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을 남기지 못한 여자들, 기록이 된 여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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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을 남기지 못한 여자들, 기록이 된 여자들
  • 이명아 기자
  • 승인 2023.10.03 0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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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성의 역사: 침묵하던 여자들의 개인사는 어떻게 여성사가 되었나 | 미셸 페로 지음 | 배영란 옮김 | 글항아리 | 296쪽

 

여성들에게도 역사가 있는가? 어떤 이는 새삼스러운 질문이라며 당연히 ‘그렇다’고 답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성의 이야기가 언제나 역사로서 존재했던 것은 아니며, 여성의 역사가 시작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여성에 ‘대한 담론’은 과할 정도로 많았지만, 여성‘의 역사’는 자발적인 침묵과 타의적인 (주로 남성에 의한) 은폐로 인해 흐릿한 그늘에 가려 있었다. 

저자는 옛 행정 및 재판 기록, 여성들의 사적 기록과 공적 출판물 등 수많은 자료를 찾아내 여성의 존재를 비로소 볕으로 끌어낸다. 여성에 관한 이야기가 아닌 여성‘의’ 이야기, 그 생생한 목소리를 침묵의 저편으로부터 구해낸 것이다. 이 책은 문인, 음악가, 배우, 연구자, 기자, 여성운동가 등 각자의 삶에서 조금이라도 선명한 족적을 남기려 발버둥 쳤던 여자들의 이야기를 모아 만든 모자이크다. 여자들의 개인사는 역사가 되지 못하는 이야기 조각일 뿐이지만, 저자는 그 조각들을 가지고 ‘여성사’라는 더 큰 무대를 그려낸다.

여자들이 역사의 주체가 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여성들은 공적 영역에서 눈에 띄는 경우가 별로 없었다. 역사학자들은 주로 인물의 대외적 활약상에 관심을 두었는데, 여성들은 집 안에서 가사활동에 전념했던 탓에 세간의 주목을 받을 일이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여자들은 스스로 흔적을 지워버리기도 했다. 자신과 관련된 모든 흔적이 하찮다고 여긴 탓이다. 여자가 역사에 이름을 남기려면 아주 독실한 성녀가 되거나 떠들썩한 파문을 일으킴으로써 기록의 대상이 되어야만 했다.

18~19세기에 이르러 여성 작가의 등장으로 여성의 전기나 일대기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60년대 들어 비로소 영국과 미국에서 ‘여성사’라는 학문 분야가 태동했다. 사학자 폴 벤과 조르주 뒤비는 폼페이 벽화의 그림을 통해 당시 여성들의 모습과 욕구를 추정했다. 화가 콜레트 드블레는 미켈란젤로 등 여러 유명 화가의 작품들을 바탕으로 여성들에 대한 시선을 연구했다. 그런가 하면 사학자 아를레트 파르주는 파리의 고문서를 뒤져 옛 파리에 살던 여성 시민의 삶을 복원해냈다. 대혁명 시기 여성들의 폭동을 연구한 장 니콜라, 그리고 1870~1930년 여성들의 사생활과 부부관계를 분석한 안마리 손도 있다. 또한 아니크 틸리에는 19세기 여성들의 주요 범죄 사례를 통해 그 열악했던 생존 환경을 드러냈다.

역사학자들 사이에서 최근 들어 ‘몸’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기 시작했다. 몸에는 역사가 함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특히 여성의 몸을 살펴보면 성별에 대한 관념이 역사의 흐름 속에서 어떻게 변화해왔는지를 알 수 있다. 가장 두드러지는 예 중 하나는 머리카락이다. 여성의 머리카락은 신체 중 성적 매력이 집약된 부위로 여겨졌다. 회화에서 마리아 막달레나는 항상 풍성한 머릿결을 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르네상스 화가들은 여성의 음울하고 관능적인 모습을 구불거리는 머리카락을 통해 표현했다. 보들레르 또한 머리카락을 ‘사방으로 넘실대는 바다’에 비유하며 관능미와 황홀감을 읊조렸다. 키르케고르는 머리카락의 매혹적인 위력에서 두려움과 증오심을 느끼기까지 했다. 머리카락은 이렇게 유혹과 매력의 도구이면서 원죄의 상징이기도 했다.

여성의 성욕에 대한 시각도 비슷했다. 성욕이 과한 여성은 위험한 존재로 여겨졌다. 그래서 성관계를 할 때도 남성상위 이외의 체위는 마녀의 체위로 취급받았다. 여성의 신체는 남성을 위한 것으로 그 의미가 제한되었기에, 결혼 첫날밤은 남편이 아내를 소유하는 의식이었다. 기독교적인 영향으로 여성은 ‘처녀성’과 정조 관념을 절대적으로 지켜야만 했다. 그러나 16세기 여성 시인 페르네트 뒤 기예의 관능적인 작품 등, 은폐된 여성의 성생활을 드러내는 자료들은 분명 남아 있다. 1900년 무렵에는 금기시되어왔던 여성의 동성애까지 수면 위로 떠올라, 파리에서 내털리 클리퍼드 바니, 르네 비비앵, 콜레트 등 여러 여성 문인이 성 정체성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연애를 하기도 했다.

창작은 오로지 남성의 전유물이라는 사고는 오랫동안 정설로 받아들여졌다. 그리스인들은 여자들에게는 조물주의 숨결인 ‘프뉴마pnuema’가 없다고 생각했고, 19세기 말까지도 생리학자들은 여성의 뇌가 남자보다 작고 가벼우며 밀도도 낮다면서 성차의 물리적 근거를 내세웠다. 하지만 여성은 분명 문학, 연극, 회화, 음악 등 예술의 여러 분야에서 활동해왔다. 조르주 상드가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수도원에서 ‘미친 듯이 글을 쓰고 싶었던’ 상드는 ‘곡괭이질’을 하듯 수많은 작품을 집필했다. 그러나 (남성) 평론가들은 상드가 ‘젖소에서 우유를 짜내듯’ 작품을 써낸다고 비판했고, 심지어 남자들이 대필을 해주었을 거라는 망발까지 일삼았다. 이는 여성이 문인으로 활동하기가 얼마나 어려웠는지를 보여주지만, 그 와중에도 19세기와 20세기에 제인 오스틴, 브론테 자매,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 프랑수아 사강 등 수많은 여성 문인이 여성 문학을 꽃피웠다.

여성들은 예술 외에도 다양한 분야에서 점차 집 밖으로 나섰다. 특히 양차 대전을 거치며 전장으로 나간 남성들을 대신해 여성들이 일자리를 채우기 시작했다. 또한 교육 수준이 높아지면서 사무직, 의료계, 학계에 여성들이 진출했다. 1930년대 소르본대학에서 ‘여자는 목소리가 작아 대규모 강의에 적합하지 않다’는 이유로 여성 학자 준비에브 비앙키를 교수로 임용하지 않은 것을 보면 분명 쉬운 과정은 아니었다. 교육 수준이 높아지자 여성들의 정치 참여도 활발해졌다. 프랑스대혁명을 전후하여 여성 참정권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졌으며, 가장 유명한 활동가로는 1791년 여성인권선언을 작성하고 단두대에 올라간 올랭프 드 구주가 있었다. 17~19세기 식량 폭동을 연구한 바에 따르면, 상인과 정부에 가장 먼저 달려가 목소리를 높인 건 살림을 책임지는 여성들이었다.

이 책이 발견한 수많은 여성의 목소리는 남성 위주의 오랜 역사 뒤편에서 여성의 혁명이 계속되고 있었음을 선명히 드러낸다. 단지 그간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다. 하지만 성별 간 위계에 대한 논쟁이 어느 때보다 격렬하게 전개되고 있는 지금 그 혁명은 온전히 완수되었다고 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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