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여신보다는 사이보그가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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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신보다는 사이보그가 되겠다”
  • 이명아 기자
  • 승인 2023.10.09 0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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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장류, 사이보그 그리고 여자: 자연의 재발명 | 도나 J. 해러웨이 지음 | 황희선·임옥희 옮김 | arte(아르테) | 528쪽

 

「사이보그 선언문」을 포함해 저자 해러웨이가 1978년부터 1989년까지 쓴 글 열 편을 모은 이 책은 철학, 문학, 생물학, 동물사회학은 물론 포스트휴머니즘 연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사이보그 페미니즘과 과학기술학에서 가장 핵심적인 저작이다. 다양하고 이질적인 지식과 사유를 절묘하게 꿰어 내며 페미니즘과 과학기술 사이를 조망한다.

해러웨이는 1980년대에 성차별 사회를 극복하고 여성에게 주어진 성녀 혹은 창녀의 프레임이나 몸의 억압에 저항하는 상징이자 존재 양식으로 ‘사이보그’를 제안했다. 여성의 몸이 이질적이고 모순적인 잡종(hybrid)으로서 과학기술과 결합할 때 비로소 여성에게 가해지는 억압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개념은 이 책에서 본격적으로 다루어진다.

열 편의 글 전반에 걸쳐 해러웨이는 자연, 유기체, 사이보그에 대한 연구와 서사를 분석한다. 원숭이, 유인원의 사회생활과 행동에 대한 지식과 그 의미를 생산하는 양식을 둘러싼 페미니즘의 투쟁을 검토하고(1부), 영어권 세계에서 가장 강력하며 모호한 단어인 ‘자연’과 ‘경험’의 이야기를 결정하는 권력 간의 경합을 탐사한다(2부). 나아가 젠더에 관한 다양한 개념들, 페미니즘의 윤리적·인식론적 목적에 맞게끔 시각의 은유를 재전유하는 문제, 그리고 포스트모던 세계에서 ‘차이’의 주요 체계를 그리는 생명정치의 지도로서의 면역계에 관한 새로운 시각 등을 제시한다(3부). 이를 통해 해러웨이는 여느 설화뿐 아니라 이성의 첨단으로 일컬어지는 과학과 의학의 기저에도 사회문화적 가설이 깊이 침투해 있음을 지적하며, 인종·성·계급 차를 자연스레 받아들이게끔 한 ‘젠더화된’ 학문의 뿌리를 추적한다.

해러웨이는 인간과 동물 사이 영장류, 인간과 기계 사이 사이보그, 남성과 비-남성 사이 여성, 즉 경계에 있는 특이한 ‘괴물’ 같은 존재이자 고도로 논쟁적인 이들을 차례로 호명한다. 영장류의 사회생활과 행동 연구를 토대로 한 ‘젠더화된’ 과학을 지적하고, 나이지리아 작가 부치 에메체타(Buchi Emecheta)로 대표되는 마이너리티 여성의 서사를 분석하며 새로운 읽기를 제안하고, 해러웨이 자신의 표현처럼, “서양에서 버려진 페미니스트 카드 패”를 다시 살피며 “가능 세계를 재형상화”하는 데 집중하여 마침내 새로운 서사의 물꼬를 튼다.

특히 8장 「사이보그 선언문」은 인간과 기계의 잡종(hybrid)인 사이보그를 페미니즘적 시각으로 재해석한 과학철학과 페미니즘의 고전으로 손꼽히는 역작으로, 해러웨이 특유의 경계를 허무는 전복적 사유를 오롯이 엿볼 수 있다. 요컨대 해러웨이는 이 책에서 분야를 자유로이 넘나들며 수많은 젠더화의 징후를 포착하고, 나아가 새로이 명명하고 가능성을 제안함으로써 재기 넘치는 이야기꾼임을 스스로 증명한다.

자연은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구성된다. 과학적 연구 결과 또한 객관적 지식이 아닌 문화적 맥락에서 직조되는 상황적 지식이다. 그러므로 다른 언어를 이용해 새로운 의미를 짓고 나아가 서사를 부여하는 일련의 과정은 해방이라고도 바꾸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에서 해러웨이가 열어젖힌 새로운 가능성의 공간, 잡종이자 괴물의 세계는 이미 우리 앞에 당도했다. 스마트폰을 비롯하여 일상에 깊이 침투한 수많은 기계들, 나아가 AI의 등장과 격변하는 기후 등이 역동하는 세계에서 끊임없이 주어지는 질문들이 그러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새로운 가능성의 공간에서 어떻게 세상을 읽어야 할지 거듭 고민해야 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해방으로 한 걸음 더 다가서야 한다.

이 책은 잘못 읽든, 편파적으로 읽든, 강제로 읽든, 상상하며 읽든 간에 모든 ‘읽기’를 이끈다. 모든 것을 의심하는 태도를 제안하고, 혼란스러운 세계에서의 경합을 다시금 유도한다. 이 책에 담긴 철저하고도 도발적인 메시지는 오늘날에 유효하기 때문이다. 해러웨이의 표현처럼 우리는 ‘가능한 자기를 연구하는 인류학자’이자 ‘실현 가능한 미래를 상상하는 기술자’로서 해러웨이가 그린 계보를 잇는 바통을 넘겨받은 셈이다.

“구성적이고 인공적이며, 역사적으로 우연적인 영장류, 사이보그 그리고 여성의 본성을 음미하는 행위는 불가능하지만 너무나 강고한 현실에 처해 있는 우리를, 가능하지만 좀처럼 만날 수 없는 다른 곳(elsewhere)으로 이끌어 줄까? 우리 괴물들은 기존과 다른 의미화의 질서를 밝혀낼 수 있을까? 우리, 사이보그가 되어 지구에서 살아남아 보자!”  - 본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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