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와 ‘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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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와 ‘최고’
  • 조원형 편집기획위원/서울대·언어학
  • 승인 2023.10.02 1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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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원형 칼럼]

 

요즘 항저우 아시안게임이 한창이다. 대한민국 국가대표 선수들을 비롯한 모든 참가자들이 자기 종목에서 최고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다.

여기서 ‘최고’란 ‘가장 뛰어난 것, 가장 좋은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런데 이 ‘최고’라는 말을 또 다른 곳에서도 종종 듣게 된다. 예컨대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 인쇄본 직지심체요절’ 같은 말에도 ‘최고’라는 말이 쓰인다.

그런데 이 ‘최고’는 ‘가장 뛰어난 것’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이 말을 그런 뜻으로 이해한다면 그것은 엄연한 잘못이다. 직지심체요절보다 더 잘 만든 금속활자본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활자나 활판 인쇄본들 중에서 ‘더 잘 만든 것’을 가늠하는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기준 자체를 찾기도 쉽지 않다. 이는 한글을 ‘세계 최고의 문자’라고 이야기할 수 없는 것과도 일맥상통한다. 일정한 규칙과 기준을 정해 두고 기량을 겨루는 운동 경기에서는 누가 최고인지를 평가할 수 있지만 활자나 글자 같은 것에는 모든 대상에 동일하게 적용되는 규칙과 기준이 없기 때문에 순위를 매기거나 우열을 가릴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 인쇄본’ 같은 말이 나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이 ‘최고’가 ‘가장 뛰어난 것’이 아니라 ‘가장 오래된’ 것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어 사용자들의 일상생활 속에서 ‘최고’라는 말이 ‘가장 오래된 것’이라는 뜻으로 쓰이는 일은 거의 없다. 누군가가 “이게 최고네!”라고 이야기한다면 듣는 사람은 그 말에서 가리킨 대상이 ‘가장 좋은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다 보니 가장 오래되었다는 뜻의 ‘최고’는 거의 글에서만 쓰인다. 그리고 글에서 이 말을 쓰는 사람들은 혼동을 막겠다는 구실로 대개 ‘最古’라는 한자를 병기하거나 혼용하곤 한다.

그렇다면 왜 한자를 병기하는 번거로움까지 마다하지 않으면서 ‘최고’라는 말을 가장 오래되었다는 뜻으로 쓰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고 계속 나타나는 것일까. 섣부른 단정일지도 모르겠지만, 어쩌면 애당초 동음이의어를 의식하고 이 말을 쓰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단순히 가장 오래된 것일 뿐인데 마치 가장 좋은 것인 양 여겨지도록 말이다. 가장 오래된 것이 항상 가장 좋은 것일 리는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저 가장 오래되기만 한 것을 가리키면서 ‘최고’라는 말을 쓴다면 그것은 독자를 교묘하게 눈속임하려는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최고(最古)’라는 말은 언중에게 더 익숙한 ‘최고(最高)’라는 단어마저 때때로 헷갈리게 만드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KBS에서 2012년 3월에 방영하고 2023년에 재방영한 다큐멘터리 <문명의 기억 지도> 제2부 ‘프톨레마이오스’에서는 “2000년 전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70만 권의 파피루스 두루마기를 소장한 세계 최고의 도서관이었습니다.”라는 말이 해설자의 음성으로만 나오는데, 이 말만 듣고서는 ‘최고’가 무엇을 가리키는지 명확하게 이해하기 어렵다. 즉 장서가 70만 권이나 되는 가장 좋은 도서관이라는 것인지, 2000년 전에 만들어진 가장 오래된 도서관이라는 것인지 모호하다. 다만 다큐멘터리 내용의 맥락을 고려하면 ‘가장 좋은 도서관’이라는 뜻으로 쓰였을 가능성이 높다. 그럼에도 오래 전에 나온 문물에 대해 ‘최고(最古)’라는 말을 쓰는 일이 있다 보니 가장 좋다는 뜻으로 하는 ‘최고(最高)’라는 말마저 이처럼 헷갈리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혼동을 막는 가장 좋은 방법은 ‘최고(最古)’라는 단어를 아예 쓰지 않는 것이다. 가장 오래된 것은 그저 가장 오래되었다는 식으로 풀어서 설명하면 된다. 굳이 ‘최고(最古)’라고 해서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가장 좋은 것’과 혼동하게 만드는 것은 어느 모로 보나 그리 좋은 언어 표현 방식이라 하기 어렵다. 이 말을 쓰지 않는다면 불필요한 한자 병기도 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이 실리는 <대학지성 In&Out>이 대한민국에서 ‘가장 오래된’ 학술 관련 언론 매체인 것은 아니다. 하지만 대한민국 ‘최고’의 학술 언론 매체로 자리매김하기를 바란다. 대한민국 ‘제일’의 학술 언론 매체, 대한민국에서 ‘가장 뛰어난’ 학술 언론 매체로 자리매김하기를 바란다고 해도 같은 뜻이 될 것이다. <대학지성 In&Out>이 그렇게 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조원형 편집기획위원/서울대·언어학

서울대학교 언어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과 대학원에서 언어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만하임 라이프니츠 독일어연구원 방문학자, 국립국어원 학예연구사 등을 거쳐 현재 서울대학교 기초교육원 강의교수로 일하고 있다. 주요 논문으로 “천주가사에 대한 텍스트언어학적 연구”, “텍스트언어학에 기반한 ‘쉬운 언어(Leichte Sprache)’ 텍스트 구성 시안”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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