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웰니스’와 ‘먹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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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웰니스’와 ‘먹요일’
  • 조원형 편집기획위원/서울대·언어학
  • 승인 2023.10.16 0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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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원형 칼럼]

 

1.

지난 추석 연휴 동안 필자는 고향인 강원도 정선에 다녀왔다. 그런데 정선읍 시내 들머리에 눈에 띄는 입간판 하나가 세워져 있었다. 아래 사진에 보이는 바로 이 입간판이다.

이 입간판에서 필자의 눈길을 끈 것은 역시 ‘정선 웰니스 데이’라는 행사명이었다. ‘웰니스’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몰라 인터넷 검색을 해 보니, 대체의학 분야와 건강 관련 산업계에서 주로 사용하는 용어로서 ‘신체적, 정서적, 사회적으로 건강한 생활을 영위하는 것’ 정도를 가리키는 말인 듯했다. 그래서인지 입간판의 다른 면에는 ‘치유관광 페스타’라는 말도 나와 있었다.

어쩌면 필자의 걱정이 지나친 것일지도 모르겠으나, ‘웰니스’라는 말을 곧바로 이해하고 이 행사에 참여할 수 있는 사람들이 과연 몇이나 될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이런 용어야말로 이른바 ‘순화’가 필요한 용어일 것이다.


2.

지난 10월 5일부터 6일까지 서울 양재동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aT센터)에서 2023 세계 한국어 한마당 학술대회와 2023 한글 문화 산업 전시회가 함께 열렸다. 필자는 학술대회에 이틀 모두 시작부터 끝까지 참가했던 터라 전시회에도 자연스럽게 들를 수 있었다. 그런데 ‘사단법인 국어문화원연합회’에서 언어 순화 사례라면서 전시회장 벽면에 붙여 놓은 말들 중 ‘먹요일’이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왔다. ‘치팅 데이’라는 말을 ‘먹요일’로 바꾸어 부르자는 것이었다. ‘치팅 데이’도 ‘먹요일’도 도무지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되지 않아 역시 인터넷 검색을 해 보았더니, 다이어트 중 하루를 정해 음식을 마음껏 먹는 날이라는 설명이 검색되어 나왔다. 그리고 영어로는 ‘치팅’도 아니고 ‘치트 데이(cheat day)’라고 한다는 이야기도 검색 결과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치팅 데이’든 ‘치트 데이’든 ‘먹요일’로 바꾸어 부르자는 제안에는 동의하기가 망설여진다. ‘먹요일’은 은어나 다름없는 느낌을 주는 말인 데다가 이 ‘치트 데이’라는 것이 꼭 ‘요일’과 결부된 개념인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열흘에 한 번 또는 한 달에 한 번꼴로 이런 날을 가지는 경우도 있을 수 있지 않겠는가.


3.

이 글을 쓰면서 국립국어원 웹사이트를 찾아보았다. 여기에는 ‘웰니스 제품’을 ‘건강 관리 제품’으로, ‘치팅 데이’를 ‘먹요일’로 각각 순화했다는 이야기가 올라와 있었다. 이번에 국어문화원연합회에서 만든 홍보 자료도 결국 국립국어원에서 제안한 순화어를 그대로 가져다 붙인 것이었던 셈이다. 정작 순화어로 바꾸어 써야 할 ‘웰니스’ 같은 말은 공공 기관에서조차 외면하는 반면 ‘먹요일’이나 뒤에서 다시 이야기할 ‘누리집’처럼 문제가 있는 순화어들이 이렇게 더 널리 홍보되고 있는 실정이니 개선해야 할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언어 순화는 국수주의적인 발상에서 하자는 것이 아니다. 무조건 토박이말만이 좋다고 주장하는 것은 오히려 사리에 맞지 않다. 예컨대 ‘텍스트’ 같은 언어학 용어는 ‘이야기’로도, ‘글’로도, 다른 어떤 한국어 토박이말 용어로도 대체하기 어려운 만큼 초중고 교과서에서도 ‘텍스트’ 그대로 쓰는 것이 가장 합당하다. (교과서에 외래어 용어가 나오는 것이 부적합하다는 일각의 주장에는 지지를 보내기가 어렵다.) 그리고 필자는 ‘누리집, 누리꾼’ 같은 말 또한 무조건 토박이말을 우선시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억지로 만든 말이라고 본다. 일단 인터넷 관련 용어에 ‘누리’라는 말을 붙이는 것부터가 어색하다. 그래서 바로 앞에서도 ‘국립국어원 누리집’이 아니라 ‘국립국어원 웹사이트’라는 말을 썼다.

한국어 사용자들이 언어 순화를 해야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소통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서’, 즉 ‘말을 듣는 사람이 더 쉽게 알아듣게 하기 위해서’이다. 국가 기관(아래 각주 참조)에서 ‘웰니스 데이’라는 행사까지 하면서 건강에 각별한 관심을 가지는 것이 요즘 세태인 만큼 ‘건강한 말’에도 관심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한다. 건강한 말이란 다름이 아니라 ‘소통이 잘 되는 말’이라는 점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 각주: ‘정선 웰니스 데이’는 강원특별자치도와 정선군에서 주최하고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에서 후원하는 행사이다. 국가 기관에서 시행하는 공식 행사인 만큼 그 이름부터 한국어를 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용어를 활용해서 지어야 할 것이다.

 

조원형 편집기획위원/서울대·언어학

서울대학교 언어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과 대학원에서 언어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만하임 라이프니츠 독일어연구원 방문학자, 국립국어원 학예연구사 등을 거쳐 현재 서울대학교 기초교육원 강의교수로 일하고 있다. 주요 논문으로 “천주가사에 대한 텍스트언어학적 연구”, “텍스트언어학에 기반한 ‘쉬운 언어(Leichte Sprache)’ 텍스트 구성 시안”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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