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의 한글 교육과 확산은 어떻게 진행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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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한글 교육과 확산은 어떻게 진행되었을까
  • 백두현 경북대·국어학
  • 승인 2023.10.21 2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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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테제_ 『조선시대의 한글 교육과 확산』 (백두현 지음, 태학사, 192쪽, 2023.09)

 

한글은 과학적으로 만들어져 배우기 쉬운 문자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훈민정음 반포 이후 이 문자가 백성들 사이로 널리 퍼져나갔을 것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조선의 정부는 백성들에게 훈민정음을 가르치지도 않았고 백성들이 이 문자를 배울 만한 학습자료도 만들지 않았다. 훈민정음은 반포(1446) 직후 세종의 뜻으로 서리(胥吏) 선발 시험에 잠시 부과되었다. 그후 갑오개혁(1894)에 이르기까지 440여 년 동안 훈민정음은 국가의 공식적 교육 제도에 들어가지 못하였다. 양반가에서는 아이들의 한문자 학습과 부녀자 교육을 위해 ‘언문’을 집안에서 사사롭게 가르쳤다. 그러나 평민 이하 하층민들은 한글을 배울 기회가 없었다. 

이 책은 한글 교육이 가진 이러한 특성을 기술하고, 조선시대에 진행된 한글의 교육과 학습 그리고 이를 통해 이루어진 한글의 확산 과정을 역사적 관점에서 서술하였다. 이런 주제를 다룬 단행본 연구서는 이 책이 처음이다. 이 책에서 다룬 논점과 논구를 통해 밝힌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조선왕조실록 세종, 문종, 세조실록 기사를 통해 반포 이후 공적으로 행해진 훈민정음 교육에 대해 논하였다. 세종이 관아의 이서(吏胥)들에게 언문을 가르친 사실, 세자(훗날 문종)의 서연(書筵) 교육에 훈민정음 과목을 넣었다. 세종 대 이후의 정음 교육은 공적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 없다. 어린이 교육을 위해 설치된 동몽학(童蒙學)에서 정음 자모를 가르쳤을 만하나 동몽학은 정상적으로 운영되지 못하였다. 특히 영조가 동몽학 활성화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나 뜻대로 실천하기 어려웠다.

양반가에서 어린이를 위한 한글 교육은 부녀자가 담당했던 사실이 「현풍곽씨언간」에 나타나 있다. 따라서 양반층 자제들이 출입한 서당에서 한글 교육을 행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평민층 자제들이 다닌 서당에서는 한글 교육을 베풀었을 것이다. 갑오개혁과 함께 언문이 국문으로 승격되면서 국가가 한글 교육을 관장하고 학교의 교사가 한글 교육의 주체가 되었다. 이와 같은 한글 교육의 주체 변화를 필자는 “사사로운 가르침에서 공적 교육 제도로”라고 요약하였다.

둘째, 조선시대에 간행된 한글 문헌을 통해서 한글의 확산 과정을 다루었다. 한글 문헌 자료가 산출된 시대적 추이를 분석하여 이것이 한글의 확산과 어떻게 관련된 것인지를 고찰하였다. 한글 학습과 확산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는가를 기준으로 조선시대 한글 문헌들을 평가해 보았다. 한글 문헌의 내용, 저술자 혹은 필사자, 문헌의 이용자 혹은 예상 독자 등의 요소를 고려하여 한글 확산에 미친 영향의 정도를 평가하고, 이를 부류로 나누어 표로 정리하였다. 한글 확산의 연구에 새로운 방법론을 적용해 본 것이다. 많은 한글 문헌 중 한글 교육서가 한글 확산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한글 교육서만 가려서 핵심 내용을 간추리고 한글 확산의 시대 구분을 다음과 같이 설정하였다.

셋째, 한글의 공간적 확산과 사회 계층적 확산을 각각 나누어 논하였다. 한글 학습의 공간적 확산은 궁중과 서울 도성의 훈민정음 사용이 16세기 초기 이후 지방으로 확산된 것이라고 요약하였다. 16세기 초기부터 지방 사찰에서 간행된 불교서 언해본에 양반가 부녀자는 물론 평민과 천민까지 시주금을 희사하였다. 아동 교육서인 『훈몽자회』가 전국 여러 곳에서 간행되었다. 훈몽자회 중 한글 교육에 가장 중요한 내용은 「언문자모」가 불교서 『진언집』의 여러 판본에 수록됨으로써 사찰 승려들이 한글을 학습하였다.

한글의 사회적 확산은 계층적 측면에서 논하였다. 15세기 후기에 왕실가 사람들은 물론 궁중의 궁녀 등 하층 신분 사람 중에도 훈민정음 문해자가 있었음이 조선왕조실록 기사에 나타나 있다. 왕실가와 관련된 상층 신분 사람들과 궁궐의 하층 신분 사람들이 훈민정음을 가장 먼저 배웠고, 이어서 서울 도성의 양반층, 중인층, 양인층으로 확산되었다. 

필자는 19세기 후기의 불교서인 해인사 도솔암판 『일용작법』(1869)에 「언본」이란 이름을 달고 한글 음절표가 공간(公刊)된 사실을 중시한다. 공간된 한글 음절표 「언본」을 상업적으로 변용한 것이 「정축신간반절」 등의 방각본 음절표이다. 방각본 한글 음절표는 한 장짜리 목판으로 인쇄되어 저렴한 가격으로 판매되었다. 방각본 한글 음절표는 하층민들의 한글 학습에 상당한 도움이 되었을 것이고, 19세기 중후기에 크게 늘어 난 방각본 한글 소설의 상업적 출판과 맞물리면서 방각본 한글 음절표는 하층민으로의 한글 확산을 견인하였다. 

19세기 후기부터 하층민으로의 한글 확산이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되지만 이것만으로 한글 문해율이 빠르게 증가하지 못하였다. 하층민에게로 한글이 본격적으로 확산되기 시작한 시기는 갑오개혁 이후에 신교육제도인 학교가 세워지고, 조선시대 신분제도가 법률적으로 폐지된 이후이다. 한글이 하층민에게로 확산된 결정적 계기는 신분제의 완전 철폐와 신교육제도에 따른 학교 교육의 확대에 있다. 필자는 한글의 공간적 확산과 사회 계층적 확산을 묶어서 “서울을 넘어, 양반층에서 하층민으로”라고 표현하였다.

1930년의 조선총독부 국세조사에 조선인의 조선문 문해율은 15.44%에 불과하였다. 19세기 후기에 하층민에 이르기까지 한글이 널리 확산되었다면 1930년의 국세(國勢) 조사에서 이렇게 낮은 문해율이 나올 수 없다. 조선총독부의 이 조사를 믿는다면 1930년의 한글 문맹률은 84.56%나 된다. 한글 문해율이 본격적으로 상승된 시기는 광복 이후 민주정치 제도가 마련되고 문맹 타파를 위한 문자 교육이 국가적으로 시행된 이후부터이다. 1960년에 경제기획원이 발표한 한글 문맹율이 27%였다. 한글 문해율이 73%에 도달함으로써 백성을 위해 훈민정음을 만든 세종의 창제 목적이 실현된 때는 1960년대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을 마무리하면서 한글 확산이 갖는 역사적 의미를 해석하였다. 양반층이 지배한 조선시대의 계급 사회가 타파되고, 국권을 되찾은 광복(1945) 이후 민주 정부가 수립되면서 국가는 한글을 모르는 국민에게 한글 교육을 대대적으로 시행하였다. 민주 정부의 운영에는 문자를 아는 국민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은 20세기 이후 한글을 매개로 과학기술을 비롯한 근대 문명 지식을 흡수하여 새로운 한국 사회를 건설해 왔다. 이것을 가능케 한 토대가 조선시대에 진행된 한글 교육과 확산에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점에서 한글의 교육과 확산 과정을 밝히는 것은 한국 사회의 역사적 발전 과정을 설명하는 과제와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백두현 경북대·국어학

경북대학교 명예교수. 훈민정음학회 회장 및 국어사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훈민정음과 옛 문헌 속에 담긴 한국어의 모습, 필사본과 간본을 망라한 한글 문헌 자료, 한국인의 어문생활사, 석독구결 등을 연구해 왔으며, 한글문화유산의 가치를 밝히고 이를 국내외에 널리 알려 한글 문화의 성숙을 위해 노력해 왔다. 주요 저서로는 『훈민정음의 문화중층론: 관점의 전환과 새로운 해석』, 『한글생활사 연구』, 『국어 음운사와 어휘사 연구』, 『현장방언과 문헌방언 연구』, 『한글문헌학』, 『현풍곽씨언간 주해』, 『음식디미방 주해』, 『석독구결의 문자체계와 기능』, 『영남 문헌어의 음운사 연구』 외 다수가 있다. 지금은 ‘한국 어문생활의 역사’, ‘한글 학습자료와 문해율의 변천’에 대한 책을 집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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