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흐마니노프, 그의 삶과 음악에 대한 생생하고 독창적인 초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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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흐마니노프, 그의 삶과 음악에 대한 생생하고 독창적인 초상화
  • 이현건 기자
  • 승인 2023.10.09 0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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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흐마니노프 | 리베카 미첼 지음 | 이석호 옮김 | 포노PHONO | 392쪽

 

작곡가 라흐마니노프의 이름이 낯선 사람도 그의 음악은 분명 어디에선가 들어보았을 것이다. 한번 들으면 잊을 수 없는 그 선율 덕분에 그의 작품들은 클래식 음악 가운데 유달리 대중음악과 영화에 자주 사용되어 널리 사랑받았다. 이 책은 세르게이 바실리예비치 라흐마니노프(Sergei Vasil’evich Rachmaninoff, 1873-1943)의 삶과 음악을 다룬 평전이다. 

러시아의 대표 작곡가이자 지휘자, 거장 연주자인 라흐마니노프는 오늘날 ‘전 세계의 피아니스트들이 뽑은 영향력 있는 전설적 피아니스트’이며(〈라임라이트Limelight〉, 2011년 10월), 그의 대표작 〈피아노 협주곡 2번〉은 역사상 가장 인기 있는 클래식 음악 가운데 하나로 자주 선정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생전뿐 아니라 사후에도 대중적 인기와 달리 작곡가와 음악학자들에게 오랫동안 외면당하곤 했다. 비평가들은 라흐마니노프와 그 음악을 스트라빈스키와 같은 혁신적인 동시대 작곡가들의 현대적 실험과 거리가 먼 구시대적 낭만주의 전통의 일부로 인식했다. 일례로 1952년 음악평론가 레오니트 사바네예프는 라흐마니노프에 대해 “전적으로 19세기 사람이었다. 어떠한 이유로든 그는 20세기를 인지하지 못하였으며, 그의 모든 작품은 말하자면 19세기 음악의 자투리이다”라고 격하했다.

권위 있는 《그로브 음악 및 음악가 사전》은 1954년판에서 ‘라흐마니노프’ 항목에 고작 다섯 단락을 할애하는 데 그쳤지만, 판을 거듭하며 계속 늘어나 2001년판에서는 무려 열한 페이지에 걸쳐 사진과 함께 상세히 설명한다. 그에 대한 평가는 계속 우상향되어 온 셈이다.

저자 미첼은 ‘우울함의 대명사’, ‘고향에 대한 향수에 젖어 있던 음악가’ 등 라흐마니노프에 대한 기존 이미지에 의문을 제기하고, 예술과 음악이 인간의 삶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에 관한 논쟁이 뜨거웠던 20세기 초 러시아의 ‘은銀 시대’라는 커다란 흐름에 투신한 그의 진면목을 발굴한다.

러시아와 미국 및 유럽에서 라흐마니노프와 그의 음악은 불확실한 세계와 조화를 이루는 대단히 현대적인 삶의 표현이었다. 이 새로운 평가를 위해 저자는 라흐마니노프의 삶을 그가 살았던 역동적인 당대 상황에서 재구성한다. 풍부한 연구 자료와 사진을 바탕으로 러시아의 빈한한 귀족 가문에서 보낸 어린 시절부터 칠순 생일을 며칠 앞두고 미국 베벌리힐스의 자택에서 영면하기까지, 그의 첫 작품 〈피아노 협주곡 1번〉부터 최후 작품인 45번 〈교향적 춤곡〉이 탄생하기까지 라흐마니노프의 일생을 생동감 있게 그려낸다. 

또한 라흐마니노프의 재능을 처음 알아봤을 뿐 아니라 〈피아노 협주곡 1번〉을 헌정 받은 사촌 알렉산드르 실로티, 라흐마니노프에게 자애로운 아버지이자 엄격한 스승 역할을 맡은 니콜라이 즈베레프, 피아니스트 롤 모델인 루빈시테인과 작곡가 우상인 차이콥스키, 첫 작품 〈피아노 협주곡 1번〉 초연 실패 후에 겪은 우울증을 치료해준 은인 니콜라이 달 박사, 라흐마니노프의 심적 안식처가 되어준 스칼론 자매들과 사틴 남매들 등 라흐마니노프의 주변 사람들의 기록과 인터뷰 등을 통해 그의 삶을 다각적으로 접근하여 입체적으로 묘사한다.

라흐마니노프는 당대 상류층 청년들이 흔히 택하던 진로인 공무원 대신 직업 음악가의 길을 택했지만 탐보프 지역의 가족 별장 ‘이바놉카’를 유지할 만큼 러시아에서 나름의 음악적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1917년 볼셰비키혁명으로 러시아를 떠나 망명객 신분이 되어 작곡에서 연주 및 지휘로 활동 방향을 넓힌다. 가족을 부양해야 했던 것이다. 당대 최일선 녹음 기술의 혜택을 입은 선두급 콘서트 피아니스트로서 입지를 굳혔고 경제적으로 크게 성공한다. 1925년 〈타임〉지에 따르면 그는 베이브 루스의 두 배가 넘는 소득세를 납부했다. 그는 스위스에 새로운 거처 ‘빌라 세나르’를 건축한다. 이 집은 옛 가족 별장과 마찬가지로 그에게 작곡의 새로운 에너지를 불러일으켰다. 피아노 독주곡 〈코넬리 주제에 의한 변주곡, 작품 42〉를 썼고, 이후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광시곡〉, 〈교향곡 3번〉 등 작품 활동을 활발히 이어간다. 그러나 유럽 대륙에 전운이 감돌면서 1939년 여름, 이곳에서도 떠나야 했다. 라흐마니노프는 은퇴 후의 생활까지 염두에 두고 1942년 미국 캘리포니아 베벌리힐스에 주택을 구입하지만, 이곳에서의 삶은 생애 마지막 몇 주뿐이었다.

라흐마니노프는 제정 러시아 말기의 역동적으로 급변하는 지적·문화적 환경 속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한 음악가였다. 스크랴빈, 프로코피예프, 스트라빈스키로 대표되는 작곡 기법상의 혁신을 거부하긴 했지만, 그는 음악이 여전히 인간 존재에 잠재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형이상학적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고 보는 현대 담론에 깊이 몰입했다. 따라서 저자는 라흐마니노프에 대한 평판 바로잡기에서 한발 더 나아가 그가 현대적 음악을 쓴 현대적 인물이었다고 주장한다. 현대성과 모더니즘을 구별하여, 라흐마니노프도 본인이 현대에 속함을 인지하고 그 속에서 자기의 창조적 자리를 찾으려 분투했다고 말한다. 이처럼 이 전기는 라흐마니노프의 삶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줄 뿐만 아니라 그의 경력에 대한 재평가와 재발견이라는 오랫동안 미뤄왔던 연구의 초석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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