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시각’을 찾아서: 사유의 여행 ➀
상태바
‘동아시아시각’을 찾아서: 사유의 여행 ➀
  • 고성빈 논설위원/제주대학교·정치학
  • 승인 2023.10.04 14:2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고성빈 교수의 〈동아시아 담론〉

 

 

‘육체-마음의 습관’ 고치기

요가를 하면서 특히 ‘머리 서기’ 자세에서 항상 느끼는 게 있다. 내 몸의 습관을 전복하여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나를 끊임없이 가스라이팅하는 세상이 모두 저 아래로 가라앉는다. 

우리는 ‘보이는 마음인 육체’와 ‘안 보이는 육체인 마음’의 습관을 지니고 살고 있다. 육체가 부르는 담배를 끊기 힘든 것처럼, 마음에도 버리기 힘든 습관이 있다. 특히 그 마음이 내 인생에 있어서 자존감과 경제생활의 근거라면 더욱 바꾸기 힘들다. 

이 글은 나와 동아인이 이제까지 ‘왜곡된 역사관과 상호 서열의식’에 의해 형성된 ‘육체-마음의 습관’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동아시아의 문제와 담론을 바라보는 ‘비판의 준거’로서의’ ‘동아시아시각’은 한중일 3국의 ‘잘못된 역사관’으로 오염된 ‘육체-마음의 습관’을 해체하는 데서 출발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아시아역사관 바로잡기에서 출발하여 동아시아시각, 세계시민의식, 우주시민의식으로 나(우리)의 시야를 확장해나가야 한다고 주창하고 싶다. 

구체적으로, 공정한 ‘동아시아시각’을 방해하는 것은 중국의 ‘역사공정’과 일본의 ‘식민사학’, 그리고 한국의 ‘반도사관’을 들 수 있다. 이른바, 중국과 일본의 작위적인 대국 지향의 역사관에 대해 한국의 “반도사관”은 스스로 “소국주의와 지정학적 운명론”을 내면화하고 있다. 그 결과 생성된 한국의 “타율이성”은 사상사의 특성을 구성하고 있다. 

동아시아 3국의 역사관과 우열관계성 의식이 올바른 방향으로 전환하여 그 기초위에 성립한 ‘동아시아시각’이라야 ‘동아시아담론’과 ‘동아시아사상사’ 연구에 적절한 ‘비판의 준거’로 활용할 수 있다. 그렇다면, 머리 서기를 안 해도 동아시아와 이 세상이 바로 보일 것이다. 

 

 

비판의 준거로서의 동아시아시각의 함의

그동안 동아시아의 문제와 담론을 연구하고 토론하면서 국가주의(국적 구속성)를 초탈한 ‘동아시아시각’에서 세계와 동아시아의 문제들을 성찰과 비판의 방법으로 바라보아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그러면 ‘비판의 준거’로서의 ‘동아시아시각’의 함의는 무엇인가. 이에 대한 사유의 여행을 떠나보자. 

이른바, 내가 활용하는 ‘동아시아시각’의 함의에는 5개의 항목이 하나로 연동하여 ‘비판의 준거’를 구성한다. 1) 탈국적주의(국가주의의 상대화), 2) 탈서구중심주의(오리엔탈리즘의 해체), 3) 문화적 우열의식 해체, 4) 동서이원론의 상대화와 세계시민의식 배양, 5) 동서양 상호학습효과에 의한 혼성근대화론이다. 그런데, 누가 보더라도 이상적으로는 바람직한 지향들이지만 공리주의가 복잡하게 엮인 현실과의 편차를 상기하면 그리 쉽게 현실화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아쉽게도, 전 인류가 ‘머리 서기’를 하면서 ‘육체-마음의 습관’을 고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독립적으로 보이는 이 5항목을 연동하여 동아시아의 ‘사상(思와 想)-사물(事와 物)’의 흐름에 대한 하나의 ‘비판의 준거’로 구성하기 위한 공통분모를 찾아보자. 사색의 끝자락에서 이들을 하나의 지향으로 종합하면, 동서양과 동아시아 구성원들이 ‘상호수평의식’을 가져야 한다는 것으로 수렴한다. 즉, 인류사회의 모든 구성단위(개인과 국가, 민족과 문명)는 각자의 고유성을 가지고 있고, 그 고유성은 우열관계가 없으며 자기만의 존재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상기 단위 중에 어느 하나가 우월하고 열등하다는 논리는 역사상 특정 시기 특정 상황에서 나타나는 상대적이고 일시적인 현상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한 역사적 사례는 많다. 

유교사상은 자연경제의 시대에는 효과적이었으나 국제무역의 시대(폭력성을 논외로 하고)에는 무력함을 노출하였고, 서양 계몽주의가 낳은 근대적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사조가 점차 우세를 점했다. 그러나 21세기에 미국과 서구의 문화와 경제는 쇠하고 있고, 동아시아가 부상하면서 (동)아시아적이고 유교적인 가치와 자본주의 발전에 관련한 논쟁이 부상하였다. 동아시아 내부에서도 고전시대 중국은 고전문화를 가르쳐 주는 선생이었으나, 탈고전시대인 근래에는 현대문화의 후진상태에 처해있다. 동아시아의 대표적 유교국가인 중국, 한국, 일본도 고전시대와 현대를 가로지르며 문화의 상호 우열관계성과 정치제도적인 선후진의 관계성은 유동적이다. 또한 거시적으로 동서양의 문화적 상호관계성에 대해서는 “동서양 상호학습효과에 의한 혼성근대화론”(필자)이 적실하다. 이른바, 인류역사상 구성단위 간의 ‘우열관계성’이라는 것은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오직 변한다는 사실 하나뿐”이라는 변증법의 명제를 따라 항상 유동적이다. 

이러한 논리적 배경을 가지고 조금 더 구체적으로 ‘비판의 준거로서의 동아시아시각’의 함의를 분명히 하기 위해서 나는 몇 가지 이론적 선결과제를 제시할 것이다. 

그중에 이 글이 우선 제시하는 것은 동아시아 역사관의 주름을 펼치는 것이다. 동아시아는 현재 작위적인 역사관의 홍수에 처해있다. 중국의 제국몽과 역사공정, 일본의 근대화 우등생의식과 식민사관이다. 한국은 유감스럽게도 숭미-반공 정치세력과 강단사학계가 일제 식민사관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어서 제대로 대응을 못(안)하고 있다. 그리고 고조선-고구려 멸망 이후 내재화된 “반도사관”으로 “소국의식과 지정학적 운명론”에 사로잡혀 있다. 이로써 형성된 “타율이성”은 오늘날까지 한국의 정신세계를 지배하고 있다. 

 

 

중국과 일본의 자국 중심의 작위적 역사론
 
중국은 경제의 부상과 함께, 동시에 역사공정을 전개하면서 ‘중국몽’의 실현을 21세기에 투사하는 이론적 전제인 ‘중화대일통주의 역사관구축’을 적극적으로 전개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개혁시대에 등장한 페이샤오퉁(費孝通, 1910-2005)의 “중화민족다원일체구조(中華民族多元一體格局)론”과 왕후이(汪暉)의 “과체계사회(誇體系社會)론”은 이러한 시대성을 잘 나타내고 있다. 양인은 중국의 정통으로 삼을만한 역사론을 제안하였는데, 전자는 역사상 한족-소수민족의 통합의 실체성을, 후자는 끝없이 상호 횡단과 혼성화를 전개하는 유연성을 특징으로 한다.

오늘날 중국에서 진행하는 역사공정은 상기 역사론과 호응관계를 맺고 있다. 이른바, 과거의 한족과 주변 민족의 역사, 문화, 영토경계가 모두 오늘날 중국의 영토경계에 통합한다는 것이다. 즉, 이러한 ‘중화대일통주의 역사관’은 곧 ‘제국몽’의 21세기 버전인 ‘중국몽’의 근간이 되고 있다. 그러다 보니, ‘동아시아시각’에서 ‘동아의 일원인 중국’이라는 인식과 ‘자기 비판적 역사인식’이 부족하다. 전 지구적 시야에서 중국을 동아시아에 위치하여 중국중심주의를 극복하여 분석을 시도한다면 한중일 상호관계성과 나아가 동서양 상호관계성을 증진하는 데 더 도움이 되었을 것이지만 중국몽과 그 이론적 전제인 역사관은 대국주의적인 역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특이한 점은 오늘날 상기 중국의 주류역사관이 표방하는 변경과 동아시아 역사관은 중국이 거부하는 서구중심주의적인 오리엔탈리즘이 역으로 동아시아에 반영된 논리이다. 서구 오리엔탈리즘이 각색하여 ‘서구가 보고 싶은 중국’을 만들었듯이, 중국도 같은 방법론을 차용하여 ‘중국이 보고 싶은 동아시아’를 ‘아-오리엔탈리즘’으로 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의 팽창적 국가주의와 호응관계인 식민주의 역사관의 특성은 다음 몇 가지이다. 첫째, 고전시대 중화체제와의 관련성을 되도록 부인하고 일본 역사와 문화의 상대적 고유성을 강조하려는 경향이다(쓰다 소키치, 나이토 고난, 니시지마 사다오). 중화체제에서 독립적인 일본 중심의 역사가 동아시아에 존재했고 그 근거를 한반도에 대한 우위를 확인하는 흔적을 찾는 노력에 집중하고 있다. 고고학적 증거를 조작했던 사례가 종종 드러난 경우가 이 때문이다. 

가장 작위적인 것은 쓰에마츠 야스카즈(1904-1992)가 4세기 이래 왜국이 한반도 가야 지역에 식민지 ‘임나일본부’(末松保和, 《任那興亡史》)를 경영하고 있었다는 것을 역사적 정설로 구성하려고 한 것이다. 이 논리는 근대에 일본제국의 식민지배를 정당화하려는 시도와 연동된다. 쓰다는 임나일본부설을 언급하지 않고 또한 식민사관을 정당화하는 데도 유리한 내용이 없는 《삼국사기》에 대한 ‘불신론’을 공공연히 주장하였다. 다카하시 도루는 조선의 역사와 정치가 사대부들의 사색 당쟁으로 점철되었다는 하나의 단순한 특성만을 강조하면서 우월한 일제가 후진국 조선을 지배하여 발전시킬 것이라는 열등감을 확산하려 하였다. 

일본 식민주의 사학은 1932년 괴뢰국인 만주국을 세우면서 만주사는 한족 중국과는 다른 독자적인 역사와 민족 구성을 가졌던 것으로 재해석한다. 물론 이것은 만주 지역을 중국과 분리하여 일본제국에 편입시키고, 영속적인 괴뢰국으로 만들기 위한 정당성을 구축하기 위한 작위적 역사론이었다. 모순적으로 중국의 발해사론과 다르게, 당시 일본제국은 고대 일본과 발해와의 연관성을 근대 일본과 만주국의 연관성으로 연결하여 침략을 정당화하는 역사관을 수립하려 시도하였다(淺海正三, 〈滿洲國の復元と日本との關係〉; 稻葉岩吉, 《滿洲國史通論》). 발해와 만주국을 중국 역사로부터 분리하려는 시도이다. 물론 한국의 초기 “실증적 민족주의 역사론자”(유득공, 박은식, 신채호, 필자가 제시한 개념)들도 발해를 중국과 분리하는 시도를 하지만 일본의 만주사론과는 동기적 측면에서 다르다. 

일본의 발해사 연구내용이 만주 침략 이전과 이후가 달라진다는 사실은 일본의 역사관과 식민사관이 작위적이라는 사실을 입증한다. 만주 침략 이전에는 발해 문화의 고유성에는 관심이 없었고, 단지 당조와 고구려에 종속된 후진적인 식민지에 불과하다는 관념으로 이해하였다(西川宏, 〈渤海考古學と成果の民族問題〉). 그러나 1920-30년대에는 ‘만주와 몽고는 역사상 지나(支那)의 영토가 아니다’라는 논쟁을 제기하였다. 만주와 발해사 이외에도 일제 식민사관은 한반도에 대해 “일선동조론”(星野桓, 喜田貞吉), 대만을 식민화한 이후에는 유구와 대만을 영구적으로 합병하기 위해 “유구=대만설”(白鳥庫吉), “일류동조론”(伊波普猷) 등을 제기하였다. 

러일전쟁 이후 나온 ‘봉건제론’에서는 후진인 한국, 중국보다 서구와 가까운 봉건제의 특성을 중세에 가지고 있었다고 하였다. 이것은 ‘탈아입구론’과 유사하게 후진인 한-중보다는 선진 서구와 일본은 가깝다는 ‘일본의 근대화 우등생론’으로 읽히고 있다(미야지마 히로시, 《일본의 역사관을 비판한다》). 그러나 이것은 대단히 비논리적인 역사관이다. 서양 중세의 봉건제는 서양사에서 근대의 국왕 중심의 국가주의성립 이전에 있었던 후진적 단계였다. 계몽주의 사상이 도래하면서 유럽은 봉건제를 탈피하여 근대적 민족국가로의 발전을 본격화한다. 중국과 한국이 “유교화-정치발전”으로 봉건제가 아닌 군현제가 역사상 우세했던 것은 오히려 일본에 앞선 제도적 선진성을 나타내는 증거이다. 이러한 유교화-정치발전의 역사적 명암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자세히 논한다. 

어쨌든, 일본 식민사학의 우월의식은 역사상 특정 시기 특정 상황에서 나타난 일시적인 현상을 작위적으로 독해한 것이다. 일본의 이러한 순수한 학문적 논리가 아닌 작위적 식민사관은 사상사론에서도 식민지근대화론을 수긍하는 논리-정서 구조를 일반화하였다. 오구라 기조의 《조선사상사》에서는 이런 경향이 잘 나타나 있다. 같은 맥락에서 침략사를 사회적 진화론의 결과로 긍정적으로 보거나 혹은 서세동점의 침략을 맞은 동아시아를 일본이 구원한다는 논리도 개발하였다. 일본은 서구 제국주의를 모방하여 동아시아를 파괴했던 역사를 망각하고, 오히려 그것을 우월성의 증거로 삼고 자부하는 확증편향의식에 빠져있다. 

일본에서는 천황숭배 사상과 보수우익 세력의 연합지배가 강고하여 이들이 추구하는 역사관이 주류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특히 식민주의적 역사관과 사회의 보수우익 정서는 침략과 전쟁 범죄에 대한 독일 수준의 반성과 자기비판을 거부하는 사상적 배경으로 작용하고 있다.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지식인-시민의 목소리가 허약하다. 따라서 일본의 사례가 주는 교훈은 진보적 지식인-시민의 활동이 가장 역동적인 한국의 학계-시민사회가 앞장서서 동아시아 역사에 관한 ‘생각의 습관’을 바꾸는 데 노력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한국의 반도사관에 대한 “실증적 민족주의사학”의 비판론

중국과 일본의 작위적 역사관을 마주한 한국은 그리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안)하고 있다. 장기적이고 단기적인 원인은 다음 몇 가지다. 

첫째는 가장 근본적인 사상사적 원인으로서 고조선, 부여, 고구려 멸망 이후 점차 “유교화-정치발전”을 전개하면서 그 영향으로 역사-문화의 ‘논리-정서구조’에 “소국의식, 지정학적 운명론”을 내면화하면서 중화주의 역사관에 스스로 하부 존재임을 자처하는 “반도사관”이 생성되었다. 이러한 복수의 개념들이 서로 원인이자 결과로 연동하여 한국인은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려는 자율이성(autonomy reason)이 아닌 “타율이성”(dependency reason)이 정신세계에 내면화하게 되었다.
 
둘째, 구체적으로 고전시대 한반도 왕조의 반도사관은 ‘축소 지향’의 ‘소국의식’을 내면화하고 있다. 가장 큰 동기는 부침하는 왕조들이 점차로 유교화-정치발전을 추진하면서 일어난 사회와 국가적 정체성의 변화에 기인한다. 즉, 유교문화(공맹유교와 주자학)를 자신의 정체성의 ‘체’로 삼고 국가(정치체제)적 정체성을 ‘용’으로 삼아 전자에 후자를 자발적으로 종속시킴으로써 한족과 한반도 민족 이외의 주변 민족을 유교문화가 모자란 야만으로 배척하였다. 

따라서 철저히 ‘유교문화-중화체제’를 향한 맹목적 존숭을 정체성의 근본으로 삼아 요동과 동북지방에 산재한 한민족과 같은 뿌리인 동이족(예맥족, 한반도와 만주, 연해주에 거주하던 민족)의 다른 민족들을 야만으로 배척하여 그들의 다양한 역사와 문화를 통합하지 못한 “자기 상실의 역사”(반도사관)를 구성하고 말았다. 동이족을 자신의 역사, 문화, 정치적 관계성에서 철저히 단절하고, 그 영토적 연관성마저 인위적으로 분리하면서 “대륙지향의 진취적 사관”보다 “압록강과 두만강 이남의 단일 한민족 중심의 반도사관”을 내면화하였다. 

셋째, 장기역사적으로 관찰하면 서세동점의 시대 식민화는 외부적으로는 제국주의 때문이고, 내부적으로는 타율이성을 극복하지 못한 결과이다. 오늘날 미세동점의 시대에도 반도사관과 타율이성의 논리-정서구조는 지속되고 있다. 여전히 우리 내부의 타율이성은 미세동점의 분단체제를 지속시키는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미세동점의 분단체제로 인해 남한은 숭미-친일 수구세력의 보수성이 진보적인 사상과 역사관의 전개를 방해하고 있다. 해방 후 친일부역 세력을 척결하는 데 실패하여 일제의 교육을 받은 인사들이 학계를 장악하고 숭미-친일 정치세력의 비호를 받는 환경에서 식민사관은 한국인의 주체성과 대륙지향의 역사관을 손상하고 있다. 

반면에 북한은 정치체제의 역사적 정통성 경쟁에서 남한에 우위를 점하기 위해 이론적으로는 반도사관을 극복하는 데 성공적이지만, 세습체제 유지를 위해서 중국과의 협조를 추구하고 있다. 중국의 역사공정에 대응하는 논쟁에서 이룬 이론적인 성취를 현실적 해법으로 과감하게 끌고 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넷째, 상기 조건에서 유감스럽게도 남북한은 분단 이후 각자의 세계인식론, 역사-문화관의 논리-정서구조가 다르게 발전하고 있다. 예를 들어, 남한은 지독한 숭미와 서구지향의 논리-정서구조를, 북한은 혐미와 반서구의 논리-정서구조를 지향하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대륙으로부터는 역사공정, 해양으로부터는 일제 식민사관과 식민지근대화론이 도발하면서 그야말로 ‘역사침략의 사면초가’를 당하는 중이다. 

그러나 대체로 역사 논쟁에 있어서 가난한 북한은 자주적인 특성을 보이고 있고 정작 풍요한 한국에서는 중국의 역사공정과 심지어 일본의 식민사관을 묵인 내지는 허용하는 강단학파가 지금도 도처에서 활동하고 있다. 이들은 실증을 근거로 적극적인 논쟁을 회피하고 있는데, 정작 민족주의 사학계에서 제공하는 실증적인 자료를 무시하고 “실증 없는 실증주의 역사학”(이덕일)을 주장하는 경향에 빠지고 있다. 중국과 일본의 국가주의적인 역사관에 대해 한국의 강단 역사학계야말로 실증을 근거로 자기주장을 철저히 하여 균형을 잡아야 하는 형편인데도 중-일 학계와의 역사논쟁에 그다지 적극적인 자기표현(중고교 역사교과서 개편 등의 노력)을 하지 않고 있다. 한국 사회와 지식계가 ‘육체-마음의 습관’을 고치기가 이렇게 힘든 것인가. 

우선, 동아시아의 역사관에 대해 기존의 ‘생각의 습관’을 바로 잡아야 하는 왜곡은 중국과 일본 역사학계와 가장 편차가 큰 선사시대와 고대사의 몇 주제들이다. 이덕일의 연구(《한국통사》, 《동아시아 고대사의 쟁점》)는 이 주제에 대해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물론 비슷한 맥락의 역사론을 주창하는 여러 학자가 있지만 여기서는 그를 대표로 하여 언급한다. 

이른바, 나의 정의에 따르면, 이덕일 등에 의한 “실증적 민족주의사학”은 한·중·일에서 논란을 일으키는 고대사의 쟁점을 실증적 자료에 근거하여 분명히 진위를 밝히고 있다. 주목할 것은 중국의 동북공정과 일제 식민사관, 한국의 일제 식민사학자와 강단사학계가 추종하는 대부분의 논리를 실증적으로 반박하여 그 논리의 작위성을 논박하고 있다. 동아시아 역사의 편향적 해석을 바로잡는 것은 동아시아의 근대화 서열론과 정치적 지배관계론을 넘어 문화적 측면에서 대등하게 보는 데 큰 공헌을 하고 있다. 따라서 동아시아 역사관에 관한 ‘생각의 습관 고치기’에 논리적 근거를 제공하며 ‘균형 잡힌 비판의 준거로서의 ‘동아시아시각’을 갖추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론과 더불어 꼭 강조하고 싶은 게 있다. 이른바, 한국의 민간사학계와 실증적 민족주의사학이 반도사관에 중독된 “육체-마음의 습관 고치기”에 대해 부정적 의미의 민족주의 혹은 국가주의적 역사관이라는 비판이 제기되는 것에 대해서이다. 이러한 오해와는 다르게, 실증적 민족주의사학의 주요 목적은 고전시대와 현재 동아시아 3국 간의 ‘정치적 지배-피지배의 관계성 논리’를 들추어내어 정치적 힘겨루기를 하려는 게 아니라, 중국과 일본이 작위적으로 기획한 역사관을 실증적 문헌으로 검증하고 편향적 해석을 바로 잡으려고 하는 것이다. 이를 통하여 오늘날 역사공정과 식민사관의 이기적인 대국지향의 역사관, 동시에 한국의 반도사관에서 발원한 “타율이성의 사상사”를 극복하여 3국의 사상사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준거로서의 ‘동아시아시각’을 창출하려는 것이다. 

“실증적 민족주의사학”에서 ‘민족주의’의 함의는 탈식민주의, 탈서구중심주의를 향한 개인과 민족(국가)적 주체의식 각성, 동아시아 수평의식의 건설을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팽창적 민족(국가)주의나 제국주의 담론과는 근본적으로 속성이 다르다. 나 자신과 민족과 국가의 주체성을 자각하려는 시도를 호전적인 팽창적 민족(국가)주의로 해석할 수는 없다. 

- 다음 호에 이어집니다. -

 

고성빈 논설위원/제주대학교·정치학

런던대학(SOAS)에서 정치학 박사를 취득했으며, 제주대학교 정치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동아시아 사상과 역사논쟁에 흥미를 가지고 현재 동아시아의 사상사적 문제에 관해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한국 근현대사 역사의 현장』(공저), 『동아시아 담론의 논리와 지향: 비판이론의 탐색』이 있으며, 그 외 동아시아담론, 중국, 일본, 티베트에 관한 다수의 논문이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