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의 가치는 확실성이 아니라 의심에 열려 있다는 데 있다”
상태바
“과학의 가치는 확실성이 아니라 의심에 열려 있다는 데 있다”
  • 이현건 기자
  • 승인 2023.10.16 00:3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김범준의 이것저것의 물리학: 호기심 많은 물리학자의 종횡무진 세상 읽기 | 김범준 지음 | 김영사 | 288쪽

 

XX, XY 말고 YY 염색체는 왜 없을까? 손가락에 침을 묻히면 책장이 잘 넘어가는 까닭은? 챗GPT는 과연 생각을 할까? 우리가 존재하게 된 과학적인 이유는? 미래는 이미 결정되어 있을까? … 세상의 온갖 것들이 궁금한 호기심 가득한 물리학자가 과학의 창으로 들여다본 경이로운 세상의 모습을 담은 책이다.

우리가 과학에 익숙해져야 하는 이유로 저자가 맨 처음 꼽는 것은 “과학이 재밌고 아름답기 때문”이란 점이다. 물론 과학은 실생활에 도움을 주고 기술 발전을 가져오는 유용한 학문이기도 하지만 그에 앞서 그 활동과 과정 자체가 재미있고 가치 있으니, 그에 주목하자는 것이다. 복잡하고 무질서해 보이는 세계에서 단순한 질서와 원리를 발견하는 것이 얼마나 흥미진진한지를 저자는 재미있는 사례를 통해 보여준다.

예를 들어 어린 시절 저자의 한 학급 학생 수는 60명쯤이었는데, 꼭 생일이 같은 친구들이 있었다. 어떻게 이런 우연이 있을까? 사실 이것은 통계학에서 ‘생일문제’라 불리는 것인데, 한 집단에서 생일이 같은 사람들이 한 쌍이라도 존재할 확률은, 1에서 구성원의 생일이 모두 다를 확률을 빼는 간단한 계산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계산해보면 60명으로 구성된 집단에서 생일이 같은 사람이 있을 확률은 99.4%나 된다. 놀라운 우연 같아 신기하기만 했던 것이 실은 필연에 가까운 일이었던 것이다.

책에서는 성(性)이 셋이 아니라 둘인 이유, 도마뱀이 지금과 같은 알록달록한 비늘무늬를 갖고 있는 이유, 오래된 단층에서는 상대적으로 큰 지진이 덜 일어나는 까닭 같은 자연현상의 원인을 찾아보기도 하고, 축구경기에서 수비수가 공격수를 마크하는 방식을 네트워크 과학으로 어떻게 분석하는지, 경제성장률이 왜 0으로 수렴할 수밖에 없는지를 설명하기도 한다. 인과관계와 상관관계, 중력/전자기력/마찰력 같은 물리적 힘, 신경세포의 작동, 되먹임, 대칭성 같은 중요한 과학 내용과 개념을 톺아보기도 하고, ‘나는 과연 한 개체인가?’, ‘짧은 시간을 어떻게 길게 살 수 있을까’ 같은, 모두가 관심 있어 할 만한 물음들을 살펴보기도 한다. ‘시간결정(time crystal)’, 과학에서의 ‘지형(landscape)’ 등 다른 과학교양서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내용들, 그리고 양자컴퓨터와 챗GPT를 비롯한 최신 이슈에 관한 핵심적인 설명과 전망도 담았다.

과학자들이 모두 거대한 연구 시설에서 우주의 심오한 비밀을 캐는 연구만 하는 것은 아니다. 책에는 소박하지만 과학 탐구의 즐거움을 보여주는 연구들도 여럿 소개된다. 가령 책의 차례 페이지에는 얼어붙은 바이칼 호수의 가느다란 얼음 기둥 위에 올라가 있는 돌멩이 사진이 들어 있다. 명상에 잠긴 선승의 모습과 유사하다 하여 ‘바이칼 젠’이라고 흔히 불리는 이런 모습은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 주위 얼음판보다 높게 솟아 있고, 돌 아래가 우묵하게 파인 이 같은 형태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두 과학자가 “실험과 수치 계산을 통해” 알아냈는데, 독자는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는 설명을 통해 이 현상을 만든 원인이 덮개돌의 복사광이란 점을 알게 된다. 덮개돌의 흑체복사가 이뤄낸 느린 승화가 이런 신기한 형태의 원인이었던 것이다.

우리가 과학에 익숙해져야 하는 두 번째 이유로 저자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온갖 사건들을 합리적으로 이해해 이성적으로 판단하려면 과학적인 사고방식이 꼭 필요”하다는 점을 꼽는다. 특히 6부에 실린 글에는 우리 사회가 더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사회가 되기를 바라는 저자의 간곡한 마음이 담겨 있다. 과학적 사고가 절실히 요구되는 시절, 무엇이 과학적인 태도인지를 두고 이견들이 부딪히는 때다. 기후변화, 인공지능의 발달과 같이 인류 전체에 엄청난 영향을 끼칠 사안들은 물론,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를 둘러싼 논란, 백신 위험론이며 항암효과가 있다고 광고하는 식품을 어떻게 볼 것인가까지, 크고 작은 많은 사안에서 우리에겐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태도가 필요하다.

저자는 과학의 확실성에 대한 지나친 믿음도 경계한다. “일반 사람들의 생각과 달리 과학은 100퍼센트 확실한 결과를 주는 것이 아니다. 단지 지금까지의 증거를 모아서 현재 내릴 수 있는 최선의 잠정적 결론을 내리고, 끊임없이 그 결론을 개선해가는 과정이다. 과학의 적은 목표에 대한 확신이다.” 회의와 비판적 태도야말로 과학이 지닌 중요한 가치이다. 이것은 최근 상온 상압 초전도체 발견 주장을 놓고 우리 사회에 있었던 떠들썩한 반응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과학은 도달한 장소의 이름이 아니다. 영원히 이어질 긴 여정에 붙은 이름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