려진 벽화, 인골이나 미라에 덧씌워진 마스크, 그리고 그들의 몸에 새겨진 문신 등을 토대로 고대인들이 죽음을 어떻게 생각하고 맞이했는지, 망자를 어떻게 배웅하고 추모했는지를 살펴본다. 그리하여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고 영생을 염원했던 인류의 기원을 추적한다.

저자에 따르면 ‘고고학이야말로 가장 미래 지향적인 학문’이다. 기존의 학설을 뒤집는 새로운 유물이나 유적이 발견될 때마다 인류의 역사는 새롭게 쓰이고 갱신될 수밖에 없다. 가령, 1970년대 이전까지는 그때까지 발굴된 석기의 형태로 추정해볼 때 동양의 구석기 문화가 서양의 구석기 문화보다 덜 발달되었다는 이론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1970년대 후반 경기도 연천군 한탄강 인근 전곡리에서 동아시아 최초의 아슐리안 주먹도끼가 발견됨으로써 세계 고고학계에 정설처럼 널리 퍼진 편견이 깨지게 된다. 사실 과거 자체는 변하지 않는다. 오늘날의 우리가 당시의 상황을 정확히 모를 뿐이다. 하지만 새롭게 발굴된 유물 한 점으로 인해 과거를 해석하는 우리의 시선은 지금까지의 통념과 완연히 달라질 수 있다. ‘고고학은 가장 오래된 것을 다루지만 가장 미래 지향적인 학문’이란 말의 참뜻은 바로 이것이다.

또한, 고고학자가 발굴해낸 과거의 유물은 단순히 자료를 수집하고 모은다는 의미를 넘어서서 인간 본성에 대한 깊은 통찰을 가능하게 해준다는 데 더 큰 의의가 있다. 무덤을 예로 들어보자. 세계 고고학 자료의 절반 이상은 무덤과 관련된 것들이다. 고고학자에게 무덤은 옛사람들의 삶을 복원할 수 있게 해주는 소중한 자료의 보고다. 그런데 무덤에서 출토된 인골이나 유물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시대를 살았던 이들의 생활상뿐만 아니라 그들의 내밀한 마음까지 엿볼 수 있다. 

이처럼 고고학자의 시선으로 내 주변과 세상을 바라보면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해 한층 더 깊게 이해할 수 있는 새로운 지평이 열린다. 책에 담긴 32개의 유물 이야기는 우리가 먹고, 마시고, 입고, 누리는 모든 것의 기원을 탐구하는 내용에서 시작해 궁극적으로는 지금, 여기를 사는 우리들의 삶을 성찰하고 되돌아보는 내용으로 마무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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