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위문화로 살펴본 근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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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위문화로 살펴본 근현대사
  • 이현건 기자
  • 승인 2023.10.09 03:3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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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항의 축제 해방의 불꽃, 시위: 농민항쟁에서 촛불집회까지, 파리코뮌에서 68혁명까지 | 송찬섭·김양식·김정인·오제연·남영호 외 4명 지음 | 서해문집 | 352쪽

 

시위문화란 “시위대가 상징적 행위, 곧 깃발을 들고 구호를 외치거나 노래를 부르는 것, ‘적’의 상징을 불태우거나 부수는 것, 자신의 요구를 적은 신문과 팸플릿 등을 배포하는 것 등으로 집단적인 의사를 표현하고 실천하며 그 과정에서 시위의 ‘대의’를 경험해 나가는 것”이다. 그렇기는 해도 나라마다, 시기마다 시위문화는 달랐다. 

이 책은 바로 그 내용을 다룬다. 한국에서 일어난 1862년 농민항쟁, 1894년 동학농민전쟁, 1919년 3·1운동, 1960년 4월혁명, 2008년 촛불집회, 그리고 유럽에서 일어났던 1871년 파리코뮌, 1905년과 1917년의 러시아혁명, 1936년 스페인내전, 1968년 68혁명 등을 살핀다. 그러나 이 책은 ‘운동사 연구’ 또는 ‘혁명사 연구’라기보다는 ‘격정의 역사’에 대한 문화사적 접근을 시도한다.

시위는 집단적 참여, 행진, 연좌, 농성, 진입 등 모든 과정에서 거리를 기반으로 한다. 인파가 시위에 자유롭게 참여할 수 있지만 무리를 모으면서 시위 장소로 행진해 나아가기도 한다. 시위 장소에서는 토론, 연좌, 농성 등의 방식으로 행동이 이루어지며, 특정한 목표 장소를 향한 진입과 점거도 하게 된다. 파리코뮌의 바리케이드도 전쟁 수행만이 아니라 새로운 공간을 창출하는 길이었다. 1862년 농민항쟁 때 길을 차단하고 검문한 사례가 있듯이 시대·지역을 막론하고 길거리를 비롯한 장소를 장악하는 것이 시위대의 의지를 드러내는 기본 방법일 것이다.

이처럼 저항의 장소는 매우 중요하다. 어떤 사건이든지 ‘지리적 장소’에서 발생하기 때문이다. 장시는 우리나라에서 3·1운동까지도 중요한 시위 공간으로 활용되었다. 이후 근대 도시가 형성되고 발전하는 상황에서 도시는 통치자의 공간에서 시민과 학생 등이 일상을 영위하는 생활공간으로 변화해 나갔다. 거리는 개방되었기에 권력의 공격을 받을 위험도 있지만, 공개된 영역이었기에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다. 68혁명의 “정치는 거리에 있다”라는 구호는 매우 상징적이다. 이처럼 공간이 투쟁의 현장이 되었을 때, 그곳은 통치자가 엄격하게 관리하던 곳에서 대중이 함께 즐기며 민중의 저항문화가 샘솟는 축제의 현장으로 바뀌었다.

또한, 시위문화에서 집회는 큰 비중을 차지한다. 1862년에도 주막이나 사랑방 등 폐쇄적이거나 한정된 공간을 이용했다. 1871년 파리코뮌 때도 사상, 결사, 말의 자유를 얻을 수 있었던 클럽과 같은 모임을 활용했다. 3·1운동에서 집회는 대부분 곧바로 시위로 연결되었으니 시위를 위한 집회인 셈이다. 비슷한 생각을 지닌 사람과 사람이 직접 소통하고 함께함을 확인한다는 점에서 집회가 중요하다. 모임 자체가 축제이며 이런 축제를 경험함으로써 자발적 참여를 확대해 나갔다.

선언문, 격문, 신문, 잡지, 그리고 깃발이나 포스터에 적은 표어 등 글의 힘도 매우 컸다. 1862년 농민항쟁 때 지도부가 면·리마다 보낸 통문도 일종의 선언문 또는 격문이었다. 1894년 동학농민전쟁에서 국면마다 작성했던 격문 또는 포고문에 농민군의 주장과 방향이 담겨 있다. 3·1운동 때는 민족대표들이 작성한 독립선언문과 지역마다 각종 유인물, 격문 선언문, 신문, 전단 등이 있었다. 손으로 만들기도 했지만, 인쇄매체를 활용하면서 글의 종류와 규모는 더욱 확대되었다. 4월혁명 과정에서도 학생들의 선언문이 큰 역할을 했다.

글 못지않게 대중을 끌어들인 것은 깃발과 포스터였다. 깃발은 조직과 대오를 형성하기 위해서도 필요하지만, 멀리서도 눈에 띄고 강렬한 이미지를 담고 있어 더 많은 대중을 모으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동학농민전쟁 때 포접별 깃발이 대중을 모으는 역할을 했다면, ‘의’, ‘보국안민’ 등의 깃발은 농민군이 국가의 정치적 주체로까지 나아감을 표방했다. 3·1운동에서는 태극기가 시위에 활용돼 독립운동이라는 목표를 한껏 끌어올릴 수 있었다. 깃발 색깔만으로도 대의를 나타낼 수 있었다. 파리코뮌, 러시아혁명, 스페인내전 등에서 혁명군은 붉은 깃발을 많이 사용했다.

포스터는 한층 발전한 홍보 도구였다. 스페인내전처럼 두 진영이 펼치는 치열한 선전전에서는 온갖 매체가 동원됐다. 그 가운데서도 포스터가 압권이었다. 포스터는 글자를 모르는 대중에게도 쉽게 다가갈 수 있을 뿐 아니라, 복사와 변형이 가능하며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유포할 수 있었다. 포스터에는 정부나 정당의 강령, 모병, 위생, 문화와 교육, 영웅과 희생자, 적에 대한 비난 등 모든 주제가 담겼다.

구호는 현장에서 시위대가 힘을 모으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862년 농민항쟁에서도 짧지만, 가장 시급한 요구를 담은 구호를 외쳤다. 3·1운동에서는 만세운동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시위문화가 창조되었다. 통치자를 위한 ‘축수祝壽’로 쓰였던 ‘만세’가 국가를 위한 축수가 되어 ‘대한 독립 만세’가 가장 중요한 구호가 되었다. 4월혁명 때 이미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구호가 나왔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이 구호가 2008년 촛불시위 때 갑자기 등장한 것이 아니었다. 러시아혁명에서는 “차르 타도”, “전쟁 반대”, “부르주아지에게 죽음을!”, “부르주아 착취자 타도!”를 내세웠다. 

시위 현장의 노래는 사기를 드높이고 단결하게 하는 힘이 있다. 전근대사회에서 풍물패 등은 흥을 돋우려고 노래를 이끌거나 사회 문제나 요구조건을 간결하게 담아 운율을 넣어 외쳤을 것이다. 1862년 농민항쟁에서도 짧지만 강렬한 노래를 불렀다. 동학농민전쟁에는 노래와 함께 놀이와 춤도 중요하게 활용됐다. 3·1운동 때 시위대는 〈조국가〉, 〈광복가〉, 〈애국가〉를 불렀다. 시위에서 불렀던 노래가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노래는 시위를 그야말로 축제처럼 만드는 데도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한 시기의 시위문화는 다음 시기로 계승되고 발전한다. 1894년 농민들에게는 1862년과 그 뒤 산발적으로 일어나던 농민봉기의 경험이 새겨졌을 것이다. 이는 1919년, 나아가 해방을 거쳐 1960년대까지도 맥을 이어 갔다. 농민 가운데서도 1894년에 총을 들고 세상을 바꾸려 했던 경험은 쉽게 잊히기 어려웠을 것이다. 전 민중이 참여했던 3·1운동은 시위문화에서 하나의 전환점을 이루었을 뿐만 아니라 민족해방운동을 발전시키는 엄청난 자양분을 제공했다. 서구에서도 1871년 파리코뮌, 1905년과 1917년의 러시아혁명, 1936년 스페인내전, 1968년 68혁명을 비롯한 여러 사건은 민중의 엄청난 에너지를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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