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핍한 시대’의 지식인 - 조선인 미국 유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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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핍한 시대’의 지식인 - 조선인 미국 유학생
  • 김욱동 서강대 명예교수·영문학
  • 승인 2023.10.15 0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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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가 말하다_ 『《우라키》와 한국 근대문학』 (김욱동 지음, 소명출판, 342쪽, 2023.09)

 

내가 이 책을 집필하기 시작한 것은 『《학지광》과 한국의 근대문학』을 집필하고 난 바로 뒤다. 나는 이 원고에서 ‘재일본동경조선학생학우회’의 기관지에 실린 창작 문학 작품과 번역 작품을 자세히 분석함으로써 한국 근대문학에 끼친 영향을 다루었다. 나는 여세를 몰아 ‘북미조선학생총회’의 기관지 《우라키》에 실린 문예 작품을 집중적으로 분석하여 한국 근대문학이 발전하는 데 어떻게 이바지했는지 밝히고 싶었다. 그러니까 두 원고는 같은 주제를 다룬다는 점에서 마치 한 부모에서 태어난 자식과 같다. 다만 같은 피를 물려받은 자식이로되 전자는 현해탄 건너 쪽에서 조선인 일본 유학생들의 문학적 성과를 조명한 것이고, 후자는 태평양 건너 쪽에서 조선인 미국 유학생들의 문학적 성과를 조명한 것이 다를 뿐이다. 

일제 강점기 해외에서 유학한 식민지 조선의 젊은 지식인들에 관한 책을 쓰면서 나는 그동안 느낀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독일의 두 문호 요한 볼프강 폰 괴테와 프리드리히 실러의 그늘에 가려 좀처럼 빛을 보지 못하던 프리드리히 횔덜린은 「빵과 포도주」라는 작품에서 이렇게 노래한 적이 있다.


이 궁핍한 시대에 시인은 무엇을 위해 사는 것일까? 
하지만 시인들은 성스러운 한밤에 이 나라에서 저 나라로 
나아가는 바쿠스의 성스러운 사제와 같다고 그대는 말하네.


이 작품에서 ‘시인’이라는 말을 ‘지식인’으로 살짝 바꿔놓으면 일제 강점기 온갖 역경을 딛고 해외에서 유학하던 조선의 청년 지식인들을 두고 하는 말로 읽힌다. 

횔덜린의 시인처럼 조선인 유학생들은 일제 강점기 여러 가치박탈을 겪으며 청년기를 보내던, 그야말로 ‘궁핍한 시대’의 지식인들이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좀처럼 현실에 절망하지 않고 그 절망을 희망의 원동력으로 삼아 직접 또는 간접 문화 창달에 앞장섰고 더 나아가 조국 해방을 위하여 나름대로 매진하였다. 그들에게는 학업에 열중하여 신학문을 갈고 닦는 것이 곧 조국을 해방하는 길이었지만 그들은 문학 창작에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학문 못지않게 문학도 중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독립 운동가들이 만주나 시베리아 벌판에서 칼과 총으로 일본 제국주의에 맞섰다면 유학생들은 펜과 붓으로 일제에 맞섰다고 할 수 있다. 유학생들은 횔덜린의 ‘시인들’처럼 “성스러운 한밤에 이 나라에서 저 나라로 나아가는 바쿠스의 성스러운 사제”와 같은 역할을 수행했던 것이다.

나는 그토록 궁핍한 시대에 외국에서 수학한 젊은 유학생들이 일찍 철이 들었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조국을 빼앗기고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 지배를 받는 상황이라서 더더욱 그러했겠지만, 그들에게는 오늘날의 젊은이들한테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정신적 조숙함을 엿볼 수 있었다. 강인한 정신 상태, 드높은 학문적 의욕, 뛰어난 지적 호기심과 수준, 문학에 대한 열정 등에 절로 고개가 숙여지지 않을 수 없었다. 한마디로 그들은 나에게 ‘지적 거인’과 다름없었다. 

이 책에서 나는 한국인의 미국 유학사를 다루지 않는다. 다만 미국 유학사의 작은 일부, 그중에서도 특히 북미조선학생총회가 간행한 잡지 《우라키》에 실린 문학 작품을 심도 있게 분석함으로써 한국 근대문학에 끼친 영향에 초점을 맞춘다. 이 책을 집필하는 데 전공이 인문학인 만큼 나는 계량적인 사회과학적 접근 방법 대신 주로 문헌학적인 접근 방법에 의존하였다. 세계문학 담론과 관련하여 요즈음 ‘멀리 읽기’ 방식이 유행하지만 나는 여전히 신비평의 방법인 ‘가까이 읽기’, 즉 ‘자세히 읽기’ 또는 ‘꼼꼼히 읽기’ 방식으로 텍스트를 분석하고 해석하는 데 주력하였다. 

나는 이 책을 집필함으로써 그동안 어깨를 짓누르고 있던 무거운 짐 하나를 내려놓은 셈이다. 미국 유학을 마치고 나서부터 선배들의 눈부신 활약상을 다루고 싶다는 생각이 나의 뇌리에서 좀처럼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일 저 일에 치여 실행에 옮기지 못하다가 마침내 이 일에 착수하여 탈고하게 되었다. 이 책은 『소설가 서재필』(서강대학교 출판부, 2010), 『한국계 미국 이민자서전 작가』(소명출판, 2012), 『외국문학연구회와 《해외문학》』(소명출판, 2020), 『눈솔 정인섭 평전』(이숲, 2020), 『아메리카로 떠난 조선의 지식인들』(이숲, 2020), 『이양하: 그의 삶과 문학』(삼인출판, 2022), 『궁핍한 시대의 한국문학: 세계문학을 향한 열망』(연암서가, 2023), 『한국문학의 영문학 수용』(서강대학교출판부, 2023), 『설정식: 분노의 문학』(삼인출판, 2023) 같은 졸저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 나는 지금껏 한국문학과 서양문학의 경계에서 그 벽을 허물고 간격을 메우는 데 전념해 왔고, 앞으로도 이러한 작업을 계속해 나갈 것이다. 

 

김욱동 서강대 명예교수·영문학

미국 뉴욕주립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서강대 인문대학 명예교수로 재직 중이다. 환경문학, 번역학, 수사학, 문학비평 등 다양한 분야에서 꾸준히 연구해 온 인문학자다. 주요 저서로는 《한국문학의 영문학 수용: 1925~1954》, 《번역가의 길》, 《궁핍한 시대의 한국문학: 세계문학을 향한 열망》, 《비평의 변증법: 김환태·김동석·김기림의 문학비평》, 《이양하: 그의 삶과 문학》, 《환경인문학과 인류의 미래》, 《세계문학이란 무엇인가》, 《외국문학연구회와〈해외문학〉》, 《아메리카로 떠난 조선의 지식인들》, 《눈솔 정인섭 평전》, 《하퍼 리의 삶과 문학》, 《미국의 단편소설 작가들》 외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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